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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票)퓰리즘

등록 2017-03-25 14:0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콩나물.”

아이를 두고 멀리 출장을 떠나 일주일 집을 비우게 되었다. 괜히 맘이 안달복달해 평소 참새 방앗간으로 여기던 반찬가게를 뒤로하고 음식을 몇 가지 하기로 했다. 아이는 소박하게 콩나물이면 된다고 했다. 주말, 이른 저녁을 먹고 반찬을 만들었다. 콩나물을 무치고, 브로콜리를 삶고, 버섯을 볶았다. 불고기와 돈가스를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았다. 미역국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국도 한 솥 끓였다.

그렇게 저녁을 보내고 나니 온몸이 녹진하게 내려앉았다. 안달복달했던 마음이 가라앉은 것도 잠시, 다시 감정이 들볶이기 시작했다. 왜 나는 굳이 반찬을 만들어놓겠다고 발을 동동 굴렀을까. 반찬을 만드는 동안 내 등 뒤에서 놀던 아이는 이미 아빠와 자러 들어간 지 오래. 출장을 위해 가방을 싸고, 취재원에게 인터뷰 시간 확인 메일을 보내고, 자료들을 챙기는 일이 반찬 뒤로 밀려 있었다. 데친 콩나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새벽이 되어서야 내게 필요한 일을 겨우 끝냈다.

를 쓴 은유가 말했다. “역할. 역할의 꽃, 엄마.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왕복하는 거다. (…)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 같지 않다.”

엄마 역할과 나 사이에서

“아이는 너무 예뻐. 그래도 이 상황을 못 견디겠는 건 별개야.” 최근 둘째를 낳아 기르는 한 취재원이 말했다. 눈 아래가 푹 꺼진 그와 나의 공통점은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늘 쫓기는 기분을 느낀다는 거다. 실제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날도 있다. ‘엄마 역할’에 짓눌리는 순간이다.

그날 밤, 나는 장난감 나뒹구는 시커먼 거실에 앉아 대선 주자들의 육아 공약을 검색했다. 지난 대선의 저출산 공약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육아 공약으로 진화해 있었다. 주요 대선 주자들의 공약은 아빠 육아 확대, 출산휴가급여 혹은 보육수당 상향 조정, 유급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연장,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 노동시간 단축 등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지, 노동시간 단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한 물음표와, “디테일 부족” “표(票)퓰리즘”이라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현행 정책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함을 토로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 또한 여기저기 넘실댄다.

출장을 떠난 지 사흘쯤 돼서 아이와 영상통화를 했다. 며칠 만에 내 목소리를 들은 아이는 “선물 사와” 당부를 잊지 않음과 동시에 자꾸만 화면 속 내 코를 쓰다듬고 얼굴을 끌어안으려 했다. 민망한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통화를 마치고 금세, 육아에 매몰되지 않는 저녁 시간이 아까워 새벽까지 잠을 못 자고 책과 노트북을 붙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디테일 부족한 대선 공약들

엄마 역할이 내재화된 상태가 답답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눈물을 철철 쏟아내는 사이에서 여전히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빠들도 ‘아빠’와 ‘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이리저리 쏠리는 시간들이 있을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에게 대선 주자들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주겠다고 하는데, 정작 육아와 일을 병행할 때 노동자로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안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땅에서 아이를 키우고, 일하면서 쫓기는 마음이 들지 않는 때는 언제쯤 찾아올까. 일터와 가정에서 이중 노동을 요구받지 않는 시대는 언제가 될까. 아이가 무심코 나를 끌어안으며 “나는 엄마가 되고 싶어”라는 말을 할 때 서늘한 마음이 들지 않는 사회가 성큼 다가오면 좋겠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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