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렇다, 바로 그! 이혼 위기인 부부의 사연을 재연하여 세상엔 참 희한한 인간과 이혼 사유도 많다는 것을 알려준, 1999년부터 2011년까지 장수했으며 “4주 뒤에 뵙겠습니다”나 “괜→찮↗아→요↑?”와 같은 유행어도 빵빵 터뜨렸던 프로그램.
이혼할지 말지 시청자 투표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쯤 되면 ‘이혼부부’ 아니냐. 어쨌든 이 프로그램 때문에, 부부뿐만 아니라 연인 간에도 갈등이 생기면 ‘사랑과 전쟁’이라는 말이 관용구로 쓰인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모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 다투는 것은 당연한데, 인생의 대부분을 연애하지 않고 살아온 나를 보고 누군가는 “연애 안 하니까 속 썩을 일은 없겠다”라고 해맑게 웃었다. 그럴 땐 손을 들어보게 하라! 무엇을? 백년전쟁에 버금가는 나의 우정과 전쟁 10년사(史)를.
C를 만난 것은 대학 OT에서였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금방 친해졌고 곧 단짝이 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착각인지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생 그렇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더군요, 특히 귀애하는 사람과 달라도 너무 다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르지만 서로가 좋은 C와 내가 겪은 미묘한 갈등과 심리적 밀당, 차곡차곡 쌓이는 오해, 활화산 같은 폭발, 눈물의 화해, 재회, 잠시 불꽃같던 친목질과 기나긴 냉전…. 아, 막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네. 그 어떤 크레이지 러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확신한다.
얼마 전 C와 오랜 냉전 끝에 야밤의 카톡(프사 너야? 예쁘네ㅎ)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몇인지도 모를 우정과 전쟁의 새로운 시즌을 시작했다(아마 8일 것 같다). 그리고 이 우정과 전쟁은 소문이 자자하여, 나는 신구 할아버지 같은, 우정과 전쟁 극장의 터줏대감이다. 종종 우정과 전쟁의 출연자들, 그 ‘위기의 친구들’이 달려와 신탁을 기다리는 사제들처럼 나를 우러러본다. 그러면 나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노부부처럼 홀홀 웃으면서 남의 우정에는 또 기가 막히게 조언을 해준다. 돌아서서는 또, 내 우정과 전쟁 사연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울고 소리 지르고 그보단 더 많이 웃고 그런다. 거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지 않습니까.
뭐가 이렇게 장황한고 하니, 한 인간을 사랑하여 깊이 이해하고자 하고 그러다 두 사람의 절대 메울 수 없는 차이를 확인하고 나가떨어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으로 다독이고 추스르며 관계를 이끌어가는 경험은 연애에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웬만한 그린 라이트에도 꿈쩍 않고 스스로도 그린 라이트를 켜본 일이 가물가물한 철벽인생이었고 그래서 냉소주의자이나, 인간관계에 깊이 뛰어들기를 두려워하는, 상처를 두려워해서 안전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우왕)이라는 진단도 받아봤다. 물론 그런 면이 분명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에게서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발견하면 금방 등을 돌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든 관계에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대하거나, 똑같은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100명의 사람에게 100의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고,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문법에서 너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소모되는 감정들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조절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나가떨어질 테니까.
애인과 다투고 눈물을 쏟거나, 격정적인 감정의 플로를 타는 것만큼이나, 아끼는 친구와 지지고 볶는 경험 역시 인간에 대한 많은 가르침과… 별 하나에 자아비판과… 별 하나에 자기반성… 뭐 그런 것들을 나에게 남겼다. 나는 그 경험들이 연애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보다 열등하다거나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를’ 수야 있겠지만, 그 ‘다름’이 우열의 기준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시간과 경험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내가 제법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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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