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9월1일, 척박한 한국 록음악에 ‘들국화’가 꽃피었다. 전인권(보컬), 조덕환(기타), 최성원(베이스), 허성욱(키보드)이 만든 밴드 ‘들국화’가 이날 발표한 첫 앨범 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음악평론가 이백천은 “어떤 공감을 통해 각자 나름으로 문학, 관조, 중심, 원초적 절규, 젊음의 조용한 신음 소리를 듣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소리를 통해 어떤 진실성과 아픔과 짙은 심상을 큰 여백과 함께 보게 해준 전인권,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 네 분, 그리고 그 주변의 여러분께 저의 박수 소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 한판을 두고 국내 대중음악사의 한 전환점을 예감한다면 그것은 필자만의 독단일까요?”라고 했다.
그의 ‘예감’은 결국 예언자적인 것이 됐다. 20여 년 뒤, 2007년 이 평론가·음악기자·방송PD·음반기획자 등 전문가 52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1위가 이었다. “앨범 한 장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1980년대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시작했던 앨범”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중심에 보컬 전인권(62)이 있었다. 그는 군부독재 시절, 거친 저항의 목소리로 사람들의 가슴을 불 질렀다. 그가 부른 노래 이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했고, 은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을 어루만졌다. 들국화는 1987년 해체했지만, 전인권은 이후 30여 년간 한순간도 ‘한국적 록’을 놓지 않았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노무현 전 대통령 소재 영화 OST 맡아</font></font>10월18일 서울 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전인권을 만났다. 그는 “세상이 원래 전부 허무한데, 록음악이 세상을 멋있게 만드는 것이다. 록음악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더 멋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태도에서 ‘록의 저항정신’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사회의 그릇된 문제에 늘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해에는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노래 싱글을 발표했다. 최근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 (10월26일 개봉)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도 맡았다. 그는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안간힘을 썼다. ‘들국화’가 노래로 안간힘을 쓰니까, 그때 사람들이 좋아해준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 약자에게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마음 아픈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노래로라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요즘 부쩍 활동이 왕성해진 것 같다.들국화를 결성한 지 올해 31년 됐다.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4~5년 전부터 정신 차리고 제대로 음악을 하고 있다. 3년 전부터 밤무대는 다 접고, 술도 안 마신다. 노래 연습만 한다. 목수가 수십 년 나무를 잘라도, 일하는 만큼 매일 솜씨가 좋아지는 법이다. 나도 매일 실력이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 지금이야말로 연습 안 하면 안 될 나이다.
일단 연습이 재밌다. 언론 인터뷰도 가능하면 삼가려 한다. (그는 와 오랜 인연을 이야기하며 “은 언제 요청해도 인터뷰해줄 것”이라며 아이처럼 웃었다.) 얼마 전까지 텔레비전 프로그램 (SBS)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더라.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을 고민했다. 내가 있을 자리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프로그램에서 을 부르는 것도 좋았다.
에 출연한 게 뜻밖이었다. 젊은 층의 반응이 폭발적이다.내 노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것 같긴 하다. 요즘 인기 있는 내 노래들은 내가 들어봐도 괜찮더라. (웃음) 텔레비전을 보면 노래 경연 프로그램들이 경쟁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고음 잘 올라가고 폭발시키듯 노래하는 것이 ‘노래 잘하는 것’처럼 변해버린 것 같다. 그게 그렇지 않다.
얼마 전 미국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 사람도 목소리가 잘 올라가는 가수가 아니다. 그가 에 나왔으면 금세 떨어졌을 수도 있다. 진짜 좋은 가수는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길로 가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노래도 잘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가사를 쓸 지혜를 배우고 음악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완전한 절망 속에 안간힘을 쓰고 살았던 시대</font></font>옛날 우리 시대는 좀 달랐잖아? 그땐 독재라는 게 있었다. 가수들이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라고 물으면, 방송국과 정부에선 밝고 명랑한 노래를 하라고 했다. 우리가 (1980~90년대 대중가요 프로그램) 에 출연하는 데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까닭이다. 가수들이 (1970~80년대 오락 프로그램) 에 나가야 인기를 얻었지만, 우린 나가지 않았다. 방송도 우리를 원하지 않았고, 우리도 방송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중이 ‘힘있는 자’들에게 화가 나 있던 시절이다. 가수들도 다 안다. 대중과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많은 사람이 완전한 절망 속에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그런데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비썩 마른 네 친구가 나타나더니 ‘허무와 저항,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자’는 이야기를 노래한 거다. 군인이 정치하는 것에 사람들이 완전히 지쳤는데, 들국화가 나타나서 엄청나게 길을 달린 거다. 사람들이 동지애를 느꼈다. 화난 사람들이 우리 노래를 좋아해준 거다.
지난해 발표한 싱글 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경북 포항 인근 칠포 재즈페스티벌에 갔었다. 비가 좀 오는데 바닷가에 나갔더니 커다란 바다가 보였다.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바다만 봐도 가슴이 주저앉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들은 바다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방법이 없을까? 이런 가사를 만들었다.
“그대 아픈 마음이 아문 다음에/ 아름다운 그대 아름다움에/ 내 마음속에/ 가뭄 뒤로 사랑 꽃피는/ 모두 버려 버려도 힘이 넘치는/ 너와 나 사랑이 넘쳐나/ 아무리 높은 산도/ 함께하면 넘쳐나…”
그는 이전에도 사회참여적 활동을 많이 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자리나 제주 강정마을에서 부르면 사정이 허락하는 한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10월26일 개봉하는 영화 에서도 주제곡으로 삽입된 를 불렀다. 영화는 권위적인 사회와 영호남 지역주의 해소를 위해 헌신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전인권은 영화 말미에 잔잔한 통기타 선율에 읊조리듯 아련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관객을 위로한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벌거벗은 시대가 왔다</font></font>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주 강정의 아름다움이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파괴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현실을 견디기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때, 도움이 된다면 참여를 해왔다. 사람들이 추워서만 옷을 입는 건 아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이유도 있다. 벌거벗고 있으면 안 된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 게 인간적이다.
시대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최근 정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논란이 됐다.전부 벌거벗은 시대가 된 것 같다. 국가가 사람들의 속을 보려는 것 같다. 특히 문화예술 쪽은 그냥 둘 때 가장 잘 돌아간다. 정부가 어떤 의도를 갖고 문화예술인을 건드리는 건 정말 문제다.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 같다.
주제곡에도 참여했다.록이란 게, 담배 하나 물고 ‘허무’를 노래하는데 그게 슬프지 않고 멋있게 보이는 것이다. 여길 가도, 저길 가도 마음 아픈 사람이 많다. 그걸 리듬과 가사로 위로해주는 것이 록음악의 구실이란 생각을 했다. 영화에 참여한 것은 생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 이유도 있지만, 조카(전인환 감독)가 그 영화를 만들었다. 통기타로 낮고, 조용하게 노래했다.
최근엔 어떤 작업에 천착하고 있나.2000년대 초 이혼한 아내가 집을 떠난 게 아직도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아 있다. 그날 아내가 나간 대문 옆에 아직도 ‘베지 못하는 풀’이 있다. 허무함을 느끼지 않으면 희망도 볼 수 없다. 그런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들어보고 있다.
그는 평생을 헌신적으로 자신을 지켜준 아내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듯했다. 먼산을 바라보듯 아직 채 준비되지 않은 가사를 읊조렸다. “나는 오늘도 그 대문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오. 그대여 버릴 건 버려요. 힘든 건 잊어요.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한편으로 그는 인터뷰 내내 “내가 노래 솜씨가 없는 편이다. 그런데 이젠 솜씨가 많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면 정말 좋은 가수가 되거나 좋은 노래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대 최고의 가수이자 ‘록의 전설’로 불리는 노가수의 성장은 아직도 끝을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3년’을 말했다. 이제껏 다른 가수 앨범 2500장을 모아서 들었는데, 그 노래들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정말 열심히 연습하면,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저 사람, 멋있네’라고 어느 순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좋은 가수, 정말 좋은 노래를 하고 싶다”고 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너무 애써서 걱정하며 살지 않아도 괜찮아</font></font>노가수는 따뜻함이 담긴 지혜의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무의 세계’ 쪽으로 걸어가는 일입니다.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삶에는 한계가 있는데,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너무 애써서 걱정하며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말에 사람들이 위로받는 것도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font color="#008ABD">글</font>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font>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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