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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의 건설자는 무명의 석공

등록 2002-03-07 00:00 수정 2020-05-03 04:22

거시사가 놓쳐온 개인들의 일상적 삶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미시사의 도전

옛 동독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자신의 희곡에 등장한 ‘박식한 노동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묻는다. “누가 일곱 문을 가진 도시 테베를 건설하였는가?” 역사학은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이 물음에 서로 다르게 대답해왔다.

가장 오래고 대중적인 응답은 특출한 영웅을 그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테베의 창설자 카드무스를 비롯한 여러 왕들이야말로 일곱 문의 도시를 만들어낸 역사의 주체이다. 한국 노래방의 한 인기곡은 이런 견해에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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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신라장군 이사부 백결선생 떡방아/ 삼천궁녀 의자왕/ 황산벌에 계백 맞서 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이 노래 은 제목 그대로 한국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위인들의 이야기를 가사로 담고 있다. 모두 5절의 가사는 절마다 어김없이 ‘역사는 흐른다’란 후렴구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역사는 곧 위인 또는 영웅들의 역사다. 이 위인과 영웅들은 주로 정치적 위인이며 영웅들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아날학파에 반기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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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왕조의 형성과 교체라는 정치사적 변천을 주도한 ‘훌륭한 인물’들의 ‘바통 터치’가 곧 역사라고 보는 관점이 ‘영웅사관’이다. 이에 따르면, 위인 또는 영웅이야말로 시대정신의 체현자로서 역사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노래방만이 아니라 서점가에서도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19세기 영국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의 은 이러한 영웅사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나 등 정치적 영웅들의 부침으로 역사의 변천을 파악한 책들은 인기있는 역사책 목록의 윗자리를 차지해왔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적어도 학계의 실제 역사연구에선 이러한 영웅 위주의 사관은, 여전한 그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더이상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 이보다는 역사의 흐름 배후에 놓여 있는 구조와 인간 집단 전체의 활동에 집중하는 견해들이 현대의 역사연구에서 더 큰 설득력과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20세기 역사학 최대의 업적으로 불리는 ‘사회사’는 이러한 관점에 기반해 있다. 사회사는 역사를 단순한 정치체제의 변동으로 보는 인습적인 정치사적 관점을 벗어나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크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회사의 조류를 만들고 이끈 두축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날학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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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은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내세우며 피지배 계급의 활동을 주요한 역사연구의 대상으로 편입시켰고, 사회경제적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프랑스혁명 당시 하층민 출신 혁명가들인 상퀼로트의 활약을 재평가한 알베르 소불의 연구나 근대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에 주목한 E.P. 톰슨의 연구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노동자, 농민, 여성 등 이른바 소외받는 다수 대중을 역사서술의 중심부로 끌어들였다.

아날학파는 폴 비달 드 라 블라슈나 에밀 뒤르켕과 같은 프랑스 출신 지리학자와 사회학자의 영향을 역사연구에 받아들였다. 1929년 마르크 블로흐와 뤼시엥 페브르가 창간한 (‘아날’(Annales)은 연보라는 뜻)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 학파는 사회를 하나의 전체적 유기체로 이해하려고 했다. 이들은 ‘장기 지속’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 방점을 뒀으며, 이를 위해 중세 이후 근대까지 거의 변화가 일지 않았던 농민들의 일상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 아날 2세대의 대표자인 페르낭 브로델은 등 그의 대표작을 통해 근대세계의 기본구조를 그 물질적 토대의 차원에서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아날학파의 계급과 구조만으로는 결코 ‘박식한 노동자’의 물음에 또렷한 대답을 들려줄 수 없다는 반성이 제기됐다. 물론 사회사는 그의 물음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응답을 확보하고 있다. 이 견해에 선 이들은 테베의 건설자는 다름 아닌 민중이라고 대답하거나, 당시 그리스의 사회경제적 발전상태가 테베라는 도시가 건설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었다고 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 영웅사관의 신화를 벗어난 사회사의 새로운 문제설정으로도 역사학에 제기된 더 새로운 문제의식을 다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였고, 문화의 문제였다.

1970년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뒤 영국과 미국 등으로 번져간 미시사의 등장은 이러한 문제를 역사연구의 전면에 부각시키는 주요한 계기였다. 같은 시기 프랑스 아날학파 제3세대 역사가들도 문화와 정신의 문제로 역사연구의 축을 이동시켰다. 독일에서 활발했던 일상사 중심의 연구도 이러한 새로운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시사 또는 신문화사적 접근으로 불리는 이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기존의 사회사가 제대로 된 밑으로부터의 역사 포착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대중 또는 민중은 결국 역사학의 연구대상을 계급이라는 집단적 주체로 환원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아날학파의 구조는 개인의 생생한 삶의 결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시사가들은 미시사에 대해 “거시적 사회사로부터 지배층을 본위로 삼지 않는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지배층에 관한 이전의 연구에서 개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본받은 것”이라고 규정내리곤 한다(백승종 서강대 교수). ‘지배층 영웅이 아닌 일반 개인들의 일상적 삶을 문화적 차원에서 들여다보기’라는, 기존 두 역사관의 종합이야말로 미시사 또는 신문화사의 관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의 입맛에도 들어맞아

미시사는 20세기 사회사에 대한 반발로 출발했지만, 어느덧 21세기 역사학의 주된 흐름으로 급격히 떠오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 등 거대담론의 붕괴와 역사의 구조와 법칙성에 대한 회의의 확산은 그 배경을 이룬다. 대중적 관심도 미시사의 융성을 받쳐주는 힘이다. 미시사는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개인과 일상의 모습을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묘사해낸다. 부족한 자료를 보강하기 위해선 역사적·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한 지식에 문학적 감동까지 더하는 미시사의 책읽기는 최근 독자들의 입맛에도 잘 들어맞는다. 등 최근 서너달 사이 국내에서 출간된 역사서의 대부분을 미시사 관련 서적들이 석권한 현상은 이런 대중성의 덕이 컸다.

물론 거시사의 반격 또한 거세다. 틸리 같은 거시사가는 “미시사는 사소한 문제에만 집중하며 개인의 총합을 사회라고 인식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며 “역사란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사회구조와 그 변동을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시사가 놓쳐온 부분에 주목하는 한 미시사의 존재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이탈리아 출신의 대표적 미시사가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그의 출세작 에서 ‘박식한 노동자’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그 어느 사료도 (테베를 건설한) 무명의 석공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의미있는 것이다.” 구조 속에서 물화될 수밖에 없었던 무명의 석공들에 그 이름과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 역사학의 과제라는 지적이다.


<center> 서점을 장악한 미시사</center>
지난 세기말 시작된 한국의 미시사 출간 열기는 새 세기 들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1996년 미국 로버트 단턴 교수(프린스턴대)의 (문학과지성사) 출간은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미시사의 연구성과가 소개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책은 1730년대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학대받던 인쇄공들이 고양이들을 모두 때려죽인 흥미로운 소동을 되살려놓는다. 이를 통해 고양이만도 못한 대우를 감내해야 했던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일상과 분노를 생생하게 복원시켰다. 2000년 3월에 나온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지식의 풍경)은 16세기 프랑스의 가짜 남편 귀환사건을 역사학의 대상으로 포착해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의 사건을 재해석한 미시사 연구의 전범으로 꼽힌다. 최근 나온 (문학과지성사)는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가 종교재판을 거쳐 이단으로 화형당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의 일상을 통해 당시 민중들 사이에 면면히 전승돼온 민중문화와 기독교 중심 제도문화의 갈등을 살핀다. 는 19세기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옮겨진 기린 자파라의 행적을 통해 당시 서구인을 사로잡고 있던 진보와 계몽, 식민주의의 시대정신을 파헤치고 있다.
한국인이 쓴 책으론 2000년 서강대 백승종 교수가 학생들의 수업과제를 모아 펴낸 (궁리)가 있다. 학생들이 직접 쓴 자기 개인의 역사나 개인적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을 정리한 글들을 모았다. 지난해 말 나온 (강명관, 푸른역사)도 미시사적 접근으로 평가된다. 혜원의 그림이라는 문자 아닌 텍스트의 꼼꼼한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의 일상 풍속을 풍성하게 되살려낸다.
미시사에 대한 이론적 소개서로는 (푸른역사, 2000년)와 (궁리, 2001년) 등이 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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