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니까, 최근 본 전시 중, 아니 경험한 것 중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근데 이게 왜 재미있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재미의 근원을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큐레이터 현시원)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청량하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런 느낌이었어요. 전시장에서 들을 수 없는 음악이 흐르고, 가게 매대처럼 낯익은 방식으로 진열된 사진… 그런 것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청량감이 있었어요.”(현대미술작가 호상근)
정보 없이 사진만 1020점이 사람들이 말하는, 흥미롭고 새로운 경험은 어디에도 없는 사진전이자 페어였던 ‘더 스크랩’이다. ‘더 스크랩’은 2016년 12월27일~29일 사흘간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빈 상가에서 열린 사진전이자 판매 플랫폼이다. 102팀이 작가로 참여했고 이들이 각각 10점씩 낸 사진 1020점이 전시·판매됐다.
낯섦과 익숙함이 겹치고 반복되는 전시·판매 방식은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생경한 재미를 선사했다.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랩’ 방식을 취한다. 102팀의 작가들에게 사진을 받는 방식부터 그랬다. 별다른 주제 없이 전시하고 싶은 사진 10점을 골라 보내달라고 했다. A4 크기로 인쇄해야 하므로 사진을 일정 용량 이상으로 보내달라는 최소한의 주문만 했다.
스크랩한 사진에는 1번부터 1020번까지 번호를 매겼다. 나열 방식은 작가 이름도 선착순도 아닌, 사진 파일 크기순이었다. 사진은 똑같은 3단 선반 위에 똑같은 크기로 인화돼 놓였다. 벽에는 이들 사진을 모두 스크랩해 섬네일처럼 프린트한 큰 종이가 걸려 있었다.
관객 혹은 구매자는 입장료 3천원을 내고 전시장에 들어서서 자신의 동선대로 구경하며 맘에 드는 사진을 담는다. 사진작가 이름부터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건을 찍은 것인지 정보는 없다. 사진 전체가 하나의 맥락 안에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시위 현장처럼 구체적인 사건을 찍은 사진부터 회화 작품을 찍은 사진까지, 전시 작품들은 어떤 이미지에 가깝다. 그 이미지가 품은 주제를 추론해가며, 구매자는 사진을 사는 경험을 한다.
사진을 살 때에는 두 개의 패키지를 고를 수 있다. 10장에 5만원짜리와 5장에 3만원짜리 패키지가 있다. 사진 한 장당 5천~6천원인 셈이다. 선반 전시 사진과 벽에 프린트된 작은 사진을 번갈아 보며 사진을 고른 구매자는 판매 데스크로 간다. 그곳에서 화면에 촘촘하게 파일로 저장된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프린트된 사진을 받는다.
“사람들은 의외로 이 순간 가장 짜릿함을 느꼈다.” 1월3일 설치물 철거 작업이 한창이던 용두동 전시장에서 만난 기획자이자 사진작가 김익현·홍진훤씨가 말했다.
물성을 지닌 사진을 직접 받아 손으로 만지는 경험은 익숙함에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사진을 산다’는 것을 상상하지 않은 이들이, 작품을 고르고 사고 만지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2030 일상을 스크랩한 기획‘더 스크랩’은 오늘을 사는 20~30대의 일상을 스크랩한 기획이기도 하다. 이 전시를 중심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말을 ‘워드 클라우드’(한 주제에 대해 많이 언급된 단어를 크게 보여주는 글이나 문서의 시각화 기법)로 표시한다면 음악, 이케아, 힙스터 같은 2030의 단어가 도드라져 보일 가능성이 크다.
전시장에 있는 물품 대부분은 이케아에서 구매한 것인데, 저렴하고 보관이 용이하고 재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실제로 전시장에 놓인 선반들은 철거 뒤 기획자들이 나눠 가졌다.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도 이케아와 무관하지 않다. 홍진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전시장에 찾아온 대부분의 관람객·구매자가 20~30대다. 이케아로 인테리어한 큐브 같은 공간에 사는 세대가, 이케아로 꾸민 도시의 공실을 찾은 거다.”
흔히 1978년생 이후 연령층을 일컫는 ‘이케아 세대’는 감각과 실용성은 뛰어나지만 내구성은 약한 이케아 특성에 빗대, 스펙은 화려하지만 낮은 경제력과 불안정한 미래를 가진 세대로 설명된다. 사진이 A4 크기로 정해진 것도 이케아의 연장선에 있다. 홍진훤씨가 말을 덧붙였다. “이케아로 꾸민 방에 사는 이들이 사진을 사서 방 한쪽에 건다면 사진 크기가 얼마나 돼야 할까?”
공연장이나 클럽에서 나올 법한 음악이 흐르는 전시장에서 평상시 구매하기 어려운 작품 사진을 적은 비용으로 살 수 있다는 점도 구매자를 열광하게 했다. 기획자들은 “전시 마지막 날은 서울의 힙스터들이 용두동에 다 모인 것 같았다. 손등 혹은 가슴팍에 파란색 스티커를 붙인 이들이 신설동역 일대를 어슬렁거렸다”고 그날 분위기를 전했다.
오늘의 힙스터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에 가장 적극적인 문화 전파자다. 기획자들이 애초에 내세운 “아트페어와 옥션, 갤러리 등 기존 유통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비자를 위한 판매 경로를 설계하겠다”는 목표에 다가간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큐레이터 현시원씨는 좀더 넓은 폭으로 ‘더 스크랩’에 겹친 오늘의 일상을 말했다. “이 기획에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이유는, 동시대 한국에서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맥락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이즈의 종이에 일관된 방식으로 인화한 사진은 평소 접근하기 어려운 예술품인 동시에 기성품처럼 보였다. 그날 마련한 판매분이 소진되면 ’솔드아웃’ 딱지가 붙는 방식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 패턴이다.
그러다보니 관람객 대부분이 사진을 ‘샀다’. 한 장당 5천~6천원인 가격도 영향을 미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없이 ‘사라!’는 말을 외치는 익숙한 동선과 전시 방식은 끝없이 소비를 요구하는 시대적 맥락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될 실험사흘 동안의 재입장을 제외하고도 1600여 명의 관람객이자 구매객이 ‘더 스크랩’ 전시장을 찾았다. ‘젊은 작업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전시하고 유통하는 구조를 주체적으로 설계해보는 실험이 가능할지’ 질문을 던지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들은 일말의 답을 얻었을까.
“(사람들이) 사진을 꼼꼼히 보고, 그걸 가져가서 꺼내보며 서로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김익현 작가의 바람은 일정 부분 실현되지 않았을까. “사진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스펙트럼을 펼쳐놓아보자”는 홍진훤 작가의 기획 의도 또한 참여 작가와 구매자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성취를 얻지 않았을까.
사흘 동안 팔려나간 사진 5300여 장은 어떻게 사람 사이를 오가고, 기억되고, 보관될까. 기존 사진 전시와 판매 방식에 이들이 던진 질문과 균열은 앞으로 어떤 물결을 만들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기획자들은 “당장 내일 일도 잘 모르지만, 몇 번의 실험을 더 해보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더 스크랩’의 구매자도, 판매자도 “도대체 누가 낯선 동네, 낡은 건물에 차려진 전시장에, 이 사진들을 사러 올까”를 궁금해했다. 기획을 한 김익현·홍진훤 작가는 물론 구매자로 인터뷰에 응한 큐레이터 현시원, 현대미술 작가 호상근씨도 각각 누가, 왜,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사고,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궁금증과 답변을 통해 젊은 예술가 시장의 오늘과 내일, 열망과 기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1월5일 과 만난 현시원 큐레이터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호상근 작가의 말을 정리해 옮겨 싣는다.
현시원 큐레이터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너무 신났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내내 이 기분 좋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더 스크랩’은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극단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비물질적인 것을 살 수 있는 카테고리에 넣은 실험이었다. 사실 여기저기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장터’라는 개념을 좋아하진 않는다.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다는 관점이 녹아 있기 때문에. 심지어 대학 수강 신청을 할 때도 학생들이 선택 과목을 ‘장바구니’에 넣는 시대이지 않나.
‘더 스크랩’은 전시 기획부터 판매까지 모든 시스템을 투명하게 공개해 신선했던 것 같다. 내가 구매한 것이 사진인지 이미지인지, 그리고 내가 사진을 고른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사진 정보 제공 방식도 재미있었다. 사진 정보가 없어서 오히려 거리낌 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함께 간 ‘인쇄 덕후’는 사진 정보가 적힌 종이에 열광했다. 사진을 한 장 구매하면 거기에 사진 정보를 담은 또 한 장의 종이가 따라오는데, 미색의 얇은 종이에 사진 정보가 쓰여 있었다. 우리가 보통 쓰는 하얀 A4용지는 서류 느낌이 강한데, 기획자의 섬세한 감각이 전해졌다.
미술시장은 ‘전문성’이라는 벽이 높고 사람들이 참여하기 힘든 행사도 많이 열리는데, 기획자·사진작가·구매자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전시였다. 지난해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영향으로) ‘세계가 망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런 재미있는 기획을 발견하고 참여할 수 있어 즐거웠다.”
현대미술 작가 호상근 “나는 이 전시의 참여자이기도 했다. 김희천 작가와 팀으로 참여했다. 내가 그린 그림을 김희천 작가가 사진으로 찍었다. 판매 대금을 n분의 1로 나눈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참여했다. 막상 전시가 시작되고 나서는 관람객이자 구매자로서 순수하게 너무 즐거워서 두 번이나 찾아갔다. 전시장이 가까웠냐고? 서울 남쪽 아래 경기도에서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갔다.
보통의 전시나 아트페어 방식을 깨는 데서 오는 청량감이 있었다. 페어라고는 하지만 진열 방식이 마트 같기도 하고, 그런 익숙함과 낯섦이 부딪히는 공간이었다. 보통 전시장에서 들을 수 없는 음악이 흐른 것도 좋았다. (음악은 뮤지션 박다함씨가 자신이 1년 동안 들었던 음악을 스크랩해서 참여했다. 클래식부터 대만·일본 팝과 한국 가요까지 다양한 음악을 믹스했다.)
사진 정보가 제공되지 않아 어릴 적 카드뽑기 하는 느낌이 들었다. 관람 첫날에는 이미지만 보고 10장을 사고, 둘쨋날은 좋아하는 작가일 거라 추측하며 10장을 샀다. 그런데 사고 보면 그 작가가 아닐 때, 오히려 재미있었다. 여러모로 자유롭게 열린 방식이 즐거웠다. 이런 실험이 계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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