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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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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찍으러 갔음, 주인 백”

등록 2002-02-06 00:00 수정 2020-05-03 04:22

밤마다 시나리오를 다듬고 낮이면 영화제작사를 찾아다니는 김병곤의 ‘뷰티풀 게임’

세 종류의 영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영화를 만드는 데 뛰어드는 사람들,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돈을 써가며 보러 가는 관객들. 그 두 번째에 속하는 김병곤(36)씨와 세 번째에 속하는 나는 통짜 유리로 바깥이 통째 보이는 커피숍에서 만났다.

감동적인 축구 할아버지 이야기

조감독(박흥식 감독의 조감독이다)이신데, 지금 찍고 있는 영화는 어떤 것입니까? “아직 없어요. 그냥 준비중이라서….” 그럼 그 감독님은 어떤 영화를 찍으신 분인가요? “그분도 아직 작품을 하신 것은 없습니다.” 음, 얼른 다음 질문을 고르는 내게 김병곤씨가 덧붙인다. “그전에 이정국 감독님과 이란 영화를 찍었는데요. 아직까지는 그 작품 하나죠.”

?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본 적이 없다고 돌려서 말했다. 겸연쩍은 표정의 그에게 영화란 게 언제 대박이 터질지 정말 알 수 없는 일 아니냐고 정성껏 위로했다. 그런데 어떻게 생활고를 해결하시나요? 음, 이번에는 그가 말문이 막혔다.“아, 저도 뭘 먹고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오히려 스탭들이 더 “용하다”고 말한다. 관객 몇백만, 제작비 몇백억,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하지만 영화판 일꾼들은 기껏 연봉(!) 100만∼200만원. 그 기회도 일년에 한두번 올까 말까 한다. 어떻게 사는지 신기할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자기는 간간이 ‘코디’일을 한다고 했다.

“지난번에는 영국 <bbc> 산하의 프로덕션 팀이 월드컵 취재를 위해 왔었는데 그걸 코디해줬지요. 근데 일주일간 일했는데 성과는 별로였어요.” 축구협회 회장인 정몽준씨와의 인터뷰가 부친상 때문에 취소되면서 줄줄이 펑크가 났다는 말이었다. 여러 군데 뚫어보았지만 신통한 건수를 못 건진 그 팀은 상당히 실망할 수밖에. 그는 자신의 낡은 자동차를 끌고 상암동 경기장을 한눈에 잡을 수 있게 난지도 제일 높은 데로 안내하는 걸로 그들을 위로해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일을 하면서 굉장한 건수를 올린 이는 오히려 김병곤씨였다. 한국축구 역사를 거슬러가는 취재를 도와주면서 기막힌 영화 소재를 하나 거머쥔 것이다.
“우리 축구역사가 길잖아요. 해방 직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간 분인 홍덕용 옹을 만날 수 있었는데 와, 그분 얘기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분은 해방 직후 남북간 왕래가 자유롭던 시절 서울에 학교를 다니러 와 있다가 별안간 삼팔선이 막히는 바람에 북으로 갈 수가 없었다. 북에 계신 어머니께 연락을 못해 애가 탄 아들은 축구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단다. 올해 일흔아홉이신 홍 할아버지는 이 옛일들을 또록이 기억해내면서 결국 울음을 보이고 말았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들은 이름이 라디오에 나왔대요. 수문장 누구누구…. 그리고 결국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내려오셨대요.” 김병곤씨는 이미 스크린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요크셔 깡촌에서의 영화수련

“1948년 런던에서 열렸던 월드컵에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출전했대요. 축구팀이 일본까지 배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미군 군용기로 싱가포르로 간 다음, 다시 스위스항공으로 갈아타고 영국으로 갔대요. 당시에 얼마나 돈이 없었던지 선수들 숙박비가 없어 런던대학 기숙사 복도에서 잤답니다.” 자랑스런 태극마크 클로즈업. 카메라가 서서히 멀어지면서 장면 페이드아웃. 컷. “그 가운데에도 사랑이 있었겠지요. 전 그런 얘기를 그려내고 싶어요. 사실 시나리오가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가제로 .”
물론 대본도 그가 직접 썼다. 우리 영화계에서는 감독으로 입봉하려면 자기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그럼 영화를 찍겠다는 말? 감독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가 씩 웃는다. “제작사를 찾으면 바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왜 내 눈이 반짝이는가? 그가 내게 제의를 해올지도 모른다. “영화 출연하실 의향이 있으신지?”라고. 행상 II라도 기꺼이 맡으리라 다짐하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할리우드식 멜로를 특히 좋아한다는 그는 사실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 졸업하고 무역회사도 다녔다. 그러다가 스물아홉살에 불쑥 영국으로 영화를 공부하러 갔다. 물론 집에 계신 부모님께는 경영학석사 MBA를 따오겠다고 호언장담하고서.
청운의 꿈을 안고 갔지만 누가 무역에서 영화를 바로 연결시킬 수 있으랴. “학교 면접 때마다 영화나 연극에 대한 전력이 없는 것을 지적하면서 선생님들이 난감해하시더라고요. 예비합격자 명단에는 올려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일단 사진부터 공부하기로 했다. 단단히 작심하고 런던을 떠나 요크셔의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아츠 인터내셔널 영화학교’. 경험의 유무에 상관없이 40주 풀코스로 영화와 연극을 공부시켜주는 학교였다. 요크셔는 ‘폭풍의 언덕’으로 유명한 영국의 전원지역. “반경 4km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지요. 가장 가까운 펍이라야 뛰어서 반 시간. 그리고 스파르타식 기숙학교였어요. 아침 8시 반부터 시작하는 일과를 종일 치르고 과제물을 마치고 자려면 새벽 두시 전에는 잘 수가 없었어요. 고된 시간표에다가 돌격 앞으로… 라는 분위기, 휴, 고민이 많았지요. 웬만큼 성질 좋은 사람들도 배겨나기 힘들었지요. 교장은 싫으면 당장 관두라는 식이고. 자율적인 교육으로 자란 영국 아이들은 1∼2주 만에 줄행랑치죠.”
영화공부 사이사이 연극공부를 해야 했다. 셰익스피어 대사를 외우느라 진땀도 많이 뺐다. 사이사이 TV물도 만들고 인터뷰도 따오고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강도가 주유소 습격하는 영화 만들다가 경찰서 잡혀가기도 했어요. 하여튼 그곳에서의 수업은 모든 것을 다 해본다는 것이었어요.” 하루 24시간 1년을 함께 지냈으니 학우들도 모두 평생친구가 되었다. 지금 스페인에서 잘 나가는 프로듀서가 된 마누엘. 영국 <bbc>에서 일하는 다리오. “외국인들하고도 이런 우정이 쌓이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쳐들어가면 입국부터 출국까지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피차간에 그렇지요. 세명이 학교수업에 불평도 제일 많이 했는데 졸업 때는 우등상까지 먹었어요.” 요크셔 깡촌에서의 영화수련은 지금까지도 그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바닥을 벌써 쳤어요”

이렇게 시작한 요크셔 학교와 서섹스 대학을 거쳐 4년 만에 셰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영화연출, 부전공 촬영. 졸업할 무렵 바르샤바로 가서 폴란드의 유명감독 크쥐시토프 자누쉬에게서 일을 배웠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영화진흥에 일조를 하려고 허기진 배를 안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요즘 우리 영화들이 비평가들한테서 좋은 영화라는 지목을 받기를 꺼린다는데,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영화가 예술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전 다른 의견이 있지만, 그렇다고 영화에서 상업성이라는 게 투신사들이 돈을 부어넣고 이득을 보려는 그런 식과는 다른 이야기죠.” 그는 요즘 스토리가 없어도 흥행이 되는 영화에 대해서는 같은 영화인으로 낯이 뜨겁다. “그런데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작품들이 몇몇 나오니까 그게 발전한다는 좋은 징조인 것 같아요.”
그는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영화는 가르치는 게 아니다, 나의 영화는 나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임을 명심 또 명심했단다.
요즘엔 밤마다 시나리오를 다듬고 낮이면 영화제작사를 찾아다닌다. “이제 제 자신이 기로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조감독보다 감독 준비생으로 나서서 가부를 결정짓는 게 현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옛날 같으면 감독이라면 갭이 이만큼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자신감인지 건방진 건지, 아니면 나이에 대한 부담감인지 간격이 못 건널 만큼 넓진 않아 보이네요. 한번 전부를 걸어봐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행히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들이 짜임새가 있다, 재밌다라는 말을 해주고 있어서 희망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만약 잘 안 되면요? “딴 길 찾아봐야지요. 영상물 제작 그런 쪽 일도 있고. 장사를 할 수도 있지요. 이제 잃을 게 별로 없죠, 뭐. 바닥을 벌써 쳤어요.” 그의 대답이 시원시원하다. 영화인들의 부업에는 옷가게, 식당 등 다양하다. 어떤 이는 기술이 뛰어나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중고차 고치다가 전화 오면 셔터 내리고 쪽지 붙이고 나간다. ‘영화 찍으러 갔음. 주인 백.’ “이게 요크에서 길러진 거 같아요, 잡초는 밟히고 밟혀도 일어서잖아요. 그런 교육을 저도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어요. 좋은 영화학교 만들어서요.”
그는 “영화는 금방 결과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생각한 것들이 금방금방 눈앞에 나타나고 그 중에 가슴 떨리는 순간도 있고….” 결국 나는 가슴에 화로단지를 안고 사는 한 사나이를 이 겨울녘에서 만났던 것이다.

권은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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