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잔나비라는 밴드를 알게 된 건 2016년이다. 그해 여름 나온 정규 1집 《몽키 호텔》을 접하면서다. 처음 밴드 이름을 들었을 땐 잔나비처럼 잔망스럽고 경쾌 발랄한 음악을 떠올렸다. 하지만 타이틀곡 은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했다. 한마디로 이건, 아련하고 쓸쓸하고 아름다운 ‘8090 가요’였다. 복고풍 가요 발라드를 하는 록밴드라니. 현란한 전자음을 버무리는 최첨단 밴드가 넘쳐나는 인디신에서 잔나비는 별종처럼 보였다.
최첨단 밴드 속 별종“잔나비 들어봤어?” 주변에 열심히 알리고 다녔다. 하지만 센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은 인디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잔나비는 쉽게 떠오르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 인디 음악을 잘 안 듣는 소녀 팬들이 공연장에 몰려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인디 음악보다 유재하, 이문세 노래를 즐겨 듣는 내 친구도 를 좋아했다. 그의 플레이 리스트에는 와 사이에 가 비집고 들어갔다.
당시 나는 대중음악 담당 기자가 아니었다. 한겨레 자회사인 씨네플레이에 파견돼 영화 관련 모바일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다. 음악과 관련해선 ‘온스테이지’ 기획위원을 맡고 있었다. 네이버문화재단이 숨은 비주류 음악을 널리 알리려고 라이브 영상을 찍어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기획위원들이 매달 회의를 열어 어떤 음악을 소개할지 논의하는데, 잔나비를 적극 추천했다. 그리고 통과됐다.
완성된 라이브 영상을 봤다. 잔나비는 한적한 폐주유소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울 수도 있는 폐주유소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어울릴 법한 전구와 갓전등, 네온사인 등으로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흐르는 노래는 1집 인트로 격인 (Goodnight)에서 시작해 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접속곡. 이보다 더 환상적일 수 없었다. 영상을 보고 잔나비 소개글 도입부를 이렇게 썼다.
“밤하늘에서 드론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인적이 끊긴 지 꽤 되어 보이는 주유소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다섯 남자.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가운데 남자가 노래하는 순간, 그곳의 차디찬 밤공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꿈결 같은 허밍이 흐른 뒤 본격적으로 울려퍼지는 노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는 폐주유소에서, 우리를 위해서 불러주는 이 노래. 이 하나만으로도 잔나비라는 이름을 기억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폭발적 영상 조회수, 음원 차트 10위…영상은 초겨울인 11월24일 공개됐다. 음반이 나온 지 석 달 만이다. 반응은 뜨거웠다. 온스테이지 페이지에는 200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다른 편에 비해 서너 배 많은 양이다. 베스트 댓글은 이랬다. “빈티지한 멜로디 위에 귀에 쏙쏙 박히는 주옥같은 가사들! 그리고 톡톡 튀는 음색을 가진 정훈짱님의 목소리까지 얹어져서 진짜 백번 천번 만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 같아요.”
유튜브에 올린 영상 조회수도 지속적으로 늘어 2019년 5월 현재 230만 건을 넘었다. 방탄소년단에 비하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인디밴드로선 폭발적인 수치다. 댓글은 1천여 개. 잔나비가 최근 대세로 떠오르면서 지금도 꾸준히 댓글이 달린다. 5월7일 달린 댓글은 이렇다. “오늘 잔나비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네요. (왜 이제야 알았을까….)”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 유튜브에서 ‘[온스테이지] 314. 잔나비–Goodnight+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검색해 꼭 보시라고 추천한다.
1부가 길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2부다. 나는 한동안 잔나비를 잊고 있었다. 간간이 드라마 OST(주제곡이나 배경음악)나 이문세 새 음반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곡()으로 만날 때면 ‘꾸준히 열심히 하고 있구나’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잔나비가 지난 3월 발표한 정규 2집 《전설》의 타이틀곡 가 주요 음원 차트 10위권에 든 것이다. 벅스에선 1위까지 올랐다. 인디밴드로선 꿈같은 일이다.
언론들이 앞다퉈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침 잔나비 리더 최정훈이 MBC 예능 프로그램 에 출연한다는 예고도 떴다. 이제 더는 예전의 잔나비가 아니게 될 거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더 바빠지기 전에 인터뷰를 청했다. 이미 온갖 스케줄로 빡빡했다. 어렵사리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잔나비 멤버들을 만났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인사하니 그들도 나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온스테이지 글 잘 써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 영상을 사람들이 많이 보면서 우리 노래를 널리 알릴 수 있었어요.” “제가 특별히 한 건 없지만, 이렇게 잘돼서 저도 기분이 참 좋네요.”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었다. 잔나비가 떴을 때 정말 내 일처럼 기뻤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니 순수하고 건실한 청년들이란 생각이 더 굳건해졌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스쿨밴드 활동을 함께했던 1992년생 원숭이띠 친구들. 최정훈은 한때 아이돌형 밴드에 특화된 기획사 FNC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이었다. 곡을 만들려고 옛 친구들과 만나 작업하다 스쿨밴드 시절이 그리워 소속사를 나왔다. 그리고 친구들과 잔나비를 결성한 게 2012년이다. 2014년 데뷔한 이들은 첫 공연에 관객 한 명 들지 않았던 무명 밴드에서 이젠 전국 투어 공연표를 매진시키는 인기 밴드로 성장했다.
“차트 순위는 없던 일로 생각하자 했어요”샴페인 축포를 터뜨리며 어깨에 힘줄 법도 하건만, 이들은 여전히 차분하고 진지했다. “차트 순위는 없던 일처럼 생각하자 했어요. 목표했던 게 아니니까.” 그럼 목표는 뭘까? “더 좋은 음악 만드는 거요. 더 많은 분이 좋아해주시면 우리가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죠. 아직 목표는 못 이뤘다고 생각해요. 우린 이미 다음 음반을 구상하고 있어요. 더 멋진 음악으로요.” 잔나비의 전설은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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