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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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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영원히 ‘행복한 사람’

한국 대중음악의 거목이자 은둔해 있던 시대의 사상가 조동진을 떠나보내며
등록 2017-09-05 16:47 수정 2020-05-03 04:28
한국 가요계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거목’ 조동진이 8월28일 숨졌다. 3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이 거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가요계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거목’ 조동진이 8월28일 숨졌다. 3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이 거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8월30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잔잔한 호수에 동심원을 그리듯 울려퍼졌다. 흑백 영정사진 속 얼굴이 흐느끼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듯했다. 방광암으로 투병하다 8월28일 새벽 세상을 떠난 가수 조동진의 발인식이 엄수되는 순간,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우리를 위로하던 망자의 노래 은 이제 그를 위한 것이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의 슬프지만 따스한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된 듯했다.

화가의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

올해로 꼬박 70년을 세상에 머물다 떠난 조동진. 단지 몇몇 히트곡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그의 삶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한국 포크의 대부’라는 수식어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의 음악 세계는 포크에만 한정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적시려면 우선 자신의 잔을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과 태도는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거목이자 은둔해 있던 시대의 사상가 한 사람을 떠나보냈다.

조동진은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승호·김지미·최무룡 주연의 (1959) 등 30여 편의 영화를 만든 조긍하 감독이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화가의 꿈을 키웠던 조동진은 일찌감치 음악도 자연스럽게 접했다. 진공관 앰프를 자작했을 정도로 오디오광인 형 조동완 덕이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록밴드를 결성해 음악회 행사 같은 곳에서 연주했다. 1966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중퇴했다. 영화 제작까지 도맡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했다. 미 8군 클럽에서 전기기타를 연주하고, 서울 신촌의 다방과 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주로 유명한 팝을 연주하고 노래하던 그는 노래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1968년 만든 (나중에 심의에 걸려 로 개명)는 후에 서유석, 김세환, 현경과 영애, 이수만 등이 불렀고, 1969년 만든 (고은 시인이 작사)는 양희은이 불렀다. 남들 앞에 나서길 꺼리는 성격 탓에 그는 음반을 내거나 방송에 출연하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대신 스튜디오 세션 밴드 ‘동방의 빛’에서 기타를 치며 다른 가수들을 위한 노래를 작곡했다. 핑크플로이드 등 실험성 강한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한 것도 이 시절이었다.

1974년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조동진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음악 동료들이 사라지자 그가 설 땅은 더욱 좁아졌다. 궁핍한 삶에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을 즈음 자신의 첫 음반을 발매했다. 음악을 시작한 지 10년도 넘은 1979년의 일이었다. 1970년대 초반 김세환을 위해 만들어 녹음까지 했으나 그가 활동 금지를 당하는 탓에 발표하지 못한 노래 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웠다. 이 음반이 의외의 반응을 모았다. 1집이 30만 장이나 팔려나가는 히트를 기록한 데 이어, 이듬해 발표한 2집에서도 가 큰 사랑을 받았다.

인기 가수로 이름을 널리 알렸음에도 그는 방송 출연에는 무관심했다. 대신 간간이 공연 위주로 소극적 활동만 이어갔다. 음악과 공연에 집중하는 조동진의 집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김수철, 들국화의 전인권·최성원·허성욱,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함춘호 등 음악인뿐 아니라 진중한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로 북적였다. 의도치 않게 그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동진 사단’이 생겨났다. 조동진 사단의 일원은 1980년대 동아기획을 통해 음반을 발표했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붐을 일으켰다. 조동진은 1985년 발표한 3집에서 을 히트시키며 중심을 잡았다.

1990년대 들어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산실이던 동아기획의 바람이 잦아들었다.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수놓는 댄스음악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조동진은 동생 조동익과 함께 1992년 하나음악을 설립했다. 조동익 또한 1980년대 중·후반 이병우와 함께 포크 듀오 ‘어떤날’로 활동했던 음악인이다. 장필순, 한동준, 이소라, 박용준, 고찬용, 조규찬 등이 모여들었다. 하나음악은 단순한 음반제작사를 넘어서는 일종의 음악공동체였다. 제작자, 프로듀서, 작곡가, 가수, 엔지니어 등이 한 식구처럼 어울렸다. 1989년 시작돼 싱어송라이터의 등용문이 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입상자들은 하나음악의 품에 자연스레 안겼다. 유희열도 그중 하나다.

‘천사’ 된 아내 지키는 ‘나무’가 되어
조동진은 9월16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합동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한전아트센터 제공

조동진은 9월16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합동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한전아트센터 제공

“이런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싶어 겁 없이 만들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우리가 좋아하면 남들도 좋아하겠거니 했죠.” 2015년 초 와의 인터뷰에서 조동진은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바람과 달리 1990년대 중반 이후 가요계가 거대 기획사 위주로 급격히 쏠리면서 하나음악은 위기를 맞았다. 한때 해산했다가 어렵사리 재건도 했지만, 2003년 하나 옴니버스 음반 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막판에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다들 3년 동안 무보수로 일했는데, 내가 미안해서 더는 못하겠더라”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조동익·장필순은 제주도로 내려갔고, 조동진은 일산에 칩거했다. 다른 구성원들도 각자의 길을 걸었다.

2011년, 잠들어 있던 하나음악이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했다. ‘푸른곰팡이’라는 레이블 이름으로 옛 하나음악 식구들이 다시 모여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장필순, 한동준, 고찬용, 윤영배, 더 버드, 이규호 등에다 조동진·조동익 형제의 막내동생 조동희까지 가세했다. 각자 음반을 발표하고 공연해오다, 2015년에는 하나음악의 전통과도 같던 옴니버스 음반 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전까지 뒤에서 후원만 하던 조동진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때였다. 그는 14년 만의 신곡 를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했을 뿐 아니라, 프로듀서를 맡아 음반 전체를 진두지휘했다.

오랜 침묵을 깬 조동진은 지난해 6집 를 발표했다. 5집 이후 무려 20년 만의 새 음반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음반은 포크에만 가둘 수 없는 음악적 자장을 지닌다. 포크, 록, 팝, 일렉트로닉 같은 다양한 요소를 쌓고 또 쌓아 어느 음악보다 깊고 치열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빚어냈다. 는 지난 2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음반 상과 최우수 팝음반 상을 받았다.

조동진은 푸른곰팡이 후배들과 함께 9월16일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라는 이름의 합동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병원에서 방광암 진단을 받고서도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술을 앞두고 자택에서 쓰러졌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푸른곰팡이는 합동공연을 추모공연 성격으로 바꿔 예정대로 진행할 계획이다. 조동진은 후배들과 무대에 올라 를 부르려 했다. 는 2014년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만든 6집 수록곡이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된 조동진은 일산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의 곁에는 먼저 재가 된 아내가 있다. 그는 이제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되어 ‘천사’가 된 아내 곁을 영원히 지키게 됐다.

“마지막 그 순간은 또 다른 시작”

조동진은 지난 7월 생전에 마지막으로 와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푸른곰팡이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실을 말한다면 과거에도 암담했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주어진 성향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둡고 쓸쓸한 희망이 없는 곳일지라도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그가 직접 부르는 노래는 들을 수 없게 됐지만, 대신 후배들이 부르는 그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다. 그 노래는 어둡고 쓸쓸하고 희망이 없는 곳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그는 에서 “마지막 그 순간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영원할 것이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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