“야구에서 아무리 위대한 타자도 5할 타자는 없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것이다. 실패는 언제나 성공보다 많다. 그게 정상이다.”
책 <일이 모두의 놀이가 되게 하라>(이강백 지음)에 나온 내용이라고 한다. 하긴 인생을 야구에 빗대 설명할 때도 으레 “야구는 10번 중 3번만 잘 쳐도 박수를 받는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하니까. 아마 거듭된 좌절을 위로해주는 최고의 말일 것이다.
야구 경기에서 한 타자에게는 네댓 번의 타석 기회가 찾아오고 이때 한두 번 안타를 때려내면 평균 이상의 타자로 각인된다. 앞선 3타석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도 마지막 4번째 타석에서 역전 결승타라도 치면 영웅으로 등극하는 게 타자의 위치다. 이틀 연속 4타수 무안타의 헛방망이질을 해도 3연전의 마지막 날 4타수 4안타를 때리면 그의 평균타율은 0.333이 된다.
타자의 성공은 곧 투수의 실패
2020 KBO리그 기준으로 타격 1위(10월11일 현재)는 롯데 자이언츠 손아섭(32)이다. 그의 타율은 0.357. 타석에 10번 서서 평균 3.5번은 안타를 쳤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서 ‘타석’이 오롯이 ‘타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타율을 계산할 때는 타석에서 볼넷, 희생타, 몸에 맞는 공, 희생번트, 희생뜬공, 타격방해, 주루방해 등을 제외한다. 상대 투수나 야수의 잘못이나 팀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타율을 계산할 때 빼주니까 얼마나 공평한가. 아무튼 손아섭은 10번 타격 기회에서 6~7번은 실패했다. 그런데도 그는 2020시즌 최고 타자 등극을 앞두고 있다.
입장 바꿔 투수라면 어떨까. 타자와 10번 상대해 3.5차례나 안타를 허용했다면 아마 B급 투수로 평가받을 것이다. 하물며 5번 이상 두들겨 맞는다면? 심각하게는 ‘배팅볼 투수’라는 비아냥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런 투수를 1군 마운드에 올릴 감독도 없겠지만.
투수에겐 서너 번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보통 피안타율이 2할 안팎일 때만 A급 투수로 평가받는다. 10번 중 8번 이상 타자와의 승부에서 이겨야 한다는 얘기다. 이 또한 ‘선발투수’에 한정된 얘기다. 불펜 투수의 실투는 자칫 팀 패배와 직결될 수도 있다. 앞선 8명의 타자를 잘 처리해도, 극단적으로 전부 삼진으로 돌려세웠어도 마지막 한 타자에게 홈런을 맞으면 그날의 역적이 된다. 공 하나에 그간의 힘겨웠던 과정은 와르르 무너진다. 공 24개가 스트라이크존에 꽂혀도 잘못 제구된 실투 하나가 투수를 마운드 위에 주저앉게 한다.
2020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 첫 등판을 끝으로 아쉽게 가을야구를 접은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올해 피안타율은 0.238. 그답지 않은 투구를 보여줬던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와일드카드 2차전 때 피안타율은 0.571에 이르렀다. 두 타자에 한 번꼴로 안타를 맞으면서 그의 2020 포스트시즌은 ‘실패’ 낙인이 찍혔다. 김광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은 어땠을까. 그의 정규시즌 피안타율은 0.197로 아주 괜찮았다. 포스트시즌에서는? 0.357로 솟구쳤다. 피안타 수가 늘면서 투구 수 또한 늘어, 그는 일찍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야구는 상대적인 스포츠다. 타자의 성공은 곧 투수의 실패가 된다. ‘10번 타석에서 3번만 쳐도 성공’이라거나 ‘실패는 언제나 성공보다 많다’는 말은 그런 면에서 다소 곡해가 생길 수 있다. 지극히 타자 중심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타자 10명을 상대해 7번을 잘 막았다고 투수에게 박수가 쏟아지지 않는다. 8할 이상의 성공이었을 때 그나마 박수가 나온다. 한 번 삐끗하면 낭떠러지 위에 설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민낯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그래서 투수일 수 있다. 우리의 이상은 매일 일상이라는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좇지만 말이다.
실패 확률을 볼까, 성공 확률을 볼까
삶이라는 불규칙 바운드가 많은 그라운드 위에서 우리는 나쁜 공을 최대한 골라내기 위해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는 타자일까, 아니면 속구를 던질지 브레이킹볼(좌우 또는 상하로 움직이도록 던지는 것)을 던질지 끊임없이 고뇌하는 투수일까. 실패 확률을 볼까, 성공 확률을 볼까.
시속 150㎞ 속구에도 움찔하지 않고 자신 있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였으면 좋겠는데, 연간 홈런 40개를 쳐대는 타자 앞에서도 일말의 두려움 없이 바깥쪽 공을 던지는 투수가 되고 싶은데 어디를 보나 벤치워머(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벤치를 지키는 선수)인 것 같아서 슬프기는 하다. 불공정한 그라운드만 탓하는, 혹은 자신을 써주지 않는 감독, 코치만 원망하는 그런 벤치워머.
참고로 2020 KBO리그 개막일에 등록된 선수 813명(육성선수 225명 포함) 중 1군 무대를 한 번이라도 밟은 선수는 총 572명이었다. 부상이나 재활 선수를 제외해도 꽤 많은 선수가 2군 퓨처스리그에만 머무르다가 더러는 시즌 중간에 짐을 쌌다. 10월8일 롯데가 김대륙 등 9명의 선수를 방출한 것이 그 예다. 이들은 모두 올해 1군 출장 기록이 없다. KBO리그에는 매해 드래프트(신인 선수 선발)를 통해 110명 넘는 선수가 새롭게 10개 팀에 합류하고 이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최소 110명의 선수가 구단 밖으로 내몰린다. ‘프로야구’라는 정글은 그렇게 실패자를 솎아내며 굴러간다.
현실이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한 벤치워머 인생이라도 정신줄은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겠다. 그 누가 알겠는가. 준비됐다고 생각했을 때 단 한 타석, 단 한 번의 투구 기회가 찾아올지. 연습생 신분으로 프로를 시작해 KBO리그 역사상 처음 시즌 200안타 고지를 밟았던 서건창(키움 히어로즈)의 말로 글을 갈무리한다. (역시나 타자의 길을 좇는 걸 보니 나도 이상주의자다.)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만 한다. 100% 가지고는 안 된다. 100%를 가지고도 막상 기회가 왔을 때는 분명히 100%를 발휘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절반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100% 이상 준비해놓아야 그나마 100%에 근접할 수 있다. 당장 내일이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미리 준비했으면 한다.”
낭만시대는 저물고
덧붙이기. 글을 마무리할 즈음, 키움 히어로즈 손혁 감독의 자진 사퇴 소식이 들렸다. 사실상 경질이다. 프로 감독 데뷔 첫해 그의 성적은 73승1무58패. 초보 사령탑으로 5할 이상 승률(0.557)로 리그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프로야구는 점점 현실을 닮아간다. 낭만시대도 함께 저물어간다.
김양희 <한겨레> 기자·<야구가 뭐라고> 저자
*‘김양희의 인생 뭐야구’는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합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 훈장 거부한 교수 “대통령과 그 사은품, 다 유통기한 지난 불량품”
‘북한강 주검’ 교제살인이었다…그 장교, 연인관계 끝내려 범행
엄마, 왜 병원 밖에서 울어…취직 8개월 만에 죽음으로 끝난 한국살이
동덕여대 ‘과잠’ 반납 시위…“남녀공학 전환 반대”
검찰, 이대로면 ‘명태균 지시’ 따른 셈…예상되는 수사 시나리오
아이돌이 올린 ‘빼빼로 콘돔’…제조사는 왜 “죗값 받겠다” 했을까
달라진 트레비 분수…“흉물” “오히려 좋아” 도대체 어떻길래
이재명 대북송금 재판 생중계 않기로…법원 “요건 안 맞아”
삼성전자, HBM 반도체 천안서 생산
홍준표 “윤은 고마운 용병, 나머지는 분란만”…한동훈 깎아내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