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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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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만리포 겨울엔 평창

“내년엔 제주도 가볼까” 했다가도 어김없이 향하는 곳
등록 2020-01-25 14:05 수정 2020-05-02 19:29
노을이 질 땐 세상이 붉다.

노을이 질 땐 세상이 붉다.

5년 전부터 매년 5월 필리핀 세부로 가족여행을 갔다. 정확하게는, 세부에 있는 ㄱ리조트를 갔다. 세부 국제공항에 도착해 셔틀버스로 리조트에 들어가면 귀국 비행기를 탈 때가 되어서야 다시 밖으로 나올 때가 많았다.
리조트는 세 식구가 각자 가장 중시하는 ‘여행의 필수조건’에 부합했다. 어린 딸은 리조트에 딸린 야트막한 해변에서 종일 물놀이를 했다. 남편은 수준급 시설인데 제주도 호텔 절반도 안 되는 숙박비에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를 느꼈다. 피로한 나는 리조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필요가 없는 ‘올 인클루시브’(모든 것이 포함됨) 하나면 그만이었다.
사실 야트막한 해변, 가심비, 올 인클루시브를 충족하는 곳은 너무 많다. 그런데 왜 ㄱ리조트였을까. 체력이 호기심을 못 따라가는 나이, 부부의 여행 무게중심이 ‘미지의 장소에 대한 설렘’에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으로 급격히 이동하던 찰나, 세 식구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그곳을 발견했다는 설명이 가장 사실에 부합한 것 같다.
편안하자고 하면 집에서 쉬면 되지 않는가. 김영하 소설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은 미루고 있는 일을 떠올리게 하고, ‘집안의 상처’는 집안 사람들에게 해준 뼈아픈 말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전쟁처럼 집을 마련해놓고는, 집에서는 쉴 수가 없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는 전남 여수에 마련한 작업실 ‘미역창고’에서 를 썼다. 그는 책에서 ‘슈필라움’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에드워드 홀의 ‘공간학’에서 빌려온 이 단어는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는 최소공간’을 말한다. 몇 명은 여행지에서 슈필라움을 찾은 것 같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나로 살 수 있다.
그 낯선 여행지에는 낯선 것이 하나도 없다. 장인숙씨는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가게를 가지만 다 엇비슷하다. 14년째 여름이면 같은 곳으로 가는 김미경씨나 매년 여름엔 만리포, 겨울엔 평창을 가는 김송은씨나, 공간적으로 같은 여행지가 지난해와 똑같지 않다. 만나는 가족의 아이는 나이 들어가고 펜션의 개와 점점 친해진다. 기선 만화가는 우주가 관망하는 인연의 끈이 여행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떠나도 그리운 그곳, ‘도돌이표 여행’ 얘기를 따라가보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여름엔 만리포, 겨울엔 평창. 요 몇 년 우리 부부의 휴가 패턴이다. 갔던 곳을 또 가는 건 그 지역이 좋아서이기도 하고, 숙소에 애착이 생겨서이기도 하다. 갈 때마다 반겨주는 강아지도 반갑다. 별장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충남 태안의 만리포에 처음 갔던 건 2017년 가을. 천리포 수목원에 갔다가 바로 옆 만리포 해안을 드라이브했다. 바다가 탁 트인 것이 눈이 시원했다. 해수욕장 입구 모래밭에 ‘만리포 내 사랑’ 시비가 서 있었다. 과연 사랑할 만한 곳이었다.

이듬해 여름 7월 말~8월 초 극성수기에 만리포를 찾았다. 성수기를 피해 바다에 갈 때마다 번번이 태풍을 맞고는 역시 남들이 놀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며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바닷가 숙소는 예상대로 너무 비쌌다. 에어비앤비에서 만리포 숙소를 검색했다. 날짜, 거리, 가격 등 조건을 맞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랐다. 해수욕장에서 차로 15분쯤 떨어진 작은 전원주택지에 있는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고 조용한 방이었다. 씩씩한 여주인과 황금색 큰 개가 요란스럽지 않게, 다정히 맞아주었다. 방 하나에 조그만 주방과 거실, 화장실이 있는 숙소에는 필요한 모든 게 있었다. 창을 열면 잘 가꾼 정원이 내다보였다.

짐을 부려놓고 해수욕장으로 갔다. 인파에 바다 구경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살짝 걱정했지만, 만리포는 넓었다. 사람이 꽤 많은데 해변은 띄엄띄엄했다. 파라솔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우니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맥주를 마시고 만화책을 봤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니 바다가 조금 가까워졌다. 더워지면 젖은 모래를 밟고 걸어서 바닷물에 들어갔다.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도 허리까지밖에 잠기지 않는다. 만리포의 백미는 석양이다. 바다가 넓으니 하늘도 넓다. 노을이 질 땐 세상이 붉다.

밤엔 숙소로 돌아와 마당에서 고기를 구웠다. 조용해서 말도 자연히 소곤소곤하게 된다. 하늘엔 별이 많고, 바삐 오가는 여객기 불빛도 보인다. “저 비행기는 제주도에 가는 걸까? 내년엔 제주도에 가볼까?” 같은 대화를 했지만 다음해 또 만리포에 갔고, 그 집에 묵으며 상냥한 황금색 개와 함께 놀았다. 만리포는 넓고, 바로 옆 천리포는 너무 예쁘고, 조용하고 깨끗한 그 집은 편안하다.

겨울에 강원도 평창에 가는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다. 재작년 방림면에 있는 더덕밭이 보이는 집에 묵었고, 지난해엔 조동리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 묵었다. 3박4일치 식단을 짜고, 장을 보고 평창읍 올림픽시장에 들러 메밀부침개랑 막걸리를 먹고, 더 깊숙이 산속으로 들어간다. 춥고 공기는 맑고 산은 아름답다. 눈에 흉한 것이 조금도 걸리지 않는다.

TV도 없는 작은 집에서 잠을 아주 많이 자고, 깨어 있는 시간엔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을 자박자박 밟고 산책하러 나갔다가 돌아와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술을 마시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눈다. 너무 고요해서 쓸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면 올해도 잘 살았네 싶고, 내년도 별일 없이 살아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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