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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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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을 걷다 크로켓 입에 물고

여행처럼 놀멍쉬멍 찾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기념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부터 이한열기념관까지 반나절 코스
등록 2017-06-15 07:33 수정 2020-05-02 19:28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로 쓰였던 건물인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에서 바로 보인다.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로 쓰였던 건물인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에서 바로 보인다.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 하행선 스크린도어 너머로 회색빛 건물 한 채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용산역과 서울역을 앞뒤로 바라보는 이 건물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 불렸다. 고 김근태 의원 등 민주화운동가들이 잡혀와 고초를 겪던 악명 높은 장소다. ‘저런 건물이 이런 데 있다니….’ 건물은 위세 당당하게 대로변에 서 있다. 남영역 1번 출구로 나와 롯데리아 사옥과 호텔촌을 지나 200걸음이면 닿을 거리다. 지도도 필요 없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비밀 밝힌 명동성당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뜨겁던 그해 여름의 한국 현대사도 공부하고 서울 시내 숨은 명소를 찾아가보면 어떨까. 은 잔혹하고 뜨거웠던 30년 전 역사의 현장을 반나절 만에 둘러볼 수 있도록 ‘6월 항쟁 기념지 가이드’를 준비했다. 투어 중간중간에 들를 만한 ‘맛집’ 소개는 덤이다.

항쟁의 불씨가 시작된 곳을 출발점으로 잡자. 현재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변신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1987년 1월14일 잡혀와 전기고문·물고문을 받고 숨진 장소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창의력 부족한 변명을 내세워 잠자는 국민의 코털을 뽑았다.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물결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건물 5층에는 운동가들을 잡아다 고문하던 조사실이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문을 한 칸씩 열 때마다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방마다 지극히 평범한 변기와 욕조가 설치돼 있다. 박종철의 영정이 모셔진 조사실은 유독 깨끗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오싹하다.

이 건물은 당대 최고 건축가란 찬사를 받던 김수근(1931~86)이 설계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내부 구성이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배치된 16개의 조사실은 마주 보는 방의 입구가 엇갈리게 배치돼 있다. 동시에 문이 열리더라도 맞은편에서 조사받는 이가 누구인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조사실 안에서 벌어졌던 ‘고문’을 염두에 둔 듯한 이 건물의 내부 구조는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로 찾아가볼 방문지는 ‘민주화의 성지’ 명동성당이다. 가는 길이 멀어 허기진다면 성당 근처 ‘명동교자’에 들러 칼국수에 만두 한 접시를 추가해보길 권한다. 명동교자는 부드러운 면발에 기름지고 걸쭉하면서 뭉근한 고기국물로 유명한 맛집이다. 속이 비치는 만두는 육즙이 가득해 긴 줄을 기다려서 맛볼 가치가 있다.

진한 칼국수 국물처럼 30년 전 명동성당 언덕의 민주화 열기도 뜨겁게 흘러넘쳤다. 1987년 5월18일 저녁,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을 시작으로 광주민주항쟁 7주기 추도식이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김승훈 신부가 신자 2천여 명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면서 그동안 감춰졌던 고문 경찰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해 세상에 알렸다.

명동성당의 첨탑은 독재정권을 겨냥했고 성모 마리아는 투사들을 보호했다. 항쟁의 결정적 분수령이던 6월10일부터 15일까지 시위대는 명동성당을 방패 삼아 농성을 벌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들을 잡아가려는 경찰에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성당 옆 계성여고 학생들은 밥을 굶어가며 시위대에 도시락을 전했다.

항쟁 지도부 ‘국본’ 탄생한 향린교회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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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의 흔적을 찾는 다음 여정은 명동성당에서 100m쯤 떨어진 향린교회다. 가는 길에 명동의 명물 ‘명동 고로케’를 맛보고 가자. 바삭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소가 어우러져 입에서 민주주의를 외친다. 채소맛, 감자맛, 겨자맛, 크림치즈맛 등 소수 입맛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통합의 장이다. 가격도 서민경제를 고려했다. 단, 정해진 물량만 팔고 문을 닫으므로 늦게 가면 허탕을 칠 수도 있다.

향린교회는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된 장소다. 1987년 5월27일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대표자 200여 명이 여기서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국본의 탄생으로 제도권에서 활동하던 야당 통일민주당과 재야 세력이 하나의 대오를 만들 수 있었다. 국본을 통해 개별적으로 투쟁하던 단체들이 한데 뭉쳐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국본 창립 장소로 향린교회처럼 작은 교회가 뽑힌 건 사실 우연이다. 당시 명동성당이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처럼 운동가들이 자주 찾던 큰 종교시설 앞에는 전투경찰과 사복경찰이 잔뜩 깔려 있었다. 농성을 주도하는 ‘요주의 인물’들이 한자리에 뭉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눈초리가 촘촘했다.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5월27일 아침 8시라는 시간만 정해놓고 장소는 정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명동성당 맞은편 골목길 향린교회 앞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연락을 돌려 순식간에 모였다. 24시간 명동성당을 지키던 정보과 형사들은 닭 쫓던 개가 됐다. 향린교회 입구에는 이날의 ‘기습작전’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향린교회와 등을 맞대고 있는 ‘남도한식 정든님’도 알 만한 사람은 아는 맛집이다. 정식을 주문하면 새콤한 간자미무침이 한 접시 가득 나와 입맛을 돋운다. 매생이국과 해초를 맛보며 남도 밥상답구나 생각할 때쯤 쫄깃한 벌교 참꼬막이 술을 부른다. 두툼한 살집의 능성어찜이나 짭조름한 간장게장부터 갓김치까지 남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투사들이 찾던 맛집 옆에서 항쟁이 시작되다

1987년 6월10일, 항쟁의 시작을 알린 성공회 대성당.

1987년 6월10일, 항쟁의 시작을 알린 성공회 대성당.

6월 항쟁 기념지를 따라가다보면 곳곳에서 서울 도심의 숨겨진 맛집들과 만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품은 서울 시내 중심가가 농성의 현장이었던 덕이다. 사실 박근혜·최순실 구속을 외치던 광화문 촛불집회 때도 입은 즐거웠다. 청와대로 가는 길이 경찰벽에 막힐 때쯤 서촌 골목을 헤집다 우연히 발견한 국숫집, 헌법재판소로 행진하다 중간에 빠져 인사동 어귀에서 들른 해물파전집…. 13차 집회쯤 돼서는 아예 단골이 된 집도 있었다. 돼지불백이 지글지글 끓는 가운데, “박근혜는!”, 막걸리 한잔 쭉 들이켜며, “퇴진하라!”

먹는 재미가 집회로 퉁퉁 부은 다리와 쉰 목을 달랬다. 최순실 덕분에 10년 만에 만나게 된 대학 동기,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 어른, 식당 옆자리에 앉은 피켓 든 아저씨 등과 마음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세실레스토랑’(현 달개비 자리)은 6월 민주항쟁 당시 운동가들의 아지트였다. 덕수궁 옆 성공회 대성당 부속건물에 1979년 문을 연 음식점으로, 시국선언과 기자회견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가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종교시설과 연결돼 있어 1987년 당시 국본 인사들도 이곳에서 자주 모였다. 함박스테이크 등을 팔며 운동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던 세실레스토랑은 2009년 문을 닫았다. 현재는 한정식집 ‘달개비’가 운영 중이다.

여정의 네 번째 목적지는 세실레스토랑 터와 바로 붙어 있는 성공회 대성당이다. 이곳에서 6월 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본 지도부는 1987년 6월10일 성당에 잠입해 들어와 종을 치며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를 선언했다. 성당 쪽이 감사성찬례 봉사자들이라고 능청스레 이야기한 덕에 경찰을 피할 수 있었다. 지금도 성공회 대성당 뒤편엔 ‘유월민주항쟁진원지’라는 비석이 있다.

성당 맞은편은 시청 광장이다. 연세대생 이한열의 장례식이 열렸던 7월9일 이곳에 1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에 연재했던 칼럼 ‘역사이야기’에서 당시 풍경에 대해 “시청 앞 광장이 꽉 찼는데 아직도 후미는 신촌 언저리에 있었으니까. 관제동원을 제하고는 단군 이래 최대의 인파가 모였다”고 적었다. 서울특별시청 서소문별관 13층 전망대에 올라 그날의 분위기를 상상해보길 추천한다. 성공회 대성당과 덕수궁, 시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커피 한 잔을 2천원에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카페도 있다.

이한열의 피 묻은 옷과 신발 있는 기념관

마지막으로 가봐야 할 곳은 이한열기념관이다. 이한열은 1987년 6월9일 연세대 앞에서 시위하다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한 달 뒤 숨졌다. 이한열의 죽음은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54-38에 있는 이한열기념관에는 그가 마지막 시위 때 입었던 옷과 신발, 머리에 피 흘리며 쓰러졌을 때 그를 감싼 연세대 화학공학과 깃발 등이 전시돼 있다. 이한열이 숨을 거둔 날 경찰이 들이닥쳐 내민 압수수색 검증영장도 볼 수 있다. ‘압수할 물건: 이한열의 사체 1구’라는 황망한 글귀가 적혀 있다.

글·사진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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