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소설가 조세희) 자라지 못하는 ‘난쟁이들’의 땅, 혁명을 겪지 못한 땅에는 ‘점진적 사회공학’이 사회 저변에 스며들었다. 사회공학에 떠밀려 사회주의는 우그러들었다. 이때 말하는 사회주의는 이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장 천한 인간의 동기인 시샘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인민전선 내각을 이끈 레옹 블룸(1872∼1950)이 말한 사회주의다.
청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에게도 그랬을까. 청년은 마흔일곱 나이에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10월혁명의 영웅’이 된 레닌(1870∼1924)이다. (교양인 펴냄)은 러시아 근현대사 연구로 이름난 로버트 서비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의 2000년작이다. 2001년 한국어 번역본이 처음 나왔고, 이번에 역자와 출판사를 달리해 새로 출간됐다.
책은 4부(‘부르주아 반란자’ ‘볼셰비키 이론가’ ‘10월혁명 지도자’ ‘혁명 수호자’)로 나눠 레닌의 삶을 추적한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보리스 옐친이 중앙당 문서고 접근을 허용하면서 공개된 ‘레닌 문서’들에 철저히 바탕을 두었다. 지은이는 레닌을 두고 신격화와 악마화 모두를 거부한다. ‘인간 레닌’을 복원한다는 게 이 책의 척추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표상되는 공적 활동에 가려진 레닌의 사적 삶을 촘촘히 들여다본다는 점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레닌을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화’했다. 러시아혁명을 이해하는 길잡이 자리에 이 책이 놓이는 이유다.
각주를 뺀 본문만 해도 700쪽을 훌쩍 넘는 책에서 지은이는 레닌을 이렇게 단언한다. “레닌은 인간 시한폭탄이었다. 레닌의 지적 위력은 그 자신을 혁명으로 몰고 갔고, 그의 마음속 분노는 이 돌진을 광적으로 만들었다. 레닌은 파괴 열정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사랑보다 더 많이 품은 사람이었다.” 나아가 지은이의 평가는 더 엄정하고 냉정하게 끝맺는다. “미래는 레닌주의 공산주의에 있지 않다. 그러나 미래가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 레닌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최소한 그의 비범한 삶과 활동은 모든 사람들이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런 결과를 성취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이 사실에 감사하자.”
가족이 레닌에게 끼친 영향이 크고 깊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레닌은 건강 염려증이 심해서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에 의지할 수 없었더라면 아마도 폭발했을 것이다.” 레닌은 평생 레닌주의자로 살다 죽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범상치 않은 독특한 발전 시기”에 놓인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개혁과 개악, 타협과 협잡, 집념과 집착, 최선과 독선, 권력과 폭력… 이들 사이에 놓인 협수로를 좌초하지 않고 돌파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 타산지석이 있다.
전진식 교열팀장 seek16@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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