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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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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었다

4명의 여공을 다시 불러내는 ‘시다의 꿈’
등록 2020-01-10 01:51 수정 2020-05-02 19:29
전태일기념관 제공

전태일기념관 제공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 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의류 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1969년 12월19일 전태일”

2019년 12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있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이하 전태일기념관). 전태일 열사가 근로감독관에게 여공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해달라고 요청하며 쓴 편지가 건물 벽면을 채우고 있다. ‘나’보다 ‘우리’를 얘기하며 굶주린 시다(봉제공 보조)들과 풀빵을 나눠먹던 ‘전태일 정신’을 한 글자 한 글자 새긴 곳이다. 이곳에서 2020년 ‘전태일 50주기’를 알리는 첫 기획전 ‘시다의 꿈’(3월29일까지)이 열린다.

‘시다의 꿈’은 1980년대 중반 시다로 시작해 지금까지 봉제산업에 종사하는 4명의 여성 노동자(김경선·박경미·장경화·홍경애)의 이야기를 4편의 소설로, 사진으로, 그래픽디자인으로, 설치예술로 선보인다.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으로 여공들을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다. 이날 전시에 참여한 봉제노동자 홍경애씨, 최정화 소설가, 표창연 건축가, 김동선 디자이너, 유현아 시인이자 전태일기념관 문화사업팀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소설이 된 홍경애씨의 삶

‘시다의 꿈’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홍경애(50)씨는 18살 때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시다로 취직했다. 공장에 함께 다녔던 미싱사(봉제공)의 소개로 야학 ‘시정의 배움터’에 나갔다. 공장주가 시키는 대로 일만 하던 홍씨는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었고, 야학을 졸업한 뒤에는 전태일 열사 분신 직후 결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조에서는 문화예술부 활동을 하며 연극으로 열악한 봉제 노동환경 문제를 알렸다. 당시 노조 활동을 하는 게 알려져 해고되는 바람에 이리저리 공장을 자주 옮겨다녔다. 현재는 신당동 작은 봉제공장에서 객공(작업량에 따라 돈을 버는 숙련공)으로 일한다.

30년 넘게 봉제업에서 일하는 홍씨는 봉제 역사의 산증인이다. “시다로 일했던 그때나 열악한 노동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바쁠 때는 새벽 6시에 나가서 밤 10시까지 일해요. 일하다 다쳐도 개인 보험으로 처리해요.” 심각한 문제는 종사 인력의 고령화, 영세한 하청방식 생산구조다. “10명이 일하는 작업장에서 50대인 제가 제일 어려요. 40대도 찾기 어려울 정도예요. 대신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어요. 그들을 연결해주는 인력시장도 있고요.”

봉제노동자 홍씨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졌다. 최정화 작가가 쓴 다. 이 소설은 한국말도 서툴고 재봉 작업도 잘 못하는 이주노동자 쑤안과, 쑤안에게 한 시간의 연습시간과 시급을 챙겨주는 인정 많은 봉제공장 사장 경애의 이야기다. 시간제 일을 하며 쪽방에 사는 쑤안이 낯선 땅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는다. “창신동 43X번지 일대에 600개 정도의 쪽방이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용직으로 일하는 봉제노동자들인데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사고가 나면 대개 말없이 죽거나 다치고 그 일이 없었던 듯 꿈인 듯 해결책이나 대책도 마련되지 않고 잊힌다. 그러면 누군가 목소리를 내지 못한 그 방에 다시 어떤 돈 없고 힘없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다른 이가 들어오는 것이다.”( 중에서)

‘시다의 꿈’ 전시에 참여한 전태일기념관 유현아 팀장, 최정화 소설가, 봉제노동자 홍경애씨, 김동선 그래픽디자이너, 표창연 건축가(왼쪽부터). 전태일기념관 제공

‘시다의 꿈’ 전시에 참여한 전태일기념관 유현아 팀장, 최정화 소설가, 봉제노동자 홍경애씨, 김동선 그래픽디자이너, 표창연 건축가(왼쪽부터). 전태일기념관 제공

4인을 보여주는 색을 찾아서

최 작가는 소설을 통해 현재 봉제산업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주노동자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은 과거 10대 어린 시다들의 현재 얼굴이다. “홍경애님을 만나 고령화된 봉제노동자 이야기, 외국인 노동자를 연결하는 인력시장 이야기를 듣고 그걸 소설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설 화자인 봉제공장 사장 경애의 캐릭터는 홍경애님의 성격을 담았어요. 사람들에게 밥해주는 걸 좋아하고 어려운 동료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으로요.”

최 작가는 ‘시다의 꿈’ 기획전에 참여한 게 새로운 창작의 기회였단다. “제가 주로 스릴러물을 써와서 제 소설이 차갑고 서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이 작품은 전작과 달리 따뜻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쓴 가장 따뜻한 이야기예요. 홍경애님 이야기를 들으며 기존과 다른 결의 소설이 나왔어요. 처음에는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는 게 부담됐는데, 그런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하며 저도 알지 못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어요. 무엇보다 봉제노동자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어요.” 최 작가는 이번에는 소설 쓰기에 그치지 않을 것 같단다. 소설을 읽은 분들과 소설의 배경이 되는, 봉제공장이 밀집한 서울 창신동 걷기 행사도 구상 중이다.

‘시다의 꿈’ 전시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결합했다. 각기 다른 눈으로 봉제노동자의 현재 의미를 해석해 보여준다. 김동선 그래픽디자이너는 봉제노동자의 이야기를 패턴과 색으로 형상화했다. 김 디자이너는 화려한 그래픽으로 이 전시를 보여주기보다는 소설의 텍스트와 의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작업했단다. “봉제노동자 4명을 보여줄 수 있는 색을 찾았어요. 그분들을 담은 사진을 보니 실패의 색이 보이더군요. 다들 비슷했어요. 초록색과 분홍색. 그 두 색을 넣어 미싱의 움직임, 작업공간 등을 상징하는 점선, 원형, 직선 패턴을 만들었어요.”

그중 최 작가의 소설 를 읽고 동그란 모양의 패턴을 넣었다. “관람객이 주인공 쑤안이라는 인물에 집중해서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패턴을 동그랗게 만들어 돋보기처럼 그 인물을 볼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전시 공간을 만든 표창연 건축가는 봉제노동자 이야기를 보며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건축업계 노동 현실을 되돌아봤단다. “잦은 야근과 과도한 노동은 너무나 비슷했어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이제 주 52시간제 이야기를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에게 그건 그저 먼 이야기잖아요. 또 한편으로 이 작업을 하며 나 역시 ‘노동자로서 내 권리를 찾고 있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표 건축가는 이번 전시에서 봉제노동자 4명의 삶이 잘 보이도록 네 개의 방을 꾸몄다. 전시장에 낮고 좁은 봉제작업장을 연상시키는 나무 칸막이 방을 만들었다. “네 개의 방에선 봉제노동자 4명의 소설을 읽을 수 있어요. 소설 속 문장을 칸막이 방 벽면에 넣었어요. 그 공간에서 관람객은 봉제노동자의 삶을 생각하고 노동하는 또 다른 누군가를 기억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1980년 봉제노동자와 2020년 건축노동자

‘시다의 꿈’은 아르바이트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노동복지의 그늘을 조명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전시전을 기획한 유현아 팀장은 말한다. “봉제노동자 박경미씨가 ‘시다는 시작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끝나는 시간이 없었다’라고 말해요. 그럴 정도로 봉제산업의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했던 노동자예요.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이름이 호명되지 않고 사라져가는 수많은 노동자의 이름을 호명할 것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전태일들이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일할 권리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봉제노동자 4명의 이야기를 담은 ‘네 개의 방’, 반재하 작가의 설치물 <셔츠와 셔츠>,  노동연극 <넘어가네>를 낭독극으로 재현한 영상(위부터). 전태일기념관 제공

봉제노동자 4명의 이야기를 담은 ‘네 개의 방’, 반재하 작가의 설치물 <셔츠와 셔츠>, 노동연극 <넘어가네>를 낭독극으로 재현한 영상(위부터). 전태일기념관 제공


‘시다의 꿈’ 전시 공간


소설이 있는 방, 노동자가 꾸민 광목천


“나는 오야(고참 미싱사)가 되고 싶었으나, 오야가 되기 위해 아무도 착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리는 노동복지 기획전 ‘시다의 꿈’ 3층 전시장. 소설가 4명과 여성노동자 4명의 이야기를 담은 네 개의 방 중 한 곳에 적힌 문장이다. 이것은 봉제노동자 장경화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세랑 작가가 쓴 소설 속 한 문장이다. 장씨는 집안 형편상 서울로 온 뒤 시다로 시작해 현재까지 미싱사로 살아오고 있다.
다른 방에서는 봉제노동자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 조해진 작가의 , 이주란 작가의 , 최정화 작가의 를 읽을 수 있다. 관람객이 그 소설을 담은 인쇄물을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네 개의 방 옆에는 반재하 작가의 작품도 전시돼 있다. 반 작가는 의류기업의 사진과 셔츠 두 벌을 걸어놓은 설치물을 통해 현재 봉제산업에서의 열악한 노동을 드러낸 작품 를 선보인다.
1층 전시장에는 사진가 전경숙과 여성노동자 4명이 협업한 사진 작업이 펼쳐진다. 전경숙은 야학 ‘시정의 배움터’ 강학(교사)으로 4명을 만나, 이들의 현재를 담은 사진을 광목천에 인화했다. 4명의 여성노동자는 자신의 사진 위에 실로 꿰매고 장식을 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꾸몄다. 2층에서는 ‘시다’라는 말의 어원을 적은 글과 1970년대 중반 어느 시다의 하루 일과표를 보여준다. 야학 ‘시정의 배움터’ 3기생들이 직접 쓴 노동연극 를 낭독극 형식으로 재현한 영상을 상영한다. 관람료는 없다.
3월29일까지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조해진·정세랑·이주란·최정화 작가와의 대화, ‘봉제 하루 만에 배우기’ 워크숍, ‘시다의 꿈’ 간담회, 한국여성노동사 강의, 여성노동 관련 영화 상영회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이 함께 열린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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