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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국방부 시계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10-29 10:45 수정 2020-05-03 04:29

빛바랜 역사책이나 영화에서, 혹 정치 후진국에서 볼 법한 군사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 불과 2년 전, 2017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광화문 촛불을 끄려는 계엄령 기도가 실패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뒤늦게나마 세상에 알려졌고 수사도 이뤄졌다. 불행인 건 온전히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고 단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봉합됐다. 이 탓에 친위 쿠데타 모의를 인지했거나 관여했거나 심지어 동참했던 인물들이 군에, 정치판에 또 어딘가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다. 반쪽 수사와 가려진 진실의 틈새에서 재기를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가 아닐까. 10월21일 군인권센터가 계엄령 문건 원본(현 시국 관련 대비계획)을 공개하자 다시 논란이 일었다. 지금의 제1야당 대표도 관여한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불거졌다. 내용도 지난해 공개됐던 문건(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 방안)보다 더 자세하다. 박근혜 정부 때 야당 의원을 집중 검거한 뒤 사법처리하는 방안이 담겼고 계엄군의 배치 장소도 구체적으로 나왔다.

시간은 앞으로만 내달린다.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미래로 나아간다. 역사는 시간의 법칙과 달리, 앞으로도 갔다 뒤로도 갔다 때론 갈지자를 그린다. 신군부 출신 전두환의 계엄령 검토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쿠데타’나 ‘계엄령’은 박물관에나 보내야 할 사라진 단어였다. 30년 만에 다시 살아났고, 민주화 이후에도 ‘국방부 시계’는 역주행할 수 있다는 무서운 기억과 교훈을 남겼다.

현 정부가 들어선 지난 2년 반 새 한반도 분단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남북 정상이 자주 얼굴을 마주했다. 덕택에 북-미 정상도 세 번이나 만났다.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문재인 정부의 노력이 컸다. 현 정부는 경제에서 점수를 잃었지만 평화에서는 점수를 얻었다. 부침이 있었으나, 아직 평화는 이 정부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다.

의외인 건 평화와 어울리지 않는 군비 증강이다. 현 정부 들어 북한과 군비경쟁이라도 하듯 국방비 예산이 빠르게 늘고 있다. 증가폭으로 보면 안보 불안을 부추겼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크게 웃돈다. 두 보수 정부 10년 평균 국방비 증가율이 4.96%인데 문재인 정부에서 3년 평균이 7.53%(2020년 치는 정부 예산안 기준)에 이른다. 평화의 짝으로 군축이 잘 어울린다는 공식이 깨졌다. 제1야당이 ‘진보 좌파’(?)라고 부르는 정권에서 말이다. 남북관계나 북-미 관계가 개선되는 상황에서 군비 증액은 이전보다 가팔랐다. 평화로울 때일수록 더욱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른다면 할 말이 없지만, 국방비의 역주행이다.

지난 10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미국산 무기를 구매한 나라다. 주로 최신 첨단무기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오스트레일리아 다음으로 큰손이다. 늘어나는 국방비도 첨단무기체계 확보 등 방위력 개선 쪽에 들어가는 예산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 경항모급 다목적 대형수송함 건조, 장보고-Ⅲ(3천t급 잠수함) 건조 등 크고 화려한 무기 구매에 해마다 더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밀덕’(밀리터리덕후·무기 마니아)들에게 신나는 일이지만, 한 손엔 좀더 큰 평화를 다른 한 손엔 좀더 많은 첨단무기를 쥐려는 이상한 모양새다. 상대편과 오른손으로는 신뢰의 악수를, 등 뒤 왼손으로는 불신의 군비경쟁을 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분단국가에서 ‘국방부 시계’는 다른 특수한 시간과 상황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하면 그만인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쿠데타나 계엄령처럼 박물관으로 보낸 유물이 다시 살아날 때 우리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들은 탱크를 몰고 나설 때 이렇게 말해왔다. ‘국가의 안녕과 질서 유지가 어려워 보여서 나섰다.’ 국방의 특수한 시간과 상황을 허락하다보면 언젠가 역사마저 역주행할 수 있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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