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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 근성, 국가가 키운 ‘병’

안전감 없는 한국 사회 지적한 <감정조절> 저자 정신분석가 권혜경을 만나다
등록 2016-08-23 21:50 수정 2020-05-03 04:28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냄비 근성. 한국 사람들이 여러 사회 이슈에 보이는 반응에 붙여진 수식어다. 금방 끓고, 금방 식는다. 오랫동안 열기를 보관하는 ‘뚝배기’와 비교되며 자조적으로 쓰여왔다. 우리는 왜 이렇게 금방 끓고 금방 식는가.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을 향한 반응에서 ‘냄비 근성’이 두드러졌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고작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분명 진심으로 애도하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그만하라’ ‘보상금 타내려는 거다’ 등의 말로 유가족의 마음을 후벼팠다. 사건 뒤 2년이 지난 지금 이 정서는 꽤 보편적이 됐다. 세월호 참사 못지않게 슬픈 풍경이다.

“트라우마는 대물림된다”

미국 뉴욕에서 심리치료 클리닉을 운영하는 권혜경 박사는 이 ‘냄비 근성’이 한국이라는 국가에 살면서 겪어온 수많은 역사적·사회적 사건이 만든 “병리적인 감정 조절 부재” 상태라고 설명했다. ‘냄비 근성’이라는 상황 자체가 사회적으로 축적된 ‘마음의 병’이라는 얘기다.

권혜경 박사는 미국 뉴욕대학에서 음악치료학을 전공하고 절차가 까다롭다는 뉴욕주 정신분석가 자격증을 땄다. 직간접적으로 세월호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된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2014년부터 매년 여름 한국에 들어와 정신건강 전문가를 대상으로 ‘통합적 트라우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한국에 있는 심리치료사·상담가·의사 등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그가 미국에서 공부한 ‘트라우마 치료법’을 나누는 자리다.

이에 비해 최근 펴낸 책 은 일반인을 상대로 한국인의 마음 상태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를 쉽게 설명한 책이다. 권 박사는 “트라우마가 대물림된다”고 말한다. “한국의 역사적 사건들과 문화적 측면이 사람들의 감정조절에 영향을 미쳤고, 취약한 감정조절의 결과 한국 사람들이 역사적·사회적 트라우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트라우마는 뭘까. 그건 어떻게 생긴 걸까. 8월13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인의 냄비 근성에 대해 ‘감정조절이 안 되는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했다. 한국인은 굉장히 쉽게 분노하다가 또 굉장히 쉽게 좌절한다. 이걸 계속 반복한다. 감정조절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은 그동안 일제 강점, 한국전쟁, 군부독재를 비롯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까지 수많은 역사적·사회적 사건을 겪었다. 이런 사건·사고를 겪고도 감정조절을 잘할 수 있으려면 개인적 차원에서, 집단적 차원에서 안전하다는 ‘안전감’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안전감이 없다. 예를 들어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말하면 ‘빨갱이’로 몰렸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자신의 피해를 말하는데 ‘이상한 의도를 가진 사람’으로 매도됐다. 사람이 안전감을 최상으로 느끼는 순간은 부정적 이야기를 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가 돌아오지 않는 때이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적으로 사건·사고가 일어나도 피해자가 구제되지 못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잊히는 일이 반복됐다. 피해자는 오히려 고립되는 역사가 계속됐다. 이걸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은 분노하다가 금방 좌절한다. 어차피 바뀌는 게 없다는 걸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과잉 진압이 사회의 안전감 무너뜨려”
2014년 7월, 세월호 참사가 터진 지 석 달 만에 ‘엄마부대봉사단’ 단원들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단식농성이 정치적 이익과 결부돼 있다고 주장하며 유가족을 비난하는 집회를 벌였다. 권혜경 박사의 책 <감정조절>은 한국인의 쉽게 분노하고 쉽게 좌절하는 ‘냄비 근성’이 안전감 없는 한국 사회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을유문화사 제공

2014년 7월, 세월호 참사가 터진 지 석 달 만에 ‘엄마부대봉사단’ 단원들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단식농성이 정치적 이익과 결부돼 있다고 주장하며 유가족을 비난하는 집회를 벌였다. 권혜경 박사의 책 <감정조절>은 한국인의 쉽게 분노하고 쉽게 좌절하는 ‘냄비 근성’이 안전감 없는 한국 사회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을유문화사 제공

냄비 근성이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적 징후인가.

냄비 근성이 그렇고 한의 정서도 그렇다. 한도 무기력과 분노가 결합한 우울증이다. 분노는 들끓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증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한국 와서 놀란 것이 노키즈 레스토랑, 노키즈 수영장 등 아이들을 배제하는 공간이 일상화됐다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를 참아내지 못하고, 강자들이 자기 편한 대로 시스템을 만드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집단이기주의가 더 강해진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어떻게 국민의 트라우마를 강화해온 건가.

트라우마는 예측하지 못한 경험을 했을 때 이걸 처리하는 능력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특히 좌뇌의 언어 영역을 관장하는 부분이 작동을 멈춘다. 이런 트라우마에서 회복되는 빠른 방법에 대해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 피터 레빈 박사는 몸의 자연스런 반응이 잘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진·전쟁 등 재난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싶어 하고, 알리고 싶어 하고, 돕고 싶어 한다. 이는 위기를 감지한 몸과 마음이 교감신경을 작동시켜 에너지를 방출하려는 생존 전략이다. 한국이 지나온 많은 트라우마적 사건들, 일제 강점, 한국전쟁, 독재, 세월호 참사 등에서 사람들은 그런 생존 전략을 썼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자원봉사, 진상규명 활동 등을 했다.

이런 움직임을 국가가 잘 담아서 안전하게 에너지를 해소했다면 한국 사회는 트라우마에 취약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봉쇄했다. 과잉 진압하고 언론을 이용해 피해자, 혹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고립시켰다. 이게 반복되면 사람들은 자포자기하고 무기력해진다.

공권력의 과잉 진압을 ‘스테로이드적 처방’이라고도 표현했다.

흔히 스테로이드는 만병통치약처럼 쓰인다. 사실 스테로이드는 코티졸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사용한 약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단기간에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진압하기 위해 쓴다. 코티졸이 다 빠져나가려면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이걸 기다리지 않고 장기적이고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몸의 면역체계가 무너지고 몸이 다 망가진다. 정부의 과잉 진압도 마찬가지다. 과잉 진압을 하면 순간적인 ‘위축 효과’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걸 계속 쓰면 몸의 면역 기능이 무너지는 것처럼 사회의 안전감도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그만 말할 시기를 정하는 것은 피해자”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심리치료 클리닉을 운영하는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 그는 100년이 지나도록 ‘피해자’로서 말하기를 독려받고 3대에 걸쳐 트라우마를 치유받는 유대인처럼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도 제대로 치료돼야 한다고 말
한다. 김진수 기자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심리치료 클리닉을 운영하는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 그는 100년이 지나도록 ‘피해자’로서 말하기를 독려받고 3대에 걸쳐 트라우마를 치유받는 유대인처럼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도 제대로 치료돼야 한다고 말 한다. 김진수 기자

트라우마의 ‘대물림’이라는 개념이 새롭다. 모든 트라우마가 대물림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트라우마가 대물림되나.

한 세대가 경험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다음 세대도 본보기가 없어 경험을 처리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인 경우 아이들을 잘 보살피지 못한다. 그 부모 밑에서 자랐을 때 어떻게 보살핌을 주는지 다른 경로로 배우지 못하면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자식 세대까지 대물림된다. 트라우마의 대물림을 끊으려면 아버지가 가진 상처와 내가 가진 상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 것은 아버지에게 주고 내 것만 책임지면 된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조위가 제대로 조사를 완료하지 못한 상태에서 활동이 종료됐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치유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보통 트라우마를 치유할 때 왜 이 일이 생겨났는지를 규명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역할 분담’을 해주는 게 치유자가 하는 일이다. 역할을 분담해줘야 개인이 감당할 몫이 줄어든다. 가족이나 사회라는 시스템의 잘못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당신에게 일어나는 방어기제는 당연한 것이라는 설명이 치유의 기본이다.

최근 경기도 안산 단원고의 ‘기억교실’을 지역 주민이나 같은 학교 재학생 부모들의 반대로 유가족들의 뜻과 무관하게 옮겨야 했다. 사람들은 세월호 피해자들에게 자꾸 ‘그만하라’고 말한다.

얼마 동안 이야기할지 결정하는 것은 피해자들이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을 보라. 100년이 지났지만 그들에게 아무도 ‘그만 이야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세계가 그들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해자인 독일도 지금까지 100살이 넘는 전범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기억교실을 학교 안에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단원고 학생들도 피해자다. 왜냐면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는 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를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 그걸 무조건 외면한다고 치유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억하는 것, 그걸 보는 것이 더 빨리 치유하는 길이다.

미국에서 9·11 테러 이후 쌍둥이 빌딩(세계무역센터) 자리에 다른 건물을 세우지 않았다. 호수를 만들고 기억하게 했다. 홀로코스트 추모관도 독일 베를린 도시 한가운데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음 세대가 고민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난다. 그런데 한국은 앞서 말한 트라우마적 징후들로 계속 빨리 잊으려 하고, 그것이 유가족은 물론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를 강화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회적·역사적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대물림되는 이유는 뭔가.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아서 더 영향이 크다. 직접 맞아보면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실질적으로 내 몸과 마음이 평가 도구가 된다. 남이 맞는 걸 보는 경험은 실제 아픈 것보다 투사와 상상의 가능성이 많다. 간접적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직접 경험한 것보다 늘 매 맞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가 매 맞는 아이보다 마음의 상처가 크고 트라우마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기억하는 것이 진짜 치유하는 방법”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나.

3대에 걸쳐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유대인이 부러웠다. 한국도 비슷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치유적 접근이 이뤄지지 못했다. 계속 대물림되고 있다. 내가 한국의 역사적 사건들과 문화적 측면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감정조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결하는 작업을 이번에 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트라우마 치료를 하는 본격적인 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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