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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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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공연의 장인

세월이 흐를수록 절창이 되는 노래 솜씨와

창작욕 가득 담긴 무대로 감동 안기는 이문세
등록 2018-01-12 11:24 수정 2020-05-03 04:28
가수 이문세는 지난해 12월 열린 ‘2017 시어터(Theatre) 이문세’에서 콘서트와 뮤지컬의 경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무대를 선보였다. 케이문에프엔디 제공

가수 이문세는 지난해 12월 열린 ‘2017 시어터(Theatre) 이문세’에서 콘서트와 뮤지컬의 경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무대를 선보였다. 케이문에프엔디 제공

1980년대 중·후반,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나는 팝음악에 경도돼 있었다. 초등학생 때 같은 음악 순위 프로그램을 즐겨 보던 난 이선희의 《J에게》, 구창모의 《희나리》 같은 노래를 꽤 좋아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마이클 잭슨, 프린스, 조지 마이클이 속한 왬, 아하 같은 팝에 빠진 뒤로는 가요를 멀리했다. 심지어 가요를 경시하기까지 했다. 가요는 왠지 팝보다 좀 떨어지는 음악처럼 여긴 것이다.

에 반하다

그랬던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버린 음반이 있었으니, 바로 1987년 나온 이문세 4집이었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을 듣고 반한 나는 처음으로 내 돈 주고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찬찬히 들어보니 모든 곡이 좋았다. 고은희와 듀엣으로 부른 를 비롯해 등 들을수록 더 깊게 빠져드는 노래로 빼곡했다. 나는 이문세의 팬이 됐다. 1년 뒤 나온 이문세 5집도 산 건 물론이다. 등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문세는 1983년 이 실린 포크 성향의 1집으로 데뷔했다. 이후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주도한 2집을 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건 1985년 3집을 발표하면서다. 같은 노래들은 감정 과잉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이 노래들을 만든 이는 이영훈이다. 작곡가 이영훈의 세련된 송라이팅과 이문세의 무심한 듯 마음 깊은 곳에 가닿는 창법이 시너지를 내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을 명반을 줄줄이 탄생시켰다.

이문세와 이영훈의 협업은 1991년 이 담긴 7집까지 이어지다 멈췄다. 이문세는 8집을 다른 작곡가들과 작업했으나 예전 같은 반응은 얻지 못했다. 9집에서 다시 이영훈을 만났지만 이 또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이후 여러 작곡가들과 함께하며 등 히트곡을 내오던 이문세는 2001년 13집에서 또다시 이영훈과 만났고, 14집은 다른 작곡가들과 작업했다. 이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둘은 2008년 이영훈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는 함께 작업할 수 없게 되었다. 이문세가 2015년 15집을 내기까지 14집 이후 13년이나 걸린 데는 이영훈의 빈자리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이문세는 최근까지 꾸준히 히트곡을 냈지만, 나는 이문세와 이영훈의 협업이 절정을 이뤘던 3~5집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이후의 히트곡들은 그 시절 노래만 못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수준의 노래를 새롭게 발표해줄 날이 또 올까 하는 기대감을 늘 품어왔지만, 언젠가부터 그마저도 희미해졌다. 이문세라는 가수는 점차 추억의 한구석에 자리잡아가는 느낌이었다.

‘추억’이었던 이문세의 재발견

그런 내게 큰 충격을 준 일이 벌어졌다. 2010년 12월 대중음악 담당 기자로서 찾은 이문세의 공연장에서 예상치 못하게 엄청난 감동을 받은 것이다. 공중에 솟은 이동무대 위의 이문세와 관객이 를 듀엣으로 부르는 대목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날 무대에서 이문세의 수많은 히트곡들은 다양한 스타일로 변주됐다. 때론 스윙감 넘치는 빅밴드로, 때론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때론 애잔한 통기타 한 대만으로 노래를 더욱 빛나게 했다. 15인조 빅밴드, 40인조 관현악단, 30명의 백댄서와 현대무용수, 40여 명의 코러스 합창단과 한 몸처럼 움직인 이문세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1만 석 규모의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공연을 3회 전석 매진시킨 이문세는 이듬해 봄, 이화여대 안 600석 규모 소극장에서 장기 공연을 했다. 큰 무대와는 다른 아기자기한 연출과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무대는 이전 공연과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줬다. 2년 뒤인 2013년 6월, 그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공연에 도전했다. 런던브리지를 닮은 초대형 무대에서 그는 5만여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했다. ‘공연의 장인’을 보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12월23일, 이문세의 공연을 오랜만에 또 봤다. 현대무용가 김설진의 안무로 꾸린 무대는 한 편의 뮤지컬 같았다. 이문세의 공연은 볼 때마다 새롭고 재밌다. 그는 공연 중 상영한 셀카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연(투어)을 하나 마치고 나서 다음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땐 마음을 비웁니다. 그래야 새로운 걸 또 채울 수 있거든요.” 자신을 비우기 위해 그가 여행을 떠난 곳은 아프리카 케냐였다. “거기서 쏟아질 듯한 별밤을 보며 기타가 있었다면 이 노래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나더니, 갑자기 무대에 등장해 통기타를 치며 과 을 불렀다. 절창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노래 솜씨는 꺾이기는커녕 끝 모르게 치솟기만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문세는 공연으로 창작을 하고 있구나. 새로운 노래를 위해 쏟아붓던 창작욕을 이제 무대로 승화하고 있구나. 공연 하나하나가 날마다 새로운 창작이구나. 한국 대중음악계에 이만큼 위대한 공연의 장인이 있음에 새삼 감사했다.

이틀 뒤인 12월25일, 윤종신의 공연을 봤다. 그는 지난 한 해를 강타했던 를 비롯해 많은 히트곡을 들려줬지만, 내 마음을 크게 울린 것은 히트하지 않은 노래 이었다. 2015년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영화 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곡으로, 윤종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됐다고 했다. 노랫말은 이렇다.

“그대가 좋아했으면/ 나를 바라봐줬으면/ 잔뜩 멋부린 내 모습을/ 좋아해준 그대들/ 다 어디 갔나요/ 나 여기 있는데/…/ 나 이게 전부예요/ 내가 제일 잘하는 그거/ 시간이 흘러서 이제야 그럴듯한데/ 덜 익은 그때가 좋대/ 나 이제 저 멀리 보아요/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기에/ 오래도록 괴롭혔던 그 고통에/ 뭐든 참을 수 있다오/ 날지만 높은 건 아냐/ 어디든 뭐든 좋을 뿐/ 결국 난 사랑받고 싶어/ 내려앉을 거예요/ 그땐 쇠잔한 날개를/ 쓰다듬어줘요 그대”

고통과 고민이 따를지라도…

윤종신은 다달이 신곡을 발표하는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를 2010년부터 9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는 로 발표한 이 노래를 두고 “창작하면서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고 했다.

고통과 고민이 따를지라도 우리를 위해 무대로든 노래로든 늘 새로운 창작을 하는 이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감사한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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