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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을 가진 이복형제의 이야기

이주란 소설 <모두 다른 아버지>
등록 2018-08-30 15:10 수정 2020-05-02 19:29

이주란의 소설집 에서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동명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제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다던 어떤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한때 그 언니와 많은 술을 마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설 속 나에겐 아버지가 있다.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나에게도 한때 아버지가 있었다. 1년에 한두 번 아버지는 고작 며칠을 머무르다 떠났다. 그날들을 모두 더해봤자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다던 언니’와 알고 지낸 한때보다 턱없이 모자란 시간일 터였다. 그럼에도 그날들을 한때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적어도 그 시절에는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두 집 살림을 했다. 비밀인데 모두가 알았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희박하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수십 년 전이다. 내가 아는 아버지라는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종합에 불과하다.

불행이 조금이나마 평범해질까

어머니에 따르면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전교회장을 도맡았고 성적은 단연코 1등이었다.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1순위로 찾는 사람이었으며, 18살에 이장이 된 사람이었다. 매사 자신감이 넘치고 통이 커서, 일을 도모할 때마다 망설임이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 역시 그리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

“난 그 새끼 안 봐.” 언니에게 아버지는 ‘그 새끼’다. 언니는 경기도 김포에서 돈 많기로 유명한 오빠를 만난다. 오빠는 돈도 많고 나이도 많아서, 내 맘에 썩 들지 않는다. 할 말은 많지만 입을 꾹 다무는 게, 나라는 사람의 스타일이다. 반박하고 충고하고 싶지만 다 오지랖 같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좀 평범한 사람 같아질까. 이 불행이 조금이나마 평범해질까.

5년 전, 아버지는 무연고자로 발견돼 요양원에 입원했다. 각기 다른 어머니를 둔 세 집의 자식들이 한적한 요양원에 모였다. 자식 5명 중 셋의 이름이 똑같았다. 같은 이름을 가진 자식이 집집마다 있었다. 왜 수연인지 알 수 없으니, 왜 같은 이름을 지어줬는지도 알 길 없다. 여하튼 모인 자식들의 대부분은 조수연이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수연끼리는 제법 닮았다.

둘째 아들 수연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어머니에게 빌붙어 살던 비겁하고 비굴한 빈대.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체조선수이자 막내아들인 수연의 평은 달랐다. 동네에서 평판 좋고 착한데다 전반적으로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사람. 심지어 그에겐 아버지가 둘인데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더 좋다고까지 했다.

“슬퍼도 울지 말고 웃겨도 웃지 말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하다가 가도록 하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다짐했다. 그들의 말에 어떤 동조도 반박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아버지와는 아주 다른 아버지였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종종 팼다. 김대중보다 김영삼이 잘생겼다고 해서 맞았고, 양말을 세탁기 안에 넣으라고 했다가 맞았다. 10살도 안 된 어린 자식을 하잘것없는 이유로 팼다. 우리 가족을 다 팼다.

왜 아버지는 우리 가족만 팼을까. 왜 아버지는 혼자가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을 찾지 않았을까. 내심 아버지가 처음 결혼한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안도했는데. 다른 자식들 앞에서 그게 유일한 우월감이었는데.

대화가 길어질수록 자명한 사실은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가장 먼저 잊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일 때, 가장 최악이었다. 일관되게 나쁜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요양원까지 가서 나는 끝끝내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돌아왔다. 나와 언니는 아버지와 혈연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아마 권리보단 의무가 뒤따르는 관계였을 텐데,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자매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는 삶을 포기했다.

나는 당신을 책으로 위로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있던 한때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쁜 아버지를 기다리던 한때부터 아버지가 없다 여기며 사는 지금까지, 피할 수 없던 불우와 태연함을 가장한 분노는 그대로다. 아버지 역시 아직 살아 있다. 없는 채로, 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소설 속 나는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내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래 봬도 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겼던 적이 나라고 없었을까. 하지만 종종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가장 먼저 잊힌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또는 내가 남들보다 중요하지 않은 존재 같을 때, 그저 보통의 존재를 바라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당신을 책으로 위로할 것이다. 책은 모든 사람의 삶을 장려한다. 당신을 당신 자신에게 잘 보이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주란 작가는 책의 말미에 이런 말을 썼다. 네가 좀더 오래 살았으면 해. 나는 그 말이야말로 모든 책이 전하는 진심이라 믿는다.

황현진 소설가*‘황현진의 사람을 읽다’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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