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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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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사망 30년 뒤에도 기억되는 노래 부른 소비에트 마지막 영웅

빅토르 최의 19살 여름을 그린 흑백영화 <레토>
등록 2018-12-22 05:48 수정 2020-05-02 19:29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 <레토>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 <레토>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러시아 록의 영웅 빅토르 최를 들어봤는가? 아마도 들어봤을 것이다. 그럼 빅토르 최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아마도 깊게는 모를 것이다. 나도 그랬다. 새해 1월3일 개봉하는 영화 가 반가운 건 그래서다. 지난 5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 영화는 빅토르 최를 다뤘다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끌었다.

6만여 관객 스타디움 공연 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21일 옛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인 2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인이다. 그는 고려인 3세다. 그림과 조각에 관심 있어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하는 한편, 기타와 록음악에 빠져 록밴드 활동을 했다. 성적 미달로 퇴학 처분을 받은 뒤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했다.

그러면서도 록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81년 ‘가린과 쌍곡선’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가 이듬해 밴드 ‘키노’를 탄생시켰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서서히 이름을 알려나갔다. 서정적이면서도 시대정신을 담은 노랫말과 러시아 특유의 정서를 품은 선율은 서구의 록과는 차별화된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소련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그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며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상징이 됐다. 1990년 7월, 모스크바 올림픽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6만여 관객은 빅토르 최의 노래에 울고 웃으며 열광했다. 그의 음악인생 최고의 무대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15일, 라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그는 승용차를 운전하다가 버스와 충돌해 숨졌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빅토르 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열렬한 소녀 팬 5명이 뒤따라 자살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벽에 “오늘 최가 죽었다”는 글이 검은색으로 쓰였고, 그 아래 “최는 살아 있다!”라는 글이 덧붙여지면서 이른바 ‘빅토르 최 벽’이 만들어졌다. 일각에선 개혁에 반대하던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가 그를 죽였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사망 뒤 3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추모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의 노래 제목처럼 소비에트의 ‘마지막 영웅’이 되었다.

빅토르 최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당시 아프가니스탄전을 벌이던 소련을 겨냥한 곡이기도 하다. 노랫말은 이렇다. “치러야 할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헐값의 승리는 바라지도 않는다/ 전우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하늘 높이 솟은 별은 나를 전장으로 불러낸다/ 내 소매 위에는 혈액형/ 내 소매 위에는 나의 군번/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이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이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YB(윤도현밴드)는 1999년 이 노래를 번안해 발표했다. 윤도현이 바꾼 우리말 가사는 이렇다. “나의 팔에 새겨 있는/ 나의 혈액형 나의 군번아/ 싸움에서 나의 영혼을 지켜다오/ 여기 싸늘한 이 땅에서/ 나의 피를 묻으리/ 행운을 빌어다오/ 나의 행운을 빌어다오/ 빅토르의 노래가 들린다/ 싸늘한 그의 무덤 앞에/ 더 많은 빅토르가 모여/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지금도 그의 노래가/ 끝나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빅토르 최가 30년 전 불렀던 노래는 지구촌 어디선가 전쟁이 끊이지 않는 2018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빅토르의 재능을 알아본 마이크의 비극

지금껏 풀어놓은 내용은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는 이런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영화가 다루는 건 1981년 여름, 그 짧은 기간이다. ‘레토’라는 제목부터가 러시아어로 ‘여름’이라는 뜻이다. 당시 빅토르 최는 이제 막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살 풋풋한 청년이었다. 영화는 딱 그 단면을 잘라 아련하고 쓸쓸한 흑백 영상으로 펼쳐놓는다.

이야기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밴드 주파크를 이끄는 록스타 마이크, 그의 아내 나타샤, 그리고 음악가 지망생 빅토르 최가 그들이다. 마이크와 나타샤, 음악 동료들이 한여름 바닷가에서 놀고 있을 때 누군가의 초청으로 빅토르 최가 합류한다. 그 자리에서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들은 마이크는 한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 마이크는 빅토르 최의 멘토를 자처하며 그를 정식 록클럽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빅토르 최에게 매력을 느낀 나타샤는 그에게 다가가고, 빅토르 최 또한 나타샤에게 끌린다. 마이크는 나타샤로부터 얘기를 듣고 둘의 관계를 용인해주면서도 홀로 괴로워한다. 요약하자면, 예술과 사랑과 시기로 얽힌 세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빅토르 최가 아니라 마이크라고 생각한다. 그는 서구 록음악을 끊임없이 동경하면서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활동해나간다. 정식 록클럽에서 허가된 공연만 하고, 관객은 경직된 자세로 앉아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른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빅토르 최는 정해진 틀이 없는 예술가다. 아무렇게나 막 쏟아내는 것 같은데, 가사와 선율은 누구보다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마이크는 빅토르 최를 지원해주면서도 묘한 질투를 느끼는 듯하다. 아내 나타샤까지 빅토르 최를 원하니 그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그의 처지가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을 때 흐르는 루 리드의 노래 는 역설이다. 내게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마이크 나우멘코라는 인물이 궁금해서 알아봤으나 정보가 많지 않았다. 1955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으며, 전설적인 록밴드 아크바리움을 거쳐 1981년 밴드 주파크를 결성했다는 정도가 기본 정보다. 빅토르 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당대 최고 밴드 아크바리움의 공연에 빅토르 최의 밴드가 출연하도록 추천하기도 했다. 결국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도 빅토르 최의 후원자가 됐다. 빅토르 최가 숨진 이듬해인 1991년 마이크도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체포된 감독 그리고 음모…

빅토르 최에 대한 자료는 꽤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를 계기로 나는 빅토르 최를 좀더 알게 됐다. 를 연출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영화 촬영 도중 공금횡령 혐의로 경찰에 긴급체포돼 가택구금을 당했다. 이를 두고 빅토르 최에 관한 영화 제작을 방해하려는 공작이라는 의혹도 일었다. 지금의 러시아라면 여전히 쉽지 않겠지만, 나는 언젠가 빅토르 최의 본격적인 활동을 다룬 영화를 보고 싶다. 2018년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음악영화 보다 더 큰 감동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서정민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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