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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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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게 재미나게 나이 든 가시나들

할매들이 시를 만나면 벌어지는 일…

영화 <시인 할매> <칠곡 가시나들>
등록 2019-02-23 05:13 수정 2020-05-02 19:29
단유필름 제공

단유필름 제공

2월18일 오후 전남 곡성군 탑동마을에 있는 ‘길 작은 도서관’.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담벼락에 시와 꽃, 나무 등 그림이 있다. 도서관에는 김선자(49) 관장과 김점순(80) 할머니, 윤금순(82) 할머니, 안기임(85) 할머니가 있었다. 이들은 한글을 배우고 시를 쓰게 된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 (2월5일 개봉)의 주인공이다. 취재진을 맞은 김 할머니가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곡성이 뭐시가 좋다고 서울에서 왔당께. 하하하.”

‘시 할매’들의 딴 세상
자신이 쓴 시 앞에 서 있는 김점순 할머니

자신이 쓴 시 앞에 서 있는 김점순 할머니

이곳 도서관은 할머니들의 사랑방이자 한글 배움터이다. 김 관장이 말했다. “할머니들이 도서관 일을 도와준다고 오셨는데 책을 거꾸로 꽂는 걸 봤어요. 그때 할머니들이 한글을 모른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2009년 평생 까막눈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을 위한 한글 교실을 열었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은 어릴 적 가난해서, 아니면 남동생 공부 시키느라 자신은 학교 문턱에 가보지 못했어요. 연필을 처음 잡아본 분들도 있었고요. 손가락 힘이 없어 선을 그을 때 손을 부들부들 떠셨어요”라고 이야기했다.

‘가갸거겨’를 배우고 자신의 이름을 쓰게 된 할머니들은 상점 간판이 무슨 글자인지 알게 되고, 도서관에 있는 책도 읽었다. 김 할머니는 “처음 눈을 뜬 것처럼 딴 세상을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시로도 썼다. 배고픈 어린 시절(“젖 떨어진 동생에게 준/ 흰밥이/ 어찌 맛나 보여 먹고 잡던지” -박점례 ‘가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꽃이 피건만/ 한 번 가신 부모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네” -양양금 ‘해당화’), 고된 시집살이(“시아버지 시어머니 어려와서/ 사뿐사뿐 걸어오네” -김점순 ‘눈’) 등 할머니들의 삶이 시였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이 쓴 시를 모아 시집 (2016), 그림책 (2017)로 펴냈다.

두 권의 책을 내고 영화의 주인공이 된 할머니들은 ‘시 할매’로 유명하다. 안 할머니는 복지관에 가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시 할매’로 불러주면 기분이 좋다고 한다. “늙어서 남길 것이 있어야지. 그래야지.” 자신이 쓴 시 ‘어쩌다 세상에 와서’(어메는 나를 낳고 “또 딸이네.”/ 윗목에 밀어두고 울었다)가 에 첫 시로 들어가 있다고 귀띔했다.

김 할머니는 “시가 뭐인 줄도 모르고 썼는데 이걸로 영화까지 찍을 줄 상상도 못했”단다. “장에 가면 ‘시 할매’ ‘시 할매’ 그러는디. 다 늙어갖고 참말로 추잡스럽지. 이럴 줄 알았으면 (시를) 열심히 쓸걸 그랬지.”

혼자 사는 윤 할머니는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시를 썼다. 몇 해 전 교통사고로 큰아들을 잃고 이어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다. 한동안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시를) 내 생각나는 대로 썼지. 받침도 틀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시 ‘눈’에 녹였다. “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할머니는 지난 설 명절 때 손주들이 “할머니 시 쓰라고 연필 한 다스, 떼끼(지우개)”를 선물했다고 자랑했다.

인생이 시다
자신이 쓴 시 앞에 서 있는 안기임 할머니

자신이 쓴 시 앞에 서 있는 안기임 할머니

김 관장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인생 시집”이라고 했다. 할머니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고 가난과 차별로 배우지 못한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들에게 ‘그 힘든 시절 어떻게 보내셨어요’ 물으면 ‘벌로(그냥) 살았지’ 그러세요. 농사짓고 자식 키우고 그렇게 하루 가고 세월이 갔다고요. 살았으니 살아지더라고 하세요. 인생을 살아가는 단단한 내공이 느껴져요.”

김 관장은 할머니들이 시를 쓰며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것 같다고 한다. “가슴에 한을 담아두면 병이 되잖아요. 그걸 시로 표현하니 마음의 짐이 조금씩 털어지는 것 같아요. 전보다 많이 밝아지셨어요. 그리고 다른 분들의 시를 들으면 그분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알게 돼요. 그때마다 잘 살았다고 다독이세요.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시간이 돼요.”

영화 를 만든 이종은 감독은 “2016년 할머니들이 낸 시집을 읽고 감동받았어요. 이 시를 쓴 분들을 만나고 싶어 곡성에 내려왔어요”라고 말했다. 이 감독은 2017년부터 마을회관에서 지내며 할머니들의 일상과 마을의 사계절을 담았다. “돌이켜보니 힐링의 시간이었어요. 어르신들이 정이 많아요. 아침에 제가 있는 곳 문 앞에 고구마 한 소쿠리, 감자 한 바가지 놓고 가세요. 고생한다며 챙겨주시니 행복했어요.”

이 감독은 할머니의 시에는 모두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단다. “할머니에게 혼자 밥 먹는 장면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다들 한사코 거부했어요. 자식들이 보면 가슴 아파할까봐 찍지 말라고 하셨어요.”

다양한 감정을 품은 시
자신이 쓴 시 앞에 서 있는 윤금순 할머니

자신이 쓴 시 앞에 서 있는 윤금순 할머니

인터뷰를 마치고 할머니들은 담벼락에 있는 자신이 쓴 시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탑동마을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 할머니들의 시 ‘겨울’ ‘열 살 때’ ‘가난’ ‘한숨만 나와’…. 인생 고비를 넘기며 절절히 느낀 그리움, 안타까움, 기쁨, 슬픔 등 생의 다양한 감정들이 묻어난다.

“큰 집에서 혼자 지내면/ 서글픈 게 친구고/ 외로움이 친구다/ 새끼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서운해 눈물 나고/ 잠 안 오는 밤이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널을 뛴다// 팔십이 넘으니까/ 새끼들에게 짐이 될까/ 병원 생활도 싫고/ 요양병원도 싫고/ 건강하게 살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가고 싶은디”(윤금순 ‘소원’)

곡성=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다큐멘터리영화 의 김재환 감독


인생 팔십부터


단유필름 제공

단유필름 제공

“이 영화는 의 칠곡 할머니 버전이에요.”
김재환 감독은 경북 칠곡에 사는 시 쓰는 할머니들(사진)을 그린 다큐멘터리영화 (2월27일 개봉)을 이렇게 소개했다. 은 평균 나이 86살인 할머니 7명을 주인공으로 한글을 배우며 일상에서 새 즐거움을 얻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김 감독은 2016년 팟캐스트에서 칠곡의 할머니가 시를 읽어주는 걸 듣고 이 영화를 기획했다. “시 읽는 할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좋았어요. 지하철에서 들었는데 주변 소음이 들리지 않고 그 목소리에 빠져들었어요. 성우들이 주지 못하는 깊은 울림이 있었어요.” 2016년 3월 칠곡 할머니들을 처음 만나고 영화 제작에 꼬박 3년이 걸렸다.
김 감독은 영화를 밝고 경쾌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두려운 일이 아니에요. ‘재밌게 나이 듦’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노년층에도 현재의 욕망이 있고 설렘이 있거든요.”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든’ 할머니들의 모습과 흥겨운 음악을 결합했다. 영화의 대표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인 ‘바버렛츠’의 에 맞춰 할머니들이 골목길을 돌며 춤추는 장면을 보여준다. 노래자랑대회에 나간 곽두조 할머니를 응원하기 위해 한껏 멋 부린 친구들이 칠곡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에선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를 넣었다.
김 감독이 만난 할머니들은 배움으로 삶이 즐거워졌다고 했다. “할머니들이 글을 알게 되면서 가게 간판을 보고 운동기구 설명서를 읽어요. 무언가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느껴요. 멀리 있는 자식에게 처음으로 편지도 쓰고요. 그 편지를 부치려고 읍내 우체국에 처음 가보기도 하고요.”
김 감독은 자식을 향한 할머니들의 그리움도 담아냈다. “명절 때 자식들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네요. 방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을 서성이셨어요. 그 모습이 짠했어요. 다른 할머니들은 남은 제사 음식과 술을 마을회관에 가져와 드셨어요. 항상 유쾌하게 술을 마시던 분들이 그날만은 무척 슬퍼 보였어요. 촬영하면서 그런 슬픈 모습은 처음 봤어요.”
김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효도 기획’이었다고도 했다. “어머니가 친구들과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게 이 영화예요. 어머니가 개봉일만 기다려요. 아마 개봉하는 날 조조로 영화를 보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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