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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데 왜 이리 웃길까요?

인생 위기 딛고 일어서는 40대 여성 다룬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연배우 강말금
등록 2020-02-29 16:25 수정 2020-05-02 19:29
강말금 배우. 박승화 기자

강말금 배우. 박승화 기자

인생 참 웃프다. 영화밖에 몰랐던 영화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와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뒤늦은 후회를 해도 소용없다. 모아놓은 돈도 없다. 산동네 월세방으로 집을 옮겼다. 40살, 연애도 못하고 나이만 먹었다. 먹고살기 위해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한다. 그런데도 찬실이는 밝고 씩씩하다. 돈은 없지만 인복은 많다. “좋은 누나로 생각한다”는 연하의 남자 김영(배유람)을 만나고, 마음 따뜻한 집주인 할머니(윤여정)도 생겼다. 옆에서 고민을 들어주고 인생 조언을 해주는 귀신까지 있다. 그 귀신은 예전에 좋아하던 배우 장국영을 닮았다.

3월5일 개봉을 앞둔 영화 (전체 관람가)는 일자리를 잃은 40살 찬실의 시련과 성장을 그렸다. 단편영화 (2011), (2013), (2016)로 주목받은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휩쓸고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받으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품이다.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그린 여성 서사 영화 와 를 잇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2월25일 오후 서울 공덕동에서 의 찬실 역을 맡은 배우 강말금을 만났다.

힘들지만 밝게, 찌질하지만 귀엽게

2008년 연극 로 데뷔한 그는 에서 처음으로 장편영화 주연을 맡았다. “줄곧 조연만 했는데 시대를 잘 만난 것 같아요. ‘미투’ 이후 여성 중심 작품이 잇따라 선보이고 주목을 받잖아요. 그런 흐름에서 이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찬실이처럼 저도 복도 많아요. 평범한 제가 마흔이 넘어 주연을 맡았으니까요.(웃음)”

그가 이 영화를 선택한 건,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는 주체적인 여성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찬실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린 대상화된 인물이 아니에요. 자신의 목소리가 있는 당당하고 굳센 인물이에요.” 영화는 김초희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김 감독은 3년 전 영화 일을 못하게 됐을 때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는 암울한 현실을 그리지만 무겁지 않고 경쾌하다. 유머와 위트가 빛난다. 배우인 그 역시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많이 웃었다. “대사가 재미있어요. 찬실이 대사 중에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예요?’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 차이는 생각할 필요 없어요’라든지. 영화 편집 과정에서 빠졌는데 찬실이 ‘고마워요, 정말’ 그러면 김영이 ‘아니에요, 정말’ 이런 대구를 이루는 대사도 재미있어요.”

그는 찌질하고 궁상맞은 찬실을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만들었다. 김 감독이 그에게 주문한 것도 그런 이미지였다. 촬영할 때마다 “힘들지만 조금 더 밝게, 찌질하지만 조금 더 귀엽게, 외롭지만 당당하게” 연기하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힘든 일을 겪은 사람에게 입혀진 고단함, 찌든 모습 등 상투적인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다. 그 덕에 찬실에게는 깨알 같은 귀여움이 묻어난다. 연하의 남자 김영을 안으며 “저 남자 10년 만에 처음 안아봐요. 꽉 안아주세요”라고 하더니 너무 꽉 안아줘서 아팠는지 귀엽게 “아야∼”라고 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공 찬실 역을 맡은 배우 강말금(왼쪽). 찬란 제공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공 찬실 역을 맡은 배우 강말금(왼쪽). 찬란 제공

“지금 중요한 건 행복하게 사는 것”

자신처럼 40대 비혼인 찬실과 비슷한 점도 많다. “영화를 본 친구의 딸이 ‘말금이 이모가 저기 있다’고 했대요. 찬실이 이야기가 곧 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찬실만큼 큰 실패는 아니지만 저 역시 살면서 소소한 실패들을 겪었어요. 그때마다 ‘별수 없지’ ‘괜찮아, 지나가겠지’라며 그 순간을 넘겼어요. 그럴 때 ‘나 강하구나’ 느껴요. 저에게 그런 긍정적인 면이 있더군요.” 찬실에게는 닮고 싶은 점이 많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남 탓을 하지 않고 좌절해도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것이다.

비극에서 태어난 희극 같은 영화는 삶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 극중 귀신 장국영은 인생의 길을 잃은 찬실에게 말한다.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으라고 한다. 행복하려면 제일 먼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떠나보내지 않고 쥐고 있으면 새로운 것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몽땅 가지고 싶다는 마음만 버리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영화는 “삶이 힘들어도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복(福)”이라고 말한다. 찬실은 실직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며 주변 사람들을 자세히 보게 됐다. 영화는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찬실처럼 40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그는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소소한 행복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 질 녘, 집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요. 그때 ‘아,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 봄에 꽃이 피면 좋고요. 저도 30대까지는 이런 걸 지나치고 잘 몰랐어요. 그저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하지’라는 생각만 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한 사람으로 일상을 행복하게 살아야 연기도 잘하는 것 같아요. 내 삶을 들여다보고 돌보는 게 먼저죠.”

“참 잘했다, 말금아!”

그는 이 영화를 마치고 자신에게 “참 잘했다, 말금아!”라며 토닥였다. 촬영 분량도 많고 부담도 컸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쳤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다보니 한정된 제작비로 영화를 찍어야 해요. 정해진 회차 안에, 정해진 날짜에 야외촬영을 해야 하고요. 무엇보다 그 기간에 체력이 떨어지지 않게 컨디션을 유지해야 해요. 오늘 일이 내일 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요. 그걸 목표로 삼아 이 영화를 찍었어요.” 이제는 영화의 전체적인 조화와 흐름을 중요하게 여긴다. “예전에는 한 장면, 한 장면 다 욕심을 부려 잘하려고 했어요. 그걸 하나하나 붙여놓으면 어느 장면이 튈 수도 있고 욕심이 과해 보일 때도 있어요. 그것이 영화 전체를 생각하면 좋은 게 아니더군요. 음악, 미술 등 여러 요소와 어울려 영화 한 편을 완성하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가 또 다른 ‘찬실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영화이길 바란단다. “다른 분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항상 이렇게 말해요. ‘저는 30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극단에 들어갔습니다’라고요. 30대에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한 영화가 29살 때 본 예요. 이 영화를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저처럼 인생을 바꿀 정도가 아니더라도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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