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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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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소비’ 오래된 책방은 알고 있다

일본 서점 기행 ② 오랜 역사의 책방이 그리는 내일의 책방
등록 2019-06-20 10:18 수정 2020-05-03 04:29
(위부터)시부야 쓰타야의 6층과 7층에 있는 ‘셸프67’. 2018년 12월 문을 연 분키쓰 롯폰기. 1500엔을 내면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정재혁, 셸프67 제공

(위부터)시부야 쓰타야의 6층과 7층에 있는 ‘셸프67’. 2018년 12월 문을 연 분키쓰 롯폰기. 1500엔을 내면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정재혁, 셸프67 제공

2015년 10월, 도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거리 시부야에 책방 겸 카페 ‘셸프67’(shelf67)이 문을 열었다. 67은 6층과 7층을 뜻하는데 셸프67은 건물 2층 높이의 거대한 책장 구조로 돼 있다. 마치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에 나오는 7과 1/2층처럼, 셸프67은 새로운 유형의 책방으로 화제가 됐다. 세련된 카페처럼 보이는 공간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2018년 12월 도쿄 롯폰기에 유료 서점 ‘분키쓰’가 생겼다. 입장료 1500엔(약 1만6천원)을 내야 한다는 이유로 관심을 끌었다. 입장료를 내면 음료를 맘껏 마시며 종일 있을 수 있다.

서점 자리에 들어선 서점, 서점 사이에 들어선 공간

책을 사는 공간이 아닌, 책과 함께 시간을 즐기는 공간이란 말이 지금 도쿄의 책방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셸프67을 만든 것은 CD·DVD 대여점에서 서점 체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쓰타야’다. 셸프67은 음식점 ‘푼라쿠’를 제외하면 8층 건물의 모든 층을 쓰는 ‘시부야 쓰타야’의 6층과 7층에 있다. 분키쓰가 문 연 곳은 38년 역사를 지닌 서점 ‘아오야마 북센터’ 롯폰기 지점이 지난해 여름 문 닫은 바로 그 자리다.

분키쓰의 부점장 하야시 이즈미는 “파친코나 게임센터가 생긴다면 좀 서운할 것 같았어요”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분키쓰는 아오야마 북센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끌어당긴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커다란 삼각형 벽장은 아오야마 북센터의 계단이 있던 자리다. 독특한 패션잡지와 생소한 사진가의 책을 메인 책장에 진열했던 아오야마 북센터의 특징을 이어받아, 분키쓰는 ‘호기심을 열어주는 입구’란 취지를 담아 잡지 진열대로 꾸몄다.

계단 하나 사이로 책방과 카페가 이어지는 셸프67 역시 오래된 어제에서 시작된 공간이다. 시부야 쓰타야의 6층은 10년 전부터 잡지 코너와 ‘와이어드 카페’가 나란히 있었다. 쓰타야에서 홍보 담당자인 다다 다이스케는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으로 만든 이 공간을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다른 층이 아닌, 계단으로 이동하는 같은 층”이라고 말했다.

출판업계 불황, 종이매체 시장 축소, 연이은 서점 폐점…. 지금 일본 책방은 대부분 이런 어두운 말들로 설명된다. 일본 전역에서 2018년 현재 서점이 1만2026곳 있는데, 1990년 후반(2만2천여 곳)보다 1만 곳 이상 줄어든 것이다. 시장 규모 역시 1조엔 이상 줄었다(1996년 2조6천억엔, 2018년 1조3천억엔, ‘서점조사회사 아루미디어’). 하지만 통계의 이면을 뒤집어보면 분키쓰나 셸프67처럼 서점이 없어진 자리에 새로운 책방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8월 문 닫은 이케부쿠로 ‘리브로서점’ 자리에 들어선 것은 ‘산세이도’다. 산세이도는 140여 년 역사가 있는 서점으로 ‘기노쿠니야’ ‘마루젠’과 함께 일본의 대표 노포 서점이다. 침체 혹은 몰락이 아닌 ‘소란스러운 재편’. 지금 도쿄의 책방을 설명하는 건 무엇도 규정하지 않는 ‘진행 중’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에는 대표 서점들이 변화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대형 서점은 책을 찾기 힘들다. 이젠 그냥 불편한 가게가 되어버렸다. ‘화석’ 같은 장사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대표 주자가 ‘준쿠도’다.” 2017년 5월 서점 경영인들이 모인 ‘니케이 비케이 특약회’에서 이 말을 한 구도 야스타카는, 비판의 화살이 향한 준쿠도의 창업자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서점과 스마트폰이 대중화하고 다양한 온라인 출판 서비스가 늘어나는 가운데 대형 서점에 위기가 닥쳤다. 유통회사가 큰 서점을 집어삼켰다. 마루젠과 준쿠도는 각각 2008년과 2009년 재정 악화로 유통회사 ‘대일본인쇄’의 자회사가 되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서점 ‘북퍼스트’는 2013년 또 하나의 거대 유통회사 ‘토한’에 자회사로 흡수됐다.

‘아마존’이 하지 못하는 것

흡수합병이라는 충격을 겪은 대형 서점들은 준쿠도 창업자의 말처럼 ‘불편한 가게’를 벗어나기 위해 쇄신의 노력을 다했다. 크게 두 가지 혁신이 보인다. 하나는 책을 깊게 파는 것, 즉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다. 둘째는 다른 영역으로 확장, 공동작업과 협업이다. 2018년 롯폰기 지점이 문 닫아 단일 책방이 된 본점 ‘아오야마 북센터’는 패션·디자인의 성지라는 지역의 특성상 관련 서적에 충실하다. 마루젠 본점 이케부쿠로는 역에 인접한 서점 산세이도를 의식하며 책장을 구성해, 지금 ‘컴퓨터, 정보기술(IT) 서적의 성지’로 일컫는다. “역 근처에 있는 산세이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삽니다. 저희는 거기서 팔지 않는 책을 두루 갖춰놓으면 고객이 찾아줄 거라 생각했습니다.”(웹진 의 컴퓨터 서적 담당 오사다 에리코 인터뷰)

‘깊게, 넓게’의 혁신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일본 3대 대형 서점 중 하나인 마루젠의 본점 마루노우치는 문을 열었을 때부터 ‘뮤지엄’(박물관)이 콘셉트였다. 그곳은 비즈니스 서적이 1층을 장식한다. 이키 나오야 점장이 말했다. “마루노우치는 도쿄에서 가장 비즈니스적 이용이 많은 곳입니다. 회사원 등 목적이 있는 고객이 많이오기 때문에 책을 찾기 쉽도록 진열에 신경 씁니다.” 마루노우치의 모든 층에는 만년필을 비롯한 문구류가 진열됐다. 심지어 타자기도 판다.

아오야마 북센터가 생소한 사진·미술 관련 책들로 진열대를 채우고 “검색으로 찾을 수 없는 책과 아이디어”라고 쓰인 간판을 입구에 세운 것처럼, 혁신은 ‘오프라인’에서만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이다. 준쿠도 창업자가 강조한 것도 온라인서점 ‘아마존’이 하지 못하는 것, 종이책을 파는 오래된 서점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책을 단지 판다는 점에서 아마존도 이미 늙어가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실제 점포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사람들이 찾아오는 책방인만큼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무너질 겁니다.” 그는 서점에 있는 도서검색기와 스마트폰을 연계해, 게임 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농담하기도 했다.

아모야마 북센터의 건축 코너. ‘검색으로 찾을 수 없는 책과 아이디어’를 강조한다.  아모야마 북센터 제공

아모야마 북센터의 건축 코너. ‘검색으로 찾을 수 없는 책과 아이디어’를 강조한다. 아모야마 북센터 제공

전통차, 오퍼레이터, 120만 권의 책…

이렇게 오프라인을 강조하자 오래된 서점의 강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서점은 오프라인 시대를 잘 알고 있다. 기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에 2015년 카페 ‘기노차야’가 문을 열었다. 카페와 융합한 여타 책방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곳에서 파는 건 커피류가 아닌 녹차, 현미차, 일본차 등이다. 뉴트로(과거의 문화를 즐기는 것)로 돌아가는 시기는 50년 전이 아니라 100년 전, 150년 전이다. 건물 구조상 엘리베이터가 4층까지밖에 서지 않아 기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엔 여전히 직원이 엘리베이터 탑승을 돕는다. 의학 전문서가 진열된 5층에는 카트(손수레)도 있다. 무거운 책을 들고 계산대까지 가야 하는 손님들을 배려한 것이다. 기노쿠니야 총무부장 사토 유스케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직원을 두는 것은 비용이 들지만, 손님의 안전을 위해 경비는 고려할 대상이 아닙니다.”

기노쿠니야는 지하 1층부터 7층까지 모두 120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 서점 경기를 생각하면 어이없는 숫자다. “120만 권 중 1년에 한 권도 팔리지 않는 책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읽히는 책만 진열하면 안 됩니다. 10년에 한 번 읽힌다 해도 책을 모으고 공개하고 지키는 게 책방의 역할입니다.” 기노쿠니야 사장 다카이 마사시는 출판업계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던 2015년 월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간 발간 속도에 밀리고 중개 유통의 개입에 휘말리며 획일적인 책장이 반복되는 지금, 도쿄 책방은 책을 소개하고 제안하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분키쓰는 입장료를 내면 독서를 위한 주변의 환경을 제공한다. 아오야마 북센터의 마쓰바 겐이치는 사람들과 함께 서점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신간을 메인에 진열하기는 하지만, 전국에서 팔린다는 걸 기준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 지역 책방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제안할 수 있을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걸음 앞서, 손님들과 함께 걸으며 제안하고 책장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마케팅 시장에서 얘기되는 ‘물건 소비에서 경험 소비로의 전환’을 일본에선 같은 듯 다른 단어, ‘모노(もの)에서 고토(こと)로의 전환’이라 한다. ‘책 소비’를 온라인에 맡기자 ‘경험 소비’라는 영역이 오프라인으로 온전히 넘어왔다. 책은 애초부터 ‘고토’의 것이 아니던가. 도쿄 책방에는 오롯이 책과 마주하는 시간이 있다. 책을 문화로 간직하고 책과의 시간을 이어가려는 집념이 여전히 존재한다. 거기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건 시대의 아이러니인지, 책이 품은 고유한 시간의 발현인지 모르겠다.

책은 애초부터 ‘경험 소비’ 아니던가

“책의 좋은 점은 시간에 ‘어긋남’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노스탤지어(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는 아니지만, 지금이기에 보이는 책의 좋은 점을 책방이 끌어내고, 책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 책방이 존재하는 의의이자 책방이 남기고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아오야마 북센터 본점 마쓰바 겐이치가 필자에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가장 오래된 내일의 책방을 만났다.

도쿄(일본)=정재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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