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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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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를 감금한 나무꾼, 너를 징역 5년에 처한다!

이화여대 14학번 5인방의 전래동화 다시 쓰기
등록 2019-08-16 00:51 수정 2020-05-02 19:29
이화여자대학교 독서모임 ‘구오’는 성폭력, 성별 역할 고정으로 얼룩진 전래동화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썼다. 왼쪽부터 현지, 애린, 유진, 경민, 다은. 김진수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독서모임 ‘구오’는 성폭력, 성별 역할 고정으로 얼룩진 전래동화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썼다. 왼쪽부터 현지, 애린, 유진, 경민, 다은. 김진수 기자

‘지금쯤이면 옷이 없어진 걸 알고 큰일 났다며 울고 있겠지? 얼른 가서 내가 데려와야지. 어쩌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할지도 몰라.’
선녀를 아내로 삼을 생각에 나무꾼의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어. 그런데 폭포에 가까워져가는데도 선녀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거야. 인기척 없이 텅 비어 있는 폭포에 당황한 나무꾼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찰나.
“잡아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나무 위에서 선녀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한 거야. 선녀들은 순식간에 나무꾼을 에워싸고 나무꾼의 몸을 나무줄기로 결박했어. (중략)
“감히 선녀의 옷을 훔치다니. 배짱이 두둑하구나. 우리가 목욕하는 동안 저쪽에서 얼쩡거리던 게 너였지? 내 옷을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거라” (‘선녀와 나무꾼’)
전래동화 개작 개정판

사냥꾼한테 쫓기던 사슴을 나무꾼이 구한다. 사슴이 보답으로 소원을 묻자 나무꾼이 장가가고 싶다고 한다. 사슴의 조언대로 나무꾼은 선녀들이 목욕하고 있는 폭포에서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다. 여기까진 어렸을 때 읽었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과 같다. 달라지는 지점은 여기. 날개옷을 잃어버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과거의 선녀는 울고 나무꾼을 따라가 부부로 살지만, 2000년대 선녀는 더 이상 울지도 참지도 않았다.

선녀는 나무꾼을 잡아 “목욕하던 선녀들의 알몸을 몰래 엿본 죄,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 죄, 선녀를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삼으려 한 죄”를 물었다. 만약 나무꾼이 지금 시대에 형사처벌을 받는다면 어떤 조항을 적용받을 수 있을까. 선녀의 날개옷을 숨기고 찾지 못하게 해 형법 제366조 재물은닉죄(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할 수 있다. 또 집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날개옷을 빼앗아 선녀의 신체 자유를 제한했기 때문에 형법 제276조 감금죄(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를 적용받을 수도 있다.

상당수 전래동화에서 남성의 영웅적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남성의 성폭력을 당연시하고 여성을 부수적인 인물로 그린다. 또 여성은 성격의 좋고 나쁨을 외모와 결부해 평가받고, 계모는 ‘콩쥐팥쥐’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처의 아이들을 학대하는 부정적 인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전래동화가 내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성차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전래동화 다시 쓰기에 나선 여성들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1995년생 동갑내기들이 모인 독서토론회 ‘구오’다.

동화가 성폭력·성차별·외모지상주의 온상

구오(俱悟)는 ‘함께 깨닫는다’는 뜻이다. 2015년 교양수업을 함께 들은 경민(국제학부), 다은(사회학과), 애린(영문학과), 유진(심리학과), 현지(국어국문학과)는 한 달에 2~4번 독서모임을 하면서 여성주의적 시각이 담긴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그리고 2017년 12월 말, 전래동화에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 다시 써보자는 의견을 모았다. “우리가 전래동화 다시쓰기로 주제를 잡은 게 어렸을 때 읽은 ‘흑설공주’(미국 여성학자 바버라 G. 워커가 ‘백설공주’를 비틀어 쓴 동화)라는 책이 계기가 됐다. 서양 동화도 바뀌었는데 우리 전래동화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경민)

이야기는 다은ㆍ애린ㆍ현지가 다시 쓰고, 유진은 삽화를 그렸다. 경민은 퇴고 단계에 참여했다. 책을 출간하려고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후원을 받았다. 목표액 100만원을 훌쩍 넘는 1491만원이 모였다. 이렇게 해서 ‘서동과 선화공주’ ‘선녀와 나무꾼’ ‘처용’ ‘우렁각시’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등 작품 9개를 다시 쓴 책 가 작년 말 나왔고, 출판사의 제안으로 ‘박씨전’을 추가해 작품 10개를 실은 개정판을 냈다.

정희진 여성학자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어느 시대나 지배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현상은 피지배 세력이 자기 위치와 구조의 부당함을 깨닫고 이전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흑인이 노예 노동을 거부하고 여성이 희생과 자기 비하에서 벗어난다면, 우리가 더 이상 서구 사회에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면, 세상은 좀더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동화는 미래 세대인 어린이를 훈육, 세뇌하는 가장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다. 동화에 대한 개입, 재해석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인 이유”라고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젊은 여인네들을 만나 원기를 충전해야 함은 당연지사이니 그것은 자네가 이해하는 것이 맞네.” 하는 게 아니겠어. 염치도 없지. (‘장화홍련전’)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나무꾼에게 죄를 묻고 처벌한다. 공범인 사슴도 처벌을 피할 순 없었다. 책 〈선녀는 참지 않았다〉 중 ‘선녀와 나무꾼’ 편에 실린 삽화. 위즈덤하우스 제공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나무꾼에게 죄를 묻고 처벌한다. 공범인 사슴도 처벌을 피할 순 없었다. 책 〈선녀는 참지 않았다〉 중 ‘선녀와 나무꾼’ 편에 실린 삽화. 위즈덤하우스 제공

여성을 거래·보상·납치 대상으로

에서 다룬 전래동화는 현재 여성이 겪고 있는 성차별과 성폭력, 성역할 강요 등 여성 이슈의 축소판이다. 예를 들어 눈도 팔도 다리도 한쪽밖에 없는 반쪽이가 한 대감과 내기에서 지혜를 발휘해 대감의 딸을 몰래 업어가 혼인한다는 내용의 원작 ‘반쪽이’에선, 여성이 내기의 대가로 교환되고 물건으로 다뤄지는 ‘여성 거래’가 연상된다.

‘우렁각시’는 또 어떤가. 남성은 농사, 여성은 가사일이라는 전통적인 성별 고정 역할이 기반이다. 나무꾼이 선녀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선녀와 나무꾼’에선 디지털 성범죄가 떠오른다. 전래동화 중 몇 안 되는 여성 서사가 들어가는 ‘박씨전’도, 허물을 벗은 박씨 부인이 박색에서 미인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고정관념이 보인다.

‘선녀와 나무꾼’ ‘반쪽이’ ‘바리데기’를 다시 쓴 현지는 말했다. “‘반쪽이’를 쓰기 전에 어린이도서관에 가서 여러 그림책을 읽었다. 착한 반쪽이가 지혜로운 행동을 해서 그 대가로 대감의 딸을 보쌈해 가는데, 사실 납치지 않나. 모든 그림책에 이같은 내용이 다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저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남자아이들은 여성을 보상으로 받는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답답했다. 또 과거에 ‘박씨전’을 읽었는데 박씨 부인이 얼마나 주체적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허물을 벗었더니 예뻐졌다만 남았다. 당시에도 ‘예뻐야만 능력을 인정받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환멸을 느꼈다.” 다은도 ‘선녀와 나무꾼’을 재해석할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어렸을 땐 애들을 데리고 나무꾼을 떠나버린 선녀가 매정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무꾼한테 감정이입했다. 그래서 전래동화 다시쓰기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아이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 속 여성 캐릭터처럼 이들도 여성으로 생활하면서 겪은 고충이 있다. “집안이 가부장적이다. 제사를 지낼 때 남성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여성들은 제기를 닦고 음식을 만든다. 심지어 남성이 먹는 밥상과 여성이 먹는 밥상이 따로 있다.” “무뚝뚝해서, 애교 많은 딸이 아니라는 자책감이 대학 1학년 때까지 있었다. 부모님이 애교 좀 부려보라는 요구를 했다.” “대학원에서 교수님들이 남학생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 “기계 설비 일을 하고 싶었던 동성 친구는 ‘여자가 기름때 묻힐 수 있겠냐’는 말을 들었다.” “‘결혼할 거냐. 페미니즘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묻는 면접관도 있다.” 쉬지 않고 폭로가 나왔다.

“누가 더럽혀졌단 말입니까?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허물을 벗기 전 스스로를 부끄러이 여기던 제게 손을 내밀어준 것은 누구였습니까. 당신들이 그때 그 여인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박씨전’) 나쁜 남성 ‘징벌’ 넘어 ‘여성 연대’로

기존 동화가 남자다움, 여자다움 같은 성역할을 고착한다는 지적에서 성평등 대안 동화에 대한 필요성은 이미 오래전에 나왔다. 서양에선 1980년대 ‘신데왕자’, ‘내멋대로 공주’, 2000년대에 들어선 ‘흑설공주’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는 이 흐름의 일부인 셈이다.

‘구오’는 성차별적인 전래동화의 여성과 남성 역할의 전복을 꾀하고 남성을 처벌했다. 원작에선 ‘서동이 선화공주를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서동의 노래 때문에 귀양 간 뒤 서동과 결혼한 선화공주는, 다시 쓴 동화에선 자신을 음해한 서동을 찾아내 처벌한다. 계모는 위기에 처한 장화와 홍련을 구한다. 또 ‘우렁각시’가 아닌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우렁총각’이 나온다.

‘콩쥐팥쥐전’을 읽을 땐 뒤통수를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콩쥐 행세를 하는 팥쥐에게 원님이 목소리가 달라졌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아이고, 부인이 일을 나가 있는 동안 언제 돌아오나 하는 걱정에 목이 메여 지냈더니 그렇소.” 팥쥐가 원님에게 남편이 아닌 부인이라고 지칭하는 장면을 보면 책을 잘못 읽었나 싶어 앞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원님은 남성, 팥쥐는 여성이라는 기본 전제를 깼다. 친구들한테 미리 읽혔을 때도, 앞에 돌아가서 다시 읽었다고 하더라.”(다은)

이들은 잘못을 저지른 남성을 처벌한다는 징벌 서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기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처단하는 방법과 비슷하지 않냐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고민의 답을 여성 연대에서 찾았다. “우리가 다시 쓴 이야기 ‘박씨전’에서는 포로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돌아와 ‘화냥년’(환향년)이라 손가락질받을 때, 박씨 부인이 품어주고 연대하는 것으로 각색했다.”(현지)

퇴고 과정에선 삽화 이미지도 달라졌다. “서양 미의 기준에 맞춰져 있다는 생각”(유진)에 선화공주 자매의 이미지에서 화장을 덜어내고, 쌍꺼풀을 지웠다. 목욕하는 선녀들은 피부색과 체형이 제각각이다. “체모가 있는 여성 누드는 외설적으로 여겨졌다. 성적 대상화하지 않는 여성의 몸을 그리고 싶어서 체모를 그대로 뒀다. 또 뱃살도 있고, 근육질도 있는 다양한 여성의 몸을 살리려고 했다.”(유진)

“얘들아, 루머 유포와 성폭력은 나쁜 짓이란다”

여성의 성장을 위한 설정에서 아쉬운 점은 있다. ‘장화홍련전’에서 남편한테 도망쳐 강 앞에 막다르자, 자녀들과 강물로 뛰어드는 모습은 부모들의 동반 살인을 떠올리게 한다. 또 선녀가 옥반지를 낀 주먹으로 나무꾼을 때린다는 설정은 한편으론 폭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 이야기가 페미니즘이 이렇게 돼야 한다는 모범이나 전형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우리 책도 한 가지 고착화된 사고나 편견을 생산할 수 있으니 우리가 새롭게 바꾼 걸 토대로 독자들이 더 다양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 책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지 guoz952016@gmail.com으로 연락 달라.”(애린)

아이들이 특히 읽었으면 하는, 다시쓰기한 전래동화는 무엇일까. “‘서동과 선화공주’ ‘처용’ ‘선녀와 나무꾼’을 읽게 하고 싶다. 나쁜 소문을 내고, 성폭력을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건 잘못된 일임을 알려주고 싶다.”(경민) “성별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된다는 걸 얘기해줄 수 있는 우렁총각.”(애린)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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