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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취향을 가진다는 것

제1295호
등록 : 2020-01-0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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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연말에 어떤 모임에 가게 됐다. 호스트(주인)의 환대로 스물 남짓의 문화계 종사자들이 이틀간 함께 지냈고, 우연히 합류한 나는 스스로를 관찰자적 입장에 위치시켰다. 사람들은 서로 호감을 보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낯선 분위기를 부드럽게 잡아갔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클래식 공연이었고, 현역 음악가들이 나와 모임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곧이어 어떤 무명 가수의 무대가 즉흥적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사람들을 이질적인 세계로 끌고 갔다. 시쳇말로 익숙한 클래식에 고취됐던 부르주아들은 갑자기 통속적인 세계로 떨어졌고, 생활세계의 냄새가 물씬 밴 1990년대의 대중가요 창법을 곤혹스러워했다.

시간을 소유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문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말한 문화자본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계급을 가장 첨예하게 갈라놓는 것은 이른바 문화자본으로, 웬만해선 그 간극을 좁히기 어렵다. 결국 ‘시간’을 소유한 사람만이 문화자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회화에서 한 시기나 유파의 스타일을 인식하고 미학적으로 향유하려면 어려서부터 사물을 지각하고 음미하는 생활환경에 노출돼야 한다. 뒤늦게 입문한 자들은 그 문화를 수용하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했기에 ‘색채가 부드럽다’거나 ‘멜로디가 흥겹다’는 식의 인상비평을 넘어서기 힘들다. 거기엔 맥락이 없고, 참조됐을 법한 경험의 각주가 없다. 이리하여 그 사람의 생활환경은 부지불식간에 노출된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취향관’ ‘살롱’ 등의 이름으로 학력, 나이, 직업을 감춘 채 문화자본을 공유하려는 이들의 모임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수직적 사회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이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근대화하기 전 일본에서도 신분제 바깥에서 함께 미(美)를 탐구하는 모임이 다양하게 결성됐다. 농민, 기술자, 상인들은 신분을 숨긴 채 하이쿠(일본 특유의 단시)를 짓고 춤과 샤미센(일본 현악기)을 배우면서 상층의 무사계급이나 엘리트가 누렸던 문화자본을 공유했다. 만약 여기서 자기 신분과 경력 따위를 드러내면 거칠고 촌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모임은 초반에는 서로를 섞고 경계를 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얼마쯤 흐르면 취향이라는 벽에 부딪힌다. 취향은 시간자본, 학력자본, 문화자본을 쌓아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결국 계층 간 벽을 무너뜨리기보다 상승지향적 문화를 공모해내는 측면이 있다. 비록 대중화한 살롱 문화라 하더라도 감정적 융합은 인지 행동과 해독 작업을 전제하는데, 먹고사는 세계의 바깥으로 거의 벗어나지 못했거나, 대학 진학을 못했거나, 혹은 지방의 빈곤한 문화자본 속에 살아온 이들은 노와 키를 잃은 내비게이터가 되어 겉돌게 된다.


취향 공유자들은 삶을 공유할까

취향은 체계적인 지적 교육과 암묵적 습득의 산물이다. ‘흙수저’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과 동영상에 빠져 문화 빈곤자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이유다. 그들은 가끔 떠밀려가는 미술관이나 콘서트홀에서도 오로지 ‘신기함’과 ‘따분함’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이들과 분리하면서 결국 ‘취향’이란 말로 구별짓기를 정당화해간다. 취향은 감정과 주관이라는 외투를 두르고 노골적인 셈법을 들이대지 않아 너그럽게 용인되는 듯하지만, 결국 자본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삶의 격차를 드러낸다. 그래서 취향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반(反)취향의 모습을 취하며, 그 반취향 역시 새로운 문화공간을 만들어내지만, 고전적인 취향을 구분해 지속시키는 연료로 쓰고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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