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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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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3대 명절 ‘경록절’

1세대 인디밴드 ‘크라잉넛’ 한경록의 생일파티

2005년 시작해 인디음악인들의 자생적 축제로 진화
등록 2018-03-10 16:50 수정 2020-05-02 19:28
경록절엔 다양한 음악인들이 무대에 올라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서정민

경록절엔 다양한 음악인들이 무대에 올라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서정민

‘홍익대 앞 3대 명절’이란 말이 있다. 설날과 추석은 끼지도 못한다. 1년 중 서울 홍대 앞 일대가 가장 시끄러워지는 날은 크리스마스이브, 핼러윈데이, 그리고 경록절이다. 앞의 두 날은 그렇다 치고, 경록절은 뭐야? 고개를 갸웃할 이가 적지 않을 텐데, 사실 ‘홍대 앞 3대 명절’이란 우스갯소리는 바로 이 경록절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경록절의 주인공은 한경록, 크라잉넛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다.

2월9일, 모두가 를 불렀다

크라잉넛이 누구인가. 1990년대 중·후반 로 홍대 앞은 물론 전국을 들쑤신 펑크록 밴드다. 크라잉넛 덕분에 홍대 앞 인디신 열풍이 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인디 1세대 밴드’ ‘대한민국 인디 시조새’ 같은 수식어도 곧잘 붙는다. 크라잉넛은 음악뿐 아니라 넓은 인맥으로도 유명하다. 그들과 무대에 같이 서고 뒤풀이에서 술 한잔 나눠 마시지 않으면 홍대 앞 밴드라 할 수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경록절은 한경록의 생일잔치에서 비롯됐다. 한경록은 2005년 제대하고 홍대 앞으로 돌아왔다. 그가 밴드 멤버들과 함께 2년여 군악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홍대 앞에는 더 많은 밴드가 모여들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인디밴드 후배들이 엄청 많아졌더라고요. 반갑기도 하고 인사도 할 겸 해서 생일에 내가 쏠 테니 와서 맘껏 먹어라 했죠.” 처음에는 작은 라이브클럽과 치킨집에서 파티를 했다. 점차 더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치킨집으론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3년 전부터 제법 큰 공연장인 무브홀로 옮겼다.

2월9일 경록절 파티가 열리는 무브홀에 갔다. 한경록이 개인적으로 초대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초대장 따위는 확인하지 않는다. 파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길을 지나다 ‘여기 지금 뭐하는 거야?’ 호기심에 불쑥 들어가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반겨준 곳은 술을 주는 부스였다. 무브홀로 옮기면서 술을 협찬해주겠다는 업체들이 나타났다. 올해는 준비된 맥주만 해도 65만cc. 위스키는 물론 고량주 후원까지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자기네 술을 따라주며 홍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쪽에는 피자니 치킨이니 음식이 잔뜩 마련돼 있었다.

록스타가 주인공인 파티에 음악이 빠지면 이상할 터. 당연히 공연이 펼쳐지는데, 재밌는 건 대부분 즉흥으로 펼쳐지는 무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출연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파티에 참가한 밴드들이 무대에 올라가고 싶다는 뜻을 전하면 파티 호스트인 한경록이 순서를 정해주는 식이다. 이날 첫 무대는 칵스가 열었다. 록페스티벌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는 밴드가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다음으로 나온 밴드는 크라잉넛. 공연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멤버들이 케이크를 꺼내와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파티의 손님이기도 한 관객들이 큰 소리로 함께 노래 불렀다. 이날을 위해 턱시도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경록은 입이 귀에 걸린 채 촛불을 껐다. 이어진 노래는 영원한 청춘의 송가 . 관객은 두 손을 치켜들고 펄쩍펄쩍 뛰며 노랫말처럼 말달렸다.

핫한 인디밴드 총출동

이어 요즘 홍대 앞에서 가장 뜨겁다는 신인 밴드 호랑이아들들, 한경록의 솔로 프로젝트인 캡틴락 밴드가 잇따라 올라왔다. 캡틴락 밴드의 기타리스트는 ‘차차’라는 별명의 차승우. 1990년대 중·후반 크라잉넛과 함께 홍대 앞 펑크신을 이끌었던 밴드 노브레인의 초대 기타리스트다. 지금까지도 노브레인을 잘 이끌고 있는 보컬리스트 이성우는 객석에서 웃으며 오랜 친구들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지본, 오리엔탈쇼커스의 공연 이후 인기 디제이 타이거디스코가 올라왔다. 커다란 트렁크에 싸온 자신의 디제이 장비를 펼쳐놓은 뒤 특유의 복고 노래들을 틀며 디제잉을 시작했다. 송골매의 , 송대관의 같은 노래가 그의 손을 거쳐 훌륭한 파티 음악으로 변모했다. 엘피(LP) 판과 디제이 장비를 열심히 만지던 타이거디스코는 중간중간 고량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밴드 더더가 공연한 뒤, 즉흥으로 이뤄진 밴드가 올라 연주를 시작했다. 남궁연이 드럼 스틱을 잡았고, 와이낫의 황현우가 베이스 기타를 잡았다. 이들은 함께 밴드를 한 적이 없는데도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즉흥연주를 했다. 이전 경록절 때도 각기 다른 밴드에 속한 멤버들이 올라와 함께 즉흥연주를 하곤 했다. 음악계 대선배가 함께한 적도 있다. 언젠가는 ‘작은 거인’ 김수철이 올라와 기타를 잡았고 김창완, 강산에 등도 멋진 무대를 보여줬다. 한번은 최백호가 무대에 올라 모든 관객이 를 떼창한 적도 있었다. 경록절이 아니면 보기 힘든 광경이다.

신인 밴드 모브닝의 영국 밴드 퀸 커버(편곡) 연주에 이어, 최근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경록의 절친 ‘유발이’ 강유현의 솔로 무대가 이어졌다. 피아노를 치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대표곡 를 불렀다. 거친 밴드 음악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핀 장미꽃처럼 톡 쏘는 매력을 풍겼다.

이날의 마지막 순서는 경록절의 단골 게스트인 타틀즈. 비틀스를 좋아하는 홍대 앞 음악인들이 모여 결성한 비틀스 ‘트리뷰트 밴드’(유명 팝 밴드의 모습과 음악을 본뜬 연주를 하는 밴드)다. 당연히 비틀스 노래만 불렀고, 당연히 모두가 열광하며 따라 불렀다. 대미를 장식한 곡은 . 모두들 파티의 끝을 아쉬워하는 듯 “나나나 나나나나~” 후렴구를 끝낼 줄을 몰랐다. 타틀즈에서 ‘전레논’으로 불리는 와이낫의 전상규는 무대에서 내려온 뒤 “너무 취해서 를 노래할 때는 나도 모르게 를 불렀다”고 고백했다. 뭐면 어떤가. 취해서 틀리든 말든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노는 날, 그게 바로 경록절이다.

이날 홍대 앞에 간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웬만해선 홍대 앞에 잘 가지 않는다. 홍대 앞이 예전 홍대 앞 같지 않아서다. 언젠가부터 홍대 앞을 상징하던 라이브클럽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춤추는 클럽, 술집, 카페가 늘어갔다. 오래된 작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대형 프랜차이즈 음식점이며 옷가게가 들어섰다.

한경록이 없어도 ‘경록절’은 영원하라

여전히 홍대 앞을 홍대 앞답게 만드는 경록절이 있음에 감사한다. 몇십 년 뒤에도, 한경록이 없어도 경록절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경록절은 단순히 개인의 생일잔치가 아니라 인디음악을, 홍대 앞 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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