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응우옌티탄의 진실을 찾아서

17년째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추적…

<한마을 이야기 퐁니·퐁넛> 기록집 낸 고경태 기자
등록 2016-10-25 14:12 수정 2020-05-02 19:28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17년째 한 사건을 좇았다. ‘징하다’. 베트남전쟁(1960~75)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논할 때 그의 이름을 빠뜨릴 수 없다. 고경태.
1999년 편집팀 기자였던 그는 2년에 걸쳐 피해자·가해자 증언을 듣고 사건의 진상을 추적 보도했다. 30년 만에 기밀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관련 문서와 사진을 입수해 2000년 11월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 10여 년 뒤 2013년 1월과 2014년 2월 베트남 마을을 다시 취재했다. 2015년 2월 그 결과물인 책 을 내놨다.
2016년 9월9일~10월1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 아트링크에선 기록전 ‘한마을 이야기-퐁니·퐁넛’을 마련했다. 같은 제목의 기록집도 냈다. 17년간 자신이 추적한 과정과 결과물을 담았다.
1999년 최초 보도고 기자는 1994년 2월 창간준비팀에 있었다. 그 뒤 12년8개월을 에 몸담았고 2006년 편집장을 끝으로 떠났다. 이어 생활문화섹션 ESC팀장, 편집장, 토요판 에디터 등을 거쳤다. 지금은 신문부문장이다. 그를 10년 만에 다시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10월19일 그는 ‘징하게도’ “(아직도) 궁금한 게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9년 당시 국외 통신원 담당자였다. 20명의 통신원 중 한 명이 베트남 호찌민 통신원 구수정(현 한·베평화재단 이사)씨였다. 구씨는 1997년 하노이 외무부 국가문서보관센터에서 문서 하나를 입수했다. 1980년대 베트남 정치국 전쟁범죄 조사위원회의 문서였다. 제목은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기자와 통신원은 문서 내용을 확인해 보도하기로 했다.
첫 보도는 1999년 5월6일 제256호 ‘지구촌’에 실렸다.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란 제목의 르포였다. 구씨가 문서에 등장하는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 지역 린선(Linh Son)사 스님 대상 한국군 난사 사건’의 생존자와 목격자 증언을 듣고 기사를 썼다.
본격적인 보도는 1999년 9월2일 제273호 특집 ‘베트남 종단 특별 르포’였다. 구씨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중부 5개 성, 수십 개 마을 100여 명에게 피해 증언을 들었다. 그 뒤 은 1년간 ‘베트남 피해자 가족 돕기’ 캠페인을 벌였다. 고 기자는 캠페인과 후속 보도 담당자가 되었다.
1999년 보도와 캠페인은 어떻게 시작했나.

20세기 마지막 해였으니까 이 문제를 청산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돌아보면, 그 관점은 잘못됐다. 당장 청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파급력은 예상했지만 판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피해자를 돕는 차원에서 성금 모금 캠페인을 했다. 1년 동안 매주 고정 지면에 피해자와 참전군인 증언, 독자 사연을 실었다. 2000년 한 해에만 표지이야기로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 보도를 네 차례 내보냈다.

보도가 충격적인 만큼 반발도 거셌다. 2000년 6월27일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회원 2천여 명이 한겨레신문사 앞 도로를 점거해 방화를 시도하고 차량 10여 대를 부쉈다.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사옥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고 직원들을 구타했다. 고 기자도 사무실(당시 5층)에 있었다. 같은 층에 근무하던 애꿎은 직원 한 명이 유리 파편에 다리를 다쳤다.당시 보도를 평가한다면.

은 창간호부터 ‘성역 없는 언론’을 표방했다. 다른 언론에서도 알고는 있었지만 보도하지 못한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의 불법 국정 개입 의혹을 보도했다. 지금 ‘최순실 사건’ 같은 일이다. 그 결정판이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보도다. 그건 자기 스스로를 고발하는 보도였다. 가해국에서 최초로 보도한 것 또한 이례적이다. 베트남에서조차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말할 때 을 빼놓지 않는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최초로 연구하고 현장조사한 구수정씨는 당시 한국군에 의해 80여 마을 9천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했다. 1968년 2월12일 한국군 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가 베트남 중부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에서 주민 74명을 학살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한국은 1965년부터 베트남전에 전투부대를 파병해 1973년 철군했다.12년 만에 발견한 ‘1968년’의 의미
(위쪽부터) 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서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가슴이 도려진 채 쓰러져 이튿날 숨진 응우옌티탄(당시 19살). 베트남 최대 일간지 <뚜오이째>는 9월10일 고경태 기자의 기록전 ‘한마을 이야기-퐁니·퐁넛’을 소개했다. 같은 제목의 기록집 표지 사진. 한겨레 고경태 기자 제공

(위쪽부터) 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서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가슴이 도려진 채 쓰러져 이튿날 숨진 응우옌티탄(당시 19살). 베트남 최대 일간지 <뚜오이째>는 9월10일 고경태 기자의 기록전 ‘한마을 이야기-퐁니·퐁넛’을 소개했다. 같은 제목의 기록집 표지 사진. 한겨레 고경태 기자 제공

‘빙산의 일각’인 퐁니·퐁넛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한국군 참전군인 증언에서 처음 퐁니·퐁넛 얘기가 나왔다. 그들 사이에선 퐁니·퐁넛 마을을 ‘한국판 밀라이’라 불렀다. (1968년 3월16일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선미촌에서 미군이 주민 500여 명을 살해한 밀라이 사건은 그해 11월 언론 폭로 뒤 전세계 반전 여론을 들끓게 했다.) 퐁니·퐁넛은 유일하게 참전군인들이 ‘사건 발생’을 인정한 곳이다. 2000년 입수한 미국 비밀보고서에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요 장소로 퐁니·퐁넛 마을을 다뤘다. ‘아, 이거구나’ 싶었다. 자연스레 그 마을에 초점을 두게 됐다.

2002~2012년은 취재 공백기였다. 캠페인 성금으로 2003년 지은 베트남 푸옌성 동호아현(옛 뚜이호아현) 한·베평화공원 준공식 등에 간간이 참여할 뿐이었다. 그러다 2013년 1월 그는 불현듯 다시 퐁니·퐁넛 마을로 떠난다.12년 만에 다시 마을을 찾은 계기는.

‘이야기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를 집필하면서 1968년 기사들을 다시 훑었다. 퐁니·퐁넛 사건은 한국군의 단순 악행이 아니라 당시 세계사와 연결된 역사성이 있었다. 1968년은 남북관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이다. 1967~68년 남북 교전 횟수는 전보다 10배 이상 늘었다. 거기엔 베트남전의 맥락이 있다. 남한은 베트남 파병으로 한반도에 미국을 붙잡아놓으려 했다. 북한은 베트남에 지상군을 파병하진 않았지만 남한을 계속 건드리면서 간접 개입했다. (고경태 기자는 저서 에서 이를 “박정희에게 베트남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 제2전선이었다면, 김일성에겐 한반도가 베트남전의 제2전선이었다”고 썼다.)

1968년 1월21일 청와대 코앞까지 습격한 북한 특수부대원 김신조 사건과 1월30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기습적으로 벌인 ‘구정대공세’, 그 직후 퐁니·퐁넛 사건이 벌어진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미군의 밀라이 학살이 있다.

2000년과 2001년 퐁니·퐁넛에 갔을 땐 취재 일정상 하루씩만 머물렀다. 다시 마을 사람들의 정밀한 증언을 들어 사건을 클로즈업하고, 세계사적 구도 속에 사건을 위치시키면 입체적인 이야기가 되겠다 싶었다.

아직까지도 당시 발포 책임자와 발포 이유에 대해 명확한 증언이 없다.

퐁니·퐁넛 사건 작전 당시 마을에 가장 먼저 투입된 한국군 청룡부대 1소대장 최영언 중위를 10차례 이상 만나 증언을 들었다. 마지막 만난 날 최 중위가 말했다. ‘3소대 3분대가 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향도 하사와 몇몇 분대원이 쐈다고. 왜 쐈는지 알 수 없다. 어찌 생각하면 미친놈들이다’라고.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 80여 건 가운데 그 원인을 제대로 밝힌 건 하나도 없다. 단지 한 달 남짓 전에 청룡부대가 주둔지를 옮겨 낯선 환경에 처한데다, 12일 전 베트콩의 구정대공세 이후 스트레스가 누적됐을 거란 짐작만 할 뿐이다.

다시 베트남에서 뜨거운 이슈
2003년 1월21일 베트남 푸옌성 동호아현(옛 뚜이호아현) 한·베평화공원 준공식 모습. 한겨레

2003년 1월21일 베트남 푸옌성 동호아현(옛 뚜이호아현) 한·베평화공원 준공식 모습. 한겨레

최근 베트남에선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이 뜨거운 이슈다. 베트남 최대 일간지 는 9월11~17일 7차례에 걸쳐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생존자 증언과 활동 모습을 보도했다. 9월10일치엔 기록전 ‘한마을 이야기-퐁니·퐁넛’ 소개 기사를 실었다.국내에선 2000년대 초 이후 별다른 관심과 반응이 없다.

나도 2008~2009년에는 냉소적이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구수정씨에게도 ‘그만해라. 지겹다. 나도 지겹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아직까지 사건을 없던 일로 치부하려는 이들도 있다. 이 사건은 그냥 있었던 일인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처럼 아직 고통스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건을 잊지 못한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다르지만 같은 비중으로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17년째 한 사건에 매달리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시작은 사진이었다. 2000년 입수한 미국 비밀보고서에 첨부된 미군 본(J. Vaughn) 상병의 사진 20장 가운데 1장. 본 상병은 그 사진에 ‘가슴이 잘린 채 살아 있는 여자’라는 메모를 달았다. 나는 2001년 4월 사진을 들고 마을을 찾아가 그 여성의 이름을 확인했다. ‘응우옌티탄’(같은 마을 생존 피해자와 동명이인)이었다. 그 사진이 없었으면 더 이상 관심을 안 가졌을 거다. 사진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사진에 담긴 시각, 그 너머에 보이는 건 무엇인지. 나도 몰랐고 독자도 미처 알지 못한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와 가치를 느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인데 아직 드러난 게 많지 않다. (아직도) 궁금한 게 많다.

사건을 취재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많다. 가장 부족했던 건 미국 취재다. 퐁니·퐁넛의 그날 사진을 찍은 본 상병은 1994년에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 당시 현장 구조작업에 참여한 미군 중 실비아 중위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를 찾지 못한 게 아쉽다. 몇 살인지, 대학은 나왔는지, 왜 참전했는지 궁금하다. 그를 통해 당시 미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일 작전을 지휘한 청룡부대 중대장을 못 만난 것도 아쉽다.

내년에도 베트남에 간다 한국 정부와 군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퐁니·퐁넛 사건에 관해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은 주월미군사령관의 질의 편지에 ‘베트콩이 한국군으로 위장해 벌인 사건’이라고 회신했다. 1969년 11월 중앙정보부가 퐁니·퐁넛 사건 관계자들을 조사했지만 자료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17년째 한 사건에 매달리는 고경태 기자는 아직 궁금한 게 많다고 한다. 내년엔 주소지가 퐁니·퐁넛이 아닌 퐁니·퐁넛 사건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만나러 갈까 생각 중이다. 피해자는 있지만 공식적인 가해자가 없는 역사.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 사건은 48년째 현재진행형이다.
김선식 기자kss@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