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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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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정신을 남긴다

20세기 초 아나키스트 구스타프 란다우어의 <혁명>

새 정신의 탄생을 불가역적 유산으로 해석하다
등록 2016-12-06 11:55 수정 2020-05-02 19:28
2016년 한국 시민들은 어떤 ‘혁명’을 끌어낼 수 있을까? 100여 년 전,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혁명을 ‘기쁨의 정신’으로 파악했다. 위키피디아

2016년 한국 시민들은 어떤 ‘혁명’을 끌어낼 수 있을까? 100여 년 전,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혁명을 ‘기쁨의 정신’으로 파악했다. 위키피디아

벌써 한 달 넘게 우리는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대통령 퇴진”을 외친다. 광장은 초겨울의 찬바람도 아랑곳없이 축제로 떠들썩하다. 이 놀라운 광경에 과연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까? 광장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름은 ‘혁명’이다.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시민혁명’을 말한다.

물론 혁명의 교과서적 정의에는 맞지 않는다. 정권이든 체제든 무너뜨려야만 혁명이라고 정치학 교과서는 말한다. 우리의 항쟁은 아직 그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혁명’이라 한다. 왠지 격에 맞는 다른 말은 없는 것 같다. 동서고금 혁명의 어떤 점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이 물음의 답이 될 만한 사색을 전개한 사람이 있다. 한 세기 전 독일의 혁명가이자 사상가 구스타프 란다우어다.

독일 혁명가 중 가장 꿋꿋했던 사람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11월 독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4년째 계속되던 전쟁에 지친 대중이 들고일어나 황제를 내쫓고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황제뿐만 아니라 그를 뒷받침하던 기존 체제까지 바꾸자는 세력과 옛 질서의 기둥이던 군부와 대충 타협해 혁명을 끝내려는 세력이 갈렸다. 안타깝게도 승자는 후자였다. 혁명의 원칙파·급진파는 탄압받았고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같은 저명한 지도자들이 희생당했다. 란다우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몇 년 뒤 헤르만 헤세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전쟁에 지치고 무의미와 절망에 질식하던 시대”를 뚫고 “새롭고 인간적이며 열광적이고 세계시민적인 분위기가 타올랐다”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당시 혁명가들 가운데 “가장 꿋꿋했던 사람”으로 란다우어를 떠올렸다. 란다우어는 독일 좌익의 다수파였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리가 먼 아나키스트였다.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다. 그럼에도 헤세가 독일 혁명의 순교자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올린 이름이 란다우어였다. 그만큼 그가 당대 사상계에 끼친 영향은 깊고 넓었다.

구스타프 란다우어가 1870년에 태어났으니 블라디미르 레닌과 동갑이다. 유대계 중산층 집안 출신인 란다우어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며 문학도의 길을 착실히 밟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니체에 탐닉하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표트르 크로포트킨 등 아나키스트의 책에 빠져든 게 탈이었다.

젊은 란다우어는 사회민주당에서 쫓겨난 급진파 청년들과 어울리다 그들이 내던 잡지 의 주요 필자가 됐다. 글만 쓴 게 아니라 열혈 활동가가 됐다. 두 차례나 인터내셔널(좌파 정당들의 국제 조직)대회에 참석했고, 그때마다 주류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당했다.

그래도 란다우어가 주력한 것은 역시 문필 활동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월트 휘트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등의 작품을 번역해 생계를 이어가면서 를 거의 혼자 힘으로 끌고 나갔다. 아나키즘을 주창하면서도 잡지 제호는 ‘사회주의자’를 고수했다. 이것은 란다우어의 신념이었다.

그는 본래 사회주의란 ‘국가’가 아니라 ‘사회’가 중심이 되는 이념이라고 보았다. 자본 독재를 국가 독재로 대체하자는 게 아니다. ‘사회들의 사회’, 즉 대중의 자발적 결사체들이 연합해서 자치(自治)하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란다우어는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동의어라고 주장했다.

1908년 란다우어는 주변 동지들과 함께 ‘사회주의동맹’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작은 단체지만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함께했다. 그중에는 20세기 초 독일 아나키즘 운동을 이끌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에리히 뮈잠도 있었고, 의 저자로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도 있었다.

사회주의동맹 출범 2년 전인 1906년 부버는 란다우어에게 편지 한 통을 띄웠다. 이 무렵 부버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출판사에서 ‘사회’라는 제목의 총서를 편집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부버는 총서 중 ‘혁명’ 편의 집필자로 란다우어만 한 적임자가 없다며 집필을 의뢰했다. 란다우어는 청탁을 받아들여 원고를 보내왔다.

그런데 원고 내용이 뜻밖이었다. 총서 편집자들이 기대한 것은 당연히 사회과학 관점에서 쓴 혁명론이었다. 그러나 란다우어는 유토피아, 기독교 신비주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이 시기에 란다우어는 중세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깊이 빠지는가 하면 ‘개인의 영적 혁명 없이는 사회혁명이 완성될 수 없다’며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당혹케 했다. 부버는 고심 끝에 원고를 그대로 출판했다. 이렇게 해서 란다우어의 주저로 평가받는 소책자 (1907년)이 세상에 나왔다.

은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논의로 시작된다. ‘토피아’(topia)란 어딘가에 ‘있는 곳’이고 ‘유토피아’(utopia)란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란다우어는 인류 역사가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반복이었다고 본다. 토피아, 즉 특정 질서가 지속되는 곳이라면 언젠가 그것을 넘어서려는 유토피아의 열망이 등장한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반드시 또 다른 토피아, 즉 새로운 질서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란 헛된 열정에 불과한가?

혁명은 새로운 정신이 탄생하는 순간
란다우어는 혁명의 본질을 ‘민중의 정신적 각성’으로 정의했다. 오른쪽은 그의 저서 <혁명>. 위키피디아

란다우어는 혁명의 본질을 ‘민중의 정신적 각성’으로 정의했다. 오른쪽은 그의 저서 <혁명>. 위키피디아

란다우어는 이 물음을 던지고 나서 난데없이 중세 기독교 사회로 화제를 돌린다. 그는 진보사관을 비판하면서 중세는 결코 암흑기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이 출간된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란다우어가 중세를 복권하려는 이유다.

중세 유럽에서는 농촌공동체와 자치도시, 장원과 길드 등 다양한 인간 조직이 어지럽게 공존하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사회 전체가 돌아갔다. 란다우어에 따르면, 이 조직들을 가로지르며 개인에게 스며든 공통 정신 덕분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이 정신은 곧 기독교 신앙이었다. 란다우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실은 이 ‘정신’이다.

의 중간쯤이 돼서야 란다우어는 비로소 근대 혁명들을 다룬다. 중세 질서가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준 서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정치혁명이 거의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란다우어는 정치혁명의 사상적 대변자들 가운데 특히 17세기 프랑스 논객 에티엔 드 라보에티에게 주목한다.

라보에티는 주저 에서 전제군주 권력의 원천은 돈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스스로 군주에게 복종하려는 민중의 마음이야말로 지배의 가장 굳건한 토대다. 복종이 있기에 지배가 있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따라서 민중이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어떤 독재 권력도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 혁명은 민중 편에서 감행되는 정신의 각성이다. 라보에티의 경우도 요점은 역시 ‘정신’이었다.

이런 검토를 통해 란다우어는 새로운 혁명관에 도달한다. 혁명은 물론 기존 정권이나 체제를 타도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혁명은 또한 새로운 정신이 탄생하고 이 정신이 대중에 깊이 스며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운 공통 정신의 등장으로 기존 질서는 와해되고, 이 정신이 마치 중세 기독교 신앙이 그랬던 것처럼 새 질서의 토대 구실을 한다. 유토피아가 결국 토피아로 돌아가는 게 불가피한 법칙임에도 유토피아의 순간, 즉 혁명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명은 정신을 남기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분석으로 을 끝내면서 란다우어는 대혁명이 낳은 정신이 무엇보다 ‘기쁨의 정신’이었다고 파악한다. 그러면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에서 그 최상의 표현을 찾는다. 이 곡 4악장의 가사로 쓰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구대로 “기쁨의 온유한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만인은 형제가 된다”. 란다우어는 덧붙인다. “또한 자매도 잊지 말자!”

우리는 어떤 정신을 잉태하고 있는가

구스타프 란다우어의 을 틀 삼아 우리의 항쟁을 들여다보면 ‘혁명’이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거리에서 뭔가 새로운 정신이 꿈틀대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혁명’이라 하기에 흔쾌하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지 ‘피의자 박씨’를 청와대에서 몰아내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정신이 형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이 거리에서 어떠한 정신을 잉태하고 있는가?

란다우어는 자기 세대의 혁명이 어떤 결실을 낳을지 확인할 새도 없이 투쟁의 격랑에 휩쓸려버렸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혁명정부의 문화교육인민위원이 된 그는 학교와 극장 개혁에 착수했다. 경제학자 오토 노이라트, 화폐개혁론자 실비오 게젤 등이 그와 함께 일하려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바이에른 혁명정부는 한 달 만에 진압됐고, 란다우어는 극우파 민병대에 체포돼 학살당하고 만다.

의 마지막 단락은 그의 이런 운명을 예언이라도 하듯, 아니 한 세기 뒤에 역사의 문을 열려고 분투하는 우리를 위안하듯 이렇게 끝맺는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길이 어떠할지 알 수 없다. 이 길은 러시아를 지날 수도 있고 인도를 경유할 수도 있다.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 길이 익숙한 흐름이나 투쟁이 아니라 미지의 구불구불한 경로를 통해 우리를 숨은 보물로 인도하리라는 것, 그것뿐이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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