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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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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데이트는 어때요?

아뿔싸, 여기는 커플 천국이었다… 머릿속은 혼자 갈 식당 생각으로
등록 2016-03-26 14:03 수정 2020-05-02 19:28

겨울이 물러갔다. 외투가 가벼워지니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햇살이 좋은 주말 오후. 어디 갈까 고민을 했다. (이혼한) 아저씨가 혼자 갈 만한 곳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아니, 누워 고민만 했다. 봄 햇살에 취해 낮잠을 자버렸다.
새 일주일이 시작됐다. 회사에서 이 칼럼의 최다 출연자(?)인 친구를 만났다. “주말에 혼자 갈 만한 데가 없다”고 했더니 자신도 혼자 자주 간다며 “미술관에 가라”고 조언해줬다. 이 친구로 말하자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물음에 탱고 동호회를 추천해주었으며, 집 안의 아저씨 냄새 퇴치를 위해 ‘거실에 꽃을 놓아보라’는 해결책을 내주었던 적이 있다. 탱고, 꽃에 이어 미술관이라니. 이혼남 아저씨와는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지난 주말 미술관에 혼자 다녀왔다.
차를 몰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았다. 괜스레 기분도 좋았다. 미술관 건물은 꽤 근사했다. 미술관 특유의 조용하면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교양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서세옥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지나면서 ‘미술관 데이트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켄트리지 전시장에서 눈에 띄는 여성을 발견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미국 영화 보면 자연스레 이성에게 접근해서 “이 그림은 마치 ○○○처럼 보이지 않아요?’ 이러면서 말을 걸던데.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 여성은 다음 전시장에서 (남자) 일행을 만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안규철의 전시장에 도착했다. 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두꺼운 벨벳 커튼을 드리워 만든 64개의 컴컴하고 좁은 방 안으로 관객이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작품이었다. 커튼 뒤 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다행히 다른 관람객과 마주치지는 않았다. 문득 ‘여기 연인들이 몰래 뽀뽀하기 좋겠다’고 생각하고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1시간 남짓 미술관 관람을 마쳤다. 밖으로 나와 하나 남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사러 정독도서관 쪽으로 걸었다. 아뿔싸. 여긴 커플 천국이었다. 담배를 사고 서둘러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미술관에도 커플은 많았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미술관 외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미술관 데이트를 상상해봤다. 우선 (아직 만나지 못한) 그녀의 집 근처로 차를 타고 간다. 그녀를 태우고 미술관에 도착한다. 대중교통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쨌든 미술관에서 같이 그림을 본다. 미국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림에 대한 농담을 한다. 마주 보고 웃는다. 미술관에서 걷는 게 은근히 피곤하다. 미술관 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좋겠다. 배가 고파지면 밥도 먹어야 할 텐데. (여자들은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니까) 근처 맛집을 미리 검색해보는 게 좋겠다. 밥까지 먹고 나면 뭐하지.

미술관 데이트 뒤엔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게 좋겠다. 이혼남

미술관 데이트 뒤엔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게 좋겠다. 이혼남

상상은 여기까지였다. 밥 생각을 하다보니 내가 밥을 안 먹은 게 생각났다. 이제 머릿속은 미술관 데이트가 아니라 혼자 갈 만한 식당 리스트로 가득 찼다. 내키는 데가 없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 쇠고기미역국을 끓여 먹었다. 봄 햇살이 힘을 잃을 무렵 먹는 그날의 첫 끼였다. 갑자기 삼청동 골목골목을 걸어다니며 데이트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혼한 아내와도 갔던가. 모르겠다. 미역국은 은근히 맛있었다.

이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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