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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네트워크의 비극

남한 이승만·김구·미군정·비밀테러단체 ‘백의사’와 북한 조만식의 3상회의 전후 기묘한 동거와 그 결말
등록 2016-08-31 18:40 수정 2020-05-03 04:28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계기로 정적이던 김구(왼쪽 사진 앞줄 가운데)와 이승만(오른쪽 사진 맨오른쪽)은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다. 한겨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계기로 정적이던 김구(왼쪽 사진 앞줄 가운데)와 이승만(오른쪽 사진 맨오른쪽)은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다. 한겨레

역사의 앞면은 진실의 반쪽만 담고 있다. 오히려 역사의 뒷면이 종종 앞면보다 더 본질적 진실을 보여준다. 고당(古堂)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물산장려운동으로 명망을 얻었고,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서 가장 저명한 민족주의 지도자였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사령부가 처음에 내세우려던 민족의 지도자도 김일성이 아니라 조만식이었다. 이승만 박사와 백범 김구는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동지이자 적이었다. 해방 이후 테러 사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백의사’(白衣社)라는 비밀테러단체는 조만식·이승만·김구와 모두 연결돼 있었다. 이들의 네트워크는 1945년 12월을 기점으로 출현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남·북 지도자와 미군정의 ‘반탁’ 비밀접촉</font></font>

한국 현대사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최대의 사건은 단연 1945년 12월27일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었다. 한반도는 3상회의 결정을 둘러싸고 극단적인 좌우 대립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북한에서는 조만식 대 김일성, 남한에서는 이승만·김구 대 박헌영으로 상징되는 반탁·찬탁의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북한 지역 반탁의 중심은 조만식, 남한 지역 반탁의 중심은 이승만과 김구였다.

해방 전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사상적 대립은 ‘독립’이라는 단일한 목표 앞에서 이차적 문제였다. 그러나 3상회의 결정을 계기로 사상적 대립은 폭력화했고, 민족주의는 반공주의에 경도됐다. 국가 수립 문제가 해방 공간에서 사상의 문제로 치환된 것은 현대사의 근본적 비극이었다. 이른바 ‘빨갱이’는 태초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좌우 대립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 뒤 지금까지 현대사의 이념 투쟁에서 늘 사상은 간데없고 낙인만 나부끼고 있다.

해방 당시 조만식은 63살이었다. 연륜에서 34살 김일성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다. 소련군사령부는 3상회의 결정 이후 조만식을 찬탁으로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오산학교 애제자이자 김일성의 최측근인 최용건까지 보냈지만, 노투사의 반탁 노선은 굳건했다. 결국 소련군사령부는 조만식에 대한 회유를 포기하고 그를 평양의 고려호텔에 연금했다.

그러나 조만식과 북한의 민족주의 세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한의 정치세력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사실, 북한 지역의 민족주의 세력은 일찍부터 남한의 정치세력과 연결돼 있었다. 조만식 계열의 다수를 차지한 개신교 세력이 대표적이다. 1945년 12월 초에 결성된 ‘이북5도 연합노회’는 북한 교회를 대표해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남한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는 대외적 명분일 뿐, 사실은 남한 교회와 연락하고 이승만과 김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연합노회의 황은균 목사도 비밀리에 미군정과 연락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 교회의 남한 선호도와 이승만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조만식은 이미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 김구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한 김철훈 목사를 통해 이승만에게 밀서를 전달하며 연락했다. 고려호텔에 연금되기 며칠 전, 조만식은 아들 조연명에게 이승만과 김구에게 보내는 밀서를 주어 서울로 보냈다. 얼마 뒤엔 이승만이 조만식과 이윤영 앞으로 밀사를 보냈다. 그들에게서 3상회의 결정에 대한 반대 서명을 받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밀사가 돌아가는 날, 조만식의 최측근 이윤영은 그에게 이승만과 미군정청장 존 R. 하지 중장 앞으로 보내는 밀서를 들려 보냈다. 3상회의 결정을 계기로 조만식-이승만-미군정의 네크워크가 강화된 것이다.

조만식이 더 조직적인 연결망을 가지고 있던 정치세력은 김구였다. 북한 조선민주당 중앙위원 중 4명의 조만식 계열 인물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정치공작대’의 평안남도 요원이었다. 정치공작대는 1945년 12월6일 임시정부 내무부가 창설한 행동대였다. 내무부장 해공(海公) 신익희가 이끈 정치공작대는 정보 수집, 반탁운동, 대북 테러를 목적으로 창설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북파 공작의 시초</font></font>
광복 이후 한반도 문제를 놓고 소련은 ‘삼팔선 분할 점령’을 구실로 한반도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동아일보> 1945년 12월27일치 1면 기사. 한국언론진흥재단

광복 이후 한반도 문제를 놓고 소련은 ‘삼팔선 분할 점령’을 구실로 한반도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동아일보> 1945년 12월27일치 1면 기사. 한국언론진흥재단

정치공작대는 북한·남한의 면 단위까지 전국적 조직망을 구축했고, 대원은 총 358명에 달했다. 중앙본부 요원들은 주로 월남한 우익 청년단원들이었고, 이들은 동시에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도 가입해 있었다. 정치공작대는 12월28일 북한에 조직요원을 침투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조만식 계열이 정치공작대에 포섭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조만식과 이승만의 연대가 인편 접촉의 수준이었다면, 조만식과 김구의 연대는 인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공작대의 북파 임무는 반탁운동과 요인 암살이었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단체가 바로 백의사다. 정치공작대의 북파 공작은 테러단체 백의사와의 협조하에 이루어졌고, 정치공작대 중앙본부 요원 중에도 백의사 단원이 있었다.

백의사는 1945년 9~11월 염응택이 서울에서 조직한 비밀테러단체다. 염응택은 해방 전 낙양군관학교 재학 시절 김구 계열에 속해 있다가 반김구 계열로 전환한 인물이다. 그는 국민당의 비밀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를 본떠 백의사를 조직했다. 주로 20대의 월남한 반공청년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각종 테러 사건의 숨은 주역이었다.

예를 들어, 백의사의 전신인 대동단은 1945년 9월3일 평양에서 공산주의자 현준혁을 암살했고, 백의사는 1947년 7월19일 여운형 암살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백의사의 특기는 테러와 암살, 대북 첩보 수집이었다. 특히 백의사의 대북 첩보 활동은 1946년 1~9월 주한미군 정보부(G-2)와 방첩대(CIC)의 후원 아래 진행됐다.

백의사와 임시정부 정치공작대는 3상회의 결정이 알려진 직후, 북한의 주요 지도자들을 암살하기 위해 요원들을 북파했다. 이것이 ‘북파공작원’의 시초다. 정치공작대 조직반장 조중서는 백의사의 염응택과 함께 김일성 암살을 모의했다. 그들은 1946년 2월 정치공작대 요원이자 백의사 단원인 3명의 요원을 북파했다.

북파요원들은 평양시 3·1절 기념식장에서 김일성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단상 옆에서 경비 중이던 소련군 야코프 노비첸코 중위가 수류탄을 집어던져 암살에 실패하고 1명이 체포됐다. 도피에 성공한 북파요원들은 다시 3월3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최용건 자택에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이틀 뒤인 9일에는 김책 자택, 12일에는 강량욱 자택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집요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테러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최대 희생자는 백범 김구</font></font>

북파요원들의 모든 활동 거점은 조만식 계열의 조선민주당 당원들이었다. 조만식 계열은 북파요원들에게 자금·정보·은신처·협력자를 제공해 이들의 테러활동을 지원했다. 조만식은 이승만·김구·백의사와 연합해 북한 지역에서 반탁운동을 확대하고 김일성 세력에 맞서려고 구상했다. 테러 사건 이후 북한의 선전물에는 이승만 박사와 함께 늘 백범 김구가 이른바 ‘미제 괴뢰도당’의 양대 주역으로 등장한다.

북한의 선전물에서 김구에 대한 비난이 사라진 것은 1948년 4월 남북협상 이후였다. 남북협상 전, 황해도 해주시 내무서원들이 시내에 붙은 김구 비난 전단을 떼느라 꽤나 고생했다. 김구를 대신해 비난 전단에 등장한 인물은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이자 반탁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성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계기로 한반도의 정치 판도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북한과 남한의 정치세력 사이에 중층적 연결망이 형성됐다. 조만식은 반탁을 계기로 이승만, 미군정과 연대를 강화했다. 조선민주당 내 조만식 계열 중앙위원은 동시에 김구의 정치공작대 대원이었다. 김구는 정치공작대를 통해 조만식과 백의사, 이승만의 독촉국민회와 연결돼 있었다. 정치공작대 대원 중 일부는 동시에 백의사 단원이었다. 백의사는 정치공작대를 통해 김구·조만식과 연결됐고, 미군 방첩대와 연계해 활동했다.

이들에게 공동의 적은 소련과 김일성 세력이었다. 조만식은 김일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자금·정보·은신처·협력자를 제공했고, 정치공작대와 백의사는 암살대원을 북파했으며, 미군정은 이들을 후원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계기로, 조만식-이승만-김구-백의사-미군정으로 연결되는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동거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조만식은 지지세력을 월남시킨 채 고려호텔에 연금됐다가 한국전쟁 때 사망했다. 이승만은 내내 미군정청장 하지와 대립했고, 전쟁 중에는 미국에서 ‘이승만 제거 계획(Ever Ready Plan)’을 세울 만큼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4·19 혁명 이후의 역사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김구는 1946년 임시정부의 국권(國字 1·2호)을 발휘하려다 미군정과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1948년 단독선거 추진을 계기로 완전히 결별했다. 백범은 결국 해방 조국에서 국군 소위에게 암살당했다. 그 배후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해방 공간 최대의 비밀테러단체인 백의사 단장 염응택은 전쟁 직후 인민군에 잡혀 사망했다. 정치공작대 책임자 신익희는 한때 친이승만 계열의 대한국민당을 창당했으나, 1956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항해 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다. 해공은 유세 막판에 뇌내출혈로 급사했다.

이 기묘한 동거의 최대 희생자는 김구였다. 그는 해방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남한 정계에서 최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백범은 3상회의 결정을 계기로 찬탁의 진원지인 김일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대원을 북파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는 분단을 앞두고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벌일 만큼 포용적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주한미군 정보원·백의사 자살특공대, 안두희</font></font>

백범 암살 사건은 향후 반공과 독재로 점철될 현대사의 시발이었다. 암살의 내막은 2001년에 비로소 일부가 밝혀졌다. 미군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9년 6월29일에 작성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라는 문서에는 안두희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문서에 따르면, 안두희는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과 요원으로 활동했고, 우익 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자살특공대원이었다. 역사의 저편에는 아직도 수많은 판도라의 상자가 숨겨져 있다.

김선호 경희대 강사·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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