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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와 가격

신영복의 <강의>에서 얻은 것
등록 2017-06-22 09:11 수정 2020-05-02 19:28

최근 라는 책을 작업했다. 등으로 환경 논픽션 작가로 자리잡은 남종영 기자가 제주 남방큰돌고래 제돌이의 야생 방사 과정을 중심에 놓고 동물복지의 기본 개념 등을 풀어놓은 신간이다. 420쪽 전체 컬러로, 가격은 1만6천원이다.

출간 뒤 몇몇 사람에게서 책값이 좀 싼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꽤 두툼한 분량이고 흑백도 아닌 컬러 책인데, 적어도 1만8천원은 받아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었다. “좋은 책 싸게 만들어서 널리 읽히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속으론 ‘그러게! 좀더 올려볼걸’ 하며 가슴을 쳤다.

문득 부질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쪽수가, 그리고 색의 도수가 많아지면 제작비가 올라가고 그만큼 가격이 올라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 요소들만으로 책의 가치가 올라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늘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상품 가치를 수치화하는 가격 책정에선 콘텐츠의 무게가 아닌, 그것을 물화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을 기준으로 삼았던 건 아닌가?

10여 년 전의 일이다. 신영복의 라는 책을 읽었다. 가격은 1만8천원. 500쪽 약간 넘는 분량이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꽤 비쌌다. ‘뭐 이렇게 비싸?’ 투덜거리며 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막상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책을 펼쳐 읽다보면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한 학기 수업을 고스란히 듣는 것만 같았다. 실제 이 책은 저자가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 강독’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등 동양의 주요 고전들을 저자의 안내를 따라 읽어나가는 내용이다. 고전 소개에 치중하기보다 고전을 매개로 당대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강단에서 세상 이야기를 곁들이며 강의를 풀어가는 저자의 모습이 연상됐다.

갑자기 머리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당시 대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이 300만원 정도였다고 하고, 한 학기에 6~7개 수업을 듣는다고 단순히 계산하면 강좌당 가격은 40만~50만원이다. 이를 2만원도 안 들이고 누릴 수 있다니! 그것도 따로 노트 필기를 할 필요도 없고,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물론 이 책의 가치가 내게 클 수밖에 없던 더 큰 이유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라는 화두가 ‘완벽한 근대인’이 되기 위해 애쓰다 번번이 좌절을 맛보는 나에게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1만8천원으로 얻기에는 너무나 큰 효용이었다. 그 가치를 놓고 볼 때, 과연 이 책의 적절한 가격은 얼마일까.

정회엽 한겨레출판 인문팀장*‘편집자의 노트’는 책과 책 만들기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출판 편집자의 칼럼입니다. 2주에 한 번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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