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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배우들

뻔한 것을 깨부수고 지루한 세계를 찢고

한국의 대표 이름이자 대표 얼굴이 된 송강호

제1265호
등록 : 2019-06-06 11:56 수정 : 2019-06-0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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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송강호. CJ ENM 제공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저의 동반자인 우리 송강호 배우님의 멘트를 꼭 저는 이 자리에서 듣고 싶습니다.”

영화 <기생충>으로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수상 소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함께 무대에 오른 배우 송강호를 마이크 앞으로 소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봉준호 감독은 총 7편의 장편 중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설국열차(2013) 그리고 <기생충>까지 무려 4편을 송강호와 함께했다. <마더>(2009)는 젊은 남성(원빈), <옥자>(2017)는 어린 소녀(안서현)가 주인공이었으니, 가능한 모든 작품을 함께한 셈이다. 쑥스러워하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온 송강호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배우로서 인내심과 슬기로움과 그리고 열정을 가르쳐주신,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배우분들에게 이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바로 옆에 선 봉준호 감독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기생충>을 함께한 동료 배우들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대한민국 모든 배우분들”이라는 그 범위가 흥미로웠다.

한국 영화의 오늘, 12개 열쇳말 중 하나

지금 이 순간, 송강호는 “대한민국 모든 배우분들”의 대표 이름이자 대표 얼굴이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 기관지 <영화천국>이 영화인 100명에게 물어서 모은 ‘한국 영화의 오늘’에 대한 12개 열쇳말 중 배우로서는 유일하게 송강호 이름이 올라갔다. 송강호의 영화 <괴물>(2006), <변호인>(2013), <택시운전사>(2017)가 모두 천만 이상 관객을 동원했고, 2016년 <밀정> 개봉과 함께 그는 누적 관객 1억 명을 돌파한 배우가 되었다.

<밀양>(여우주연상 전도연·2007), <박쥐>(심사위원상·2009) 그리고 <기생충>(황금종려상)까지, 칸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한국 영화들의 뒤 혹은 중심에는 언제나 송강호가 있었다. 이렇듯 산업적 가치와 예술적 성취, 사회적 영향력까지 동시에 거머쥔 유일한 배우로서 한국 영화계에 송강호가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과 부담도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송강호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시나리오, 그와 함께 영화 찍는 순간을 꿈꾸는 새로운 감독들과 동료 배우들, 그리고 송강호를 목표로 놓고 따라가는 후배들도 수없이 많아졌다.

“기분 좋은 부담이고 책임감이죠. 하지만 커다란 결과적인 성과물보다는 배우로서의 작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생각을 보여줄 때, 후배들이 선배한테 좋은 걸 얻는다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가 어떤 영화를 해서 관객을 천만 명을 넘기고 어디 가서 상을 받고, 이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고요. 저 배우가 어떤 영화를 선택해가고 있나, 연기로서 어떤 표현을 하나, 새로운 방향, 새로운 길들, 새로운 시선들을 보여줄 때 오히려 후배들은 많은 걸 배우고 느끼지 않을까요.”(2013년 <변호인> 개봉 때 필자와 한 인터뷰)


긴 시간 지켜본바, 이 예민한 예술가는 매우 개인적인 사람이다. 봉준호·박찬욱·이창동·김지운 등의 감독들과 내밀하게 소통하는 배우지만, 그들은 ‘사나이의 의리’ 같은 뜨거운 피로 뭉쳐진 관계가 아니다. 동료 배우들이 북적이는 영화 현장을 누구보다 즐기지만, 후배 배우들을 모아놓고 연기론을 늘어놓는 보스 타입의 선배도 아니다. 오히려 ‘연기는 각자 하는 거지, 내가 뭘 가르쳐줘?’라고 반문할 사람이다.

연극무대를 거쳐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할 때도 한국 영화를 이끌고 나가는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는 야심과 포부는 없었다. 말하자면 송강호는 남다른 예술에 늘 목말라 있는 배우지만, 천성적으로 리더가 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예술가적 욕망이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가 그에게 한국 영화를 이끌어갈 대표자로 공공의 책임을 안겨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 칸영화제에서 말한 수상 소감처럼, 그는 어느덧 “대한민국 모든 배우분들”을 향한 자기의 소명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듯하다.

송강호가 연기했던 대부분의 캐릭터 역시 타고난 영웅적 면모와 의협심 때문에 세상 앞으로 나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효자동 이발사>(2004)의 성한모, <관상>(2013)의 내경, <변호인>의 송 변호사, <택시운전사>의 만섭도, 그들에게 닥쳐온 드라마틱한 시련이 없었다면 그저 검소한 이발사로, 유명한 관상쟁이로, 돈 잘 버는 세무 변호사로, 성실한 택시운전사로 만족했을 것이다.

(왼쪽부터) <변호인>(2013), <택시운전사>(2017), <마약왕>(2018). 각 영화사 제공

시련 앞에서 변하는 장삼이사들

<밀정>의 이정출은 한때 일제 앞잡이로 살았던 캐릭터다. <괴물>의 강두는 한강 매점에서 오징어 다리나 훔쳐 먹던 소시민이다. 그가 연기한 ‘왕’들, <사도>의 영조, ‘마약왕’이란 별명을 얻은 남자도 하고 싶어 왕이 된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삶이 그들을 계속 더 높은 곳으로 밀어올리거나, 더 낮은 곳으로 끌어내렸다. 송강호가 연기한 인물들은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찾아온 싸움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고, 사회의 부름을 끝내 외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한강의 괴물에 맞서 불타는 무기를 들고, 인권을 지키기 위해 차가운 거리로 나서고, 피투성이 광주를 향해 자동차 운전대를 돌린다.

배우 송강호는 연기란 “늘 파괴하고 찢어지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만약 관객이 기대하는 상상의 세계가 있다면, 배우는 흔히 그 상상의 세계 안에서 제일 잘하려고 노력해요. 그렇지만 정작 관객은 그 세계를 뚫고 나가서 다른 세계를 보여주길 원하죠. 물론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배우가 잘 구현했을 때 관객들은 좋아하겠지만 대신 놀라움은 없겠죠. 아마 저는 그 놀라움을 주기 위해, 상상 이상의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던 것 같아요.”(2016년 <밀정> 개봉 때 필자와 한 인터뷰)

5월30일 개봉한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아버지 김기택은 백수다.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비롯해 다양한 일에 손댔지만 다 말아먹고, 이제는 집에서 피자 박스 접기로 소일하는 신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기우(최우식)와 딸 기정(박소담)의 철저한 “계획” 아래 부잣집 운전기사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처음엔 그냥 일이 생긴 것이 기쁘고, 가난의 냄새가 침범하지 않는 집에서 좋은 차를 모는 일에 만족한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서 나는 씻을 수 없는 냄새를 처음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반지하 방에서 곰팡이 핀 식빵이나 뜯으며 지나치게 평화롭게 누워 있던 이 아버지는 생애 처음으로 눈뜨고 제대로 일어선다. 봉준호 손을 잡고 그 세계를 찢고 파괴한다. 다시 한번, 놀랍다.

피할 수 없는 배우 송강호의 운명

2019년의 송강호는 한국 영화계가 자신에게 안겨준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을 어깨 위에 무겁게 얹고 있다.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예술가로서 발걸음을 변함없이 가볍게 가져가야 한다. 뻔한 것을 파괴하고 지루한 세계를 찢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고되고 어렵지만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배우 송강호의, 운명이다.

이 배우의 비트

<살인의 추억> 박두만의 ‘무당눈깔’

물증 없는 심증의 연기

1986년, 시골 마을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살인 사건이 이어진다. 지역 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스스로를 범인 잡는 “무당눈깔”이라 칭하며 타고난 직감과 본능에 따라 수사를 진행한다. 반면 서울에서 내려온 엘리트 형사 서태윤(김상경)은 “서류는 거짓말 안 한다”는 신념 아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수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각자의 수사 방법에 아랑곳없이 살인은 계속 이어지고 살인범은 잡히지 않는다.

어느 날 밤, 시골 형사와 서울 형사는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에 나타난 수상한 남자의 뒤를 쫓는다. 좁은 골목길을 뛰고 달려간 끝에 다다른 곳은 채석장이다. 쫓기던 남자는 검은 작업복을 입은 수많은 인부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다. 누가 누군지 구분 불가의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순간, 두만의 시선에 한 남자(류태호)의 뒷모습이 포착된다. 쭈그려 앉을 때 바지 위로 보이는 빨간 여성용 팬티의 끝자락도.

이 순간 두만은 그 남자 주위의 인부들을 모아 세운다. 영문 몰라 쳐다보는 인부들의 얼굴은 모두 범인처럼 보인다. 그때 두만이 빨간 팬티 남자의 목덜미를 확 잡으며 말한다. “내 눈을 똑바로 보실까, 응?” 한참 그의 눈을 응시하던 두만은 무심한 고갯짓으로 동료 형사(김뢰하)에게 이 남자를 검거할 것을 알린다. 그리고 드러나는 빨간 팬티. 서태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박두만은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천연덕스러운 곁눈질로 쳐다본다. ‘봤냐 이 자식아,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눈빛을 보내며.

이미 확실한 물증(팬티)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마치 본능으로 범인을 잡은 것처럼 펼치는 두만의 퍼포먼스. 이 1분40초의 비트는 배우 송강호의 연기 방식을 관통하고 있기도 하다. 송강호는 매우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배우다. 하지만 그 과정을 절대 들키지 않는 그의 연기는 관객에게 마치 직관과 본능의 결과물처럼 인식된다. 물증을 찾아볼 수 없는 심증의 연기. 그래서 관객은 “내 눈을 똑바로 보실까”라는 주문에 홀린 채 송강호 연기를 놀란 서태윤의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una_labo)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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