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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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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서 인용하면 식민사학자가 되는 나라

일본 고대사 왜곡 바로잡는 일에 일생 바치고 매국노·친일파로 비난당한 원로 사학자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식민사학과 평생 싸웠는데 식민사학자가 되어버렸다”
등록 2017-11-14 07:57 수정 2020-05-02 19:28

김현구(72) 고려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인정하는 한일 고대사 전문가다.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역사 논쟁과 관련해 「아사히신문」 「NHK」 등 일본 주요 언론에서 패널로 부른다. 김 교수는 1985년 일본 와세다대 박사 학위 논문 이후 30년 동안 연구를 지속해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이 자국 역사의 기틀로 삼고 있는 △임나일본부설 △다이카 개신 △백촌강(백강) 전투에 대한 통설이 허구임을 밝혀냈다.

일본 역사서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왜곡한 한국의 고대사를 바로잡는 일에 일생을 바친 김 교수에게 ‘식민사학자’ ‘매국노’ ‘친일파’ 같은 황당한 주홍글씨를 새긴 이들이 있다. 유사역사가들이다. 대표적인 유사역사가 이덕일씨는 책 (만권당)에서 김 교수에 대해 “외형은 한국인이지만 내면은 일본인인 한국 국적의 김현구” “살아 있는 친일파 김현구”라고 표현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2014년 10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 및 모욕죄’로 이덕일씨를 고소했다. 2015년 2월 1심에선 승소했으나 같은해 11월 항소심과 2017년 5월11일 대법원은 이덕일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김 교수는 최근 펴낸 (이상)에서 이 극적인 역전을 가능케 한 유사역사 역사농단의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복기했다. 유사역사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언론과 내로라하는 명사들의 카르텔이 이 메커니즘을 작동시킨 축이라는 지적은 뼈아프다.

지난 11월1일 서울 송파구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한 김 교수는 “식민사학과 평생 싸웠는데, 식민사학자가 되어버린” 황당한 아이러니에 대해 “코미디 같은 일”이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2014년 10월 이덕일씨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유사역사의 공격에 정면 대응했다. 유사역사의 공격을 ‘무시’해온 기존 학계의 대응과는 사뭇 달라 적잖은 파장이 있었다.

이덕일씨는 (2014)에서 내가 쓴 (2010)를 두고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했다’, ‘삼국이 일본의 속국이라고 했다’, ‘일본 사서인 를 사실로 인정했다’는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 내 책에는 전혀 반대로 되어 있다. 일본을 정면 비판하는 사람을 친일파로 매도하는데, 이렇게 되면 일본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매국노·친일파로 매도당할 수 있다고 봤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일본 관계 연구자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행태를 용납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김현구 교수의 는 안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이용해 에 기록된 일본의 한반도 남부경영설 즉, 임나일본부설을 논리적으로 반박한 책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박근혜씨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모은 ‘박적박’(박근혜의 적은 박근혜)처럼 일본 학자들이 일본 고대사의 토대로 삼는 가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도록 하는 영리한 방법이다. 공교롭게도 이덕일씨가 에서 김 교수를 매국노·친일파로 매도하는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이덕일씨는 ‘김현구는 식민사학자’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김 교수가 를 인용했거나 를 토대로 임나일본부설의 초석을 놓은 일본학자의 학설을 수용한 부분만을 발췌해 열거한다. 이덕일씨가 내세운 근거들은 김 교수의 핵심 주장, 즉 ‘임나 지역을 지배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백제다’와는 무관한 지엽적인 것들이다. 한일 역사 전쟁의 핵심 대목인 임나일본부설을 결정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일본학자들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의 일부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김 교수의 연구방법론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허위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한 1심 판결을 뒤집은 항소심과 대법원도 김 교수의 책에 이덕일씨가 주장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덕일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그렇게 오해할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방법론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를 무기로 연구자를 모욕하는 일을 법원이 용인한 셈이다. 한국 사회는 식민사학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반박해야 하는 역사 연구자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호하지 않았다.

를 이용해 를 반박하는 연구방법론이 화근(?)이 된 것 같다.

를 인용하지 않고 어떻게 일본 학자들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일본 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을 전제로 역사의 틀이 형성됐다. 내가 책 하나 쓴다고 일본의 역사학계가 바뀌는 게 아니다. 이런 방식의 연구가 끊임없이 있어야 일본 학계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내 발목을 잡았다. 를 인용하면 식민사학자가 되는 나라에서 앞으로 어떤 연구자가 를 반박하는 연구할 수 있겠는가. 역사학자들에게 를 반박하는 연구를 하지 말라고 한국 사법부가 재갈을 물린 것이다. 이보다 한심한 일이 어디 있나.

이덕일을 비호하는 명사들에게 더 큰 실망 를 어떻게 연구한 것인가.

임나일본부가 임나에 있었다는 기간에 일본과 한반도에 사신이 오간 빈도를 를 통해 조사했다. 백제-신라는 2번, 임나-일본은 8번, 백제-일본은 39번이었다. 그동안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가 임나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그들이 신봉하는 에 임나-일본의 관계가 드문 것으로 나오니 꼼짝을 못했다. 백제-일본 관계의 실체도 밝혔다. 백제가 일본에 요청하는 것은 군사 지원밖에 없었고, 일본이 백제에 요구한 것은 선진 문물의 전수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일본과 임나랑 상관이 없는데 에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는 얘기는 왜 나오게 됐느냐. 나는 실제 임나를 지배한 것은 백제 8성 가운데 하나인 백제 장군 목씨(목라근자)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일본에는 목씨가 없다. 임나를 지배했던 백제 목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소가씨가 됐다는 것도 입증했다. 이 모든 것을 일본 기록으로 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도 반박하기 어렵다.

김 교수는 이덕일씨가 오히려 일본의 식민사학자와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덕일씨가 (2000) 41쪽에 제시한 고대 한반도 지도에 ‘왜’가 등장하는 것을 사례로 들었다. 김 교수는 “한반도 서남부에 왜의 존재를 표시하는 학자는 일본에도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없었다”고 했다. 이번에 김 교수가 낸 에는 역사연구자들에게 식민사학자 딱지를 붙이며 민족사학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덕일씨가 정작 자신의 책에서 식민사학자나 다름없는 주장을 한 ‘흑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김 교수는 이덕일씨의 ‘기행’보다 이를 비호하는 명사들에게 더 큰 실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소송 과정에서 이덕일씨의 공익변호사를 자처한 이는 대통령 후보로도 나선 바 있는 박찬종 변호사와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 장관과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허성관 전 장관은 이덕일씨에 대한 검찰의 기소 결정에 “이덕일을 형무소에 보내서 지켜야 할 정의가 뭐냐”고 반문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 이재명 성남시장 등 이덕일씨에 대한 1심 재판부의 ‘유죄’ 판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명사가 한둘이 아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없다는 데 한일 연구자들이 합의했다. 일단락된 문제 아닌가.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기에서 낸 결론은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약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없었다는 데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왜가 한반도를 200년 동안 지배했다는 것이지,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구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여전히 일본 고대사는 왜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을 전제로 서술되고 있다.

출간 거부한 일본 출판사

라는 책 제목이 마치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하는 것으로 해석돼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다.

임나일본부 문제 자체는 허구가 아니다. 다만 그런 기구를 통해 임나를 통치한 것이 일본이 아니라 백제라는 것이다. 역사의 오해다. 한국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을 막연히 부정하고 있어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반어적으로 제목을 달았다. ‘일본’이라는 표현 자체가 600년대 후반에 생겼기 때문에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고 하는 4~5세기에는 일본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기구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에는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등장하나.

는 720년에 쓰였는데, 그때 표현으로 과거 통치기구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일본을 임의로 붙인 것으로 보인다. 편자가 역사를 오해한 것이다. 임나를 지배한 백제 목씨(목라근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유력 호족인 소가씨 가문을 일구었는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와 일본의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소가씨의 경우 자기 뿌리를 세탁할 필요가 있었다. 백제의 장군으로서 임나를 경영하던 사실을 원래 왜인이었는데 일본천황의 명을 받아 한반도에 건너가 한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백제의 임나경영이 일본이 임나를 경영처럼 되어 버린 연유가 여기 있다는 것도 에 다 밝혔다.

는 김 교수가 고려대에서 2000년대 10년 가까이 강의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김 교수는 해당 강의로 학생들이 강의평가를 통해 뽑은 최고의 강의에 주는 고려대 ‘석탑강의상’을 해마다 받았다. 1996년 출간한 (창작과비평사)는 10만 부쯤 팔린 베스트셀러였고, 일본에서도 번역돼 나왔다. 는 일본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김 교수는 “일본 교수는 출판사에서 안 내준다는 얘기만 하지, 왜 안 내주는지는 얘기를 안 한다. 책에 현 천황가가 백제 무령왕 동생의 핏줄임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포함된 탓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를 연구한 계기는?

에 보면 648년에 신라의 김춘추가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걸로 돼 있다. 에 등장하는 사신 왕래 기록을 확인했더니 김춘추가 인질이 아니라 당과 일본을 오가면서 양국 관계 개선을 조율한 사신 역할을 했음을 밝혀냈다. 김춘추의 행적을 추적하니 일본 역사에서 메이지유신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인 다이카 개신이 친백제파와 친신라파의 권력투쟁의 결과였다는 것도 밝혀냈다.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제로 이행한 메이지유신처럼, 일본 학자들은 다이카 개신을 호족국가였던 일본이 법으로 통치하는 율령국가로 가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 학자들이 일본이 식민 지배하던 임나를 구하기 위해 참전했다며, ‘고대 제국주의 전쟁’으로 해석하는 ‘백강 전투’(일본에선 ‘백촌강 전투’라고 한다)도 김 교수가 허물었다. “백제-일본이 상하관계였기 때문에, 일본이 자기 식민지를 구원하러 온 게 아니라 백제가 망할 경우 당나라가 일본으로 쳐들어올까 두려워서 참전한 예방전쟁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이 지난해 출간됐다.

“임나 지배 전제한 일본 고대사는 모두 허구” 앞으로 계획이 있으신가.

나는 임나 문제, 대화(다이카) 개신, 백촌강 싸움까지 일본 역사의 큰 틀 세 가지를 모두 허물었다. 지금도 내가 맞다고 확신하고, 일본 학자들이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나이 들어 여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라는 책을 쓰고 싶다. 임나 지배를 전제로 서술된 일본 고대사는 다 허구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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