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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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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월 견디게 한 그 선율

‘유서 대필 사건’ 무죄 확정 받은 강기훈이 클래식 기타 잡은 ‘진실의힘’ 연주회. 유신으로 돌아간 듯한 오늘 잊게 하는 정겨운 앙상블
등록 2015-11-19 18:18 수정 2020-05-03 04:28
11월6일 서울 창덕궁 인근 은덕문화원에서 열린 ‘조그만 음악회’에서 강기훈(오른쪽 두 번째)씨가 클래식 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연주자들은 영화 배경음악과 클래식을 넘나들며 여러 곡을 연주했다. 이채훈

11월6일 서울 창덕궁 인근 은덕문화원에서 열린 ‘조그만 음악회’에서 강기훈(오른쪽 두 번째)씨가 클래식 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연주자들은 영화 배경음악과 클래식을 넘나들며 여러 곡을 연주했다. 이채훈

차가운 빗방울이 낙엽을 적시던 11월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창덕궁 옆 은덕문화원에서 (재)진실의힘이 마련한 ‘조그만 음악회’가 열렸다. 젊은 음악 친구들에 둘러싸여 열심히 기타를 연주하는 강기훈, 그의 얼굴에는 시름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음악할 때는 온전한 내 시간”

강기훈. ‘유서 대필’이란 황당한 거짓 혐의를 벗고 올해 5월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무려 24년이 걸렸다. 1991년 봄, 전투경찰이 명지대생 강경대군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화 요구는 잇따른 분신 항거로 이어졌다. “죽음의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짓 선동과 함께 강기훈을 희생양 삼아 민주화 요구를 잠재우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친구 김기설의 분신을 부추기며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는 어처구니없는 혐의. 27살 청년 강기훈은 무죄를 밝히려고 법정에 출두했지만 거짓의 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검찰, 법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그리고 언론. 무고한 젊은이의 일생을 망가뜨린 범죄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단 한 명도 사과하지 않았다.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을 비롯한 조작의 주역들은 오히려 청와대와 국회의 요직에서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들의 거짓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장난 LP처럼 되풀이되는 종북몰이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펼침막에서, 우리는 강기훈을 짓밟은 파렴치한의 얼굴을 데자뷔처럼 떠올린다.

리허설이 끝난 뒤, 강기훈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무죄가 확정됐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답답하구나, 이거 하려고 오랜 세월 기다렸나, 하는 회한도 들었어요. 하지만 음악을 하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제 시간이에요. 나머지 시간은 제 시간이 아닌 것 같고….”

긴 세월이었다. 인생을 망가뜨려놓고 거짓을 진실이라 우기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일주일에 최소 2번 야근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월화수목금금금, 죽어라고 일만 했다. 빠듯한 생계 때문이었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잊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무죄 확정 이후 인터뷰하기 싫어서 전화기를 꺼놓고 피해다녔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때, 기타를 꺼내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를 고운 선율로 어루만져준 오랜 벗이었다.

“(음악을) 혼자 하는 것도 좋지만, 관악기·현악기 여럿이 함께 어우러지며 이따금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할 때, 그 순간순간들이 참 좋아요.”

첫 곡은 영화 주제곡. “영화에서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우편배달부는 자전거를 타고 바다로 탁 트인 언덕길을 달립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편지를 기다리고요. 이 음악은 누구의 마음을 표현한 걸까요? 그리운 조국의 소식을 기다리는 네루다일까요, 아니면 위대한 시인을 만나러 가는 우편배달부의 마음일까요? 어느 경우든 설레기는 마찬가지겠죠.”

막걸리 한 순배 돌고 열린 진짜 음악회

진실의힘 간사 이사랑씨의 맛깔스런 해설에 이어 강기훈(기타)·정현아(피아노)·서하진(첼로)·이서연(플루트)·이한솔(오보에)·박세범(클라리넷)의 정겨운 앙상블이 80명 청중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은혜공동체의 음악감독 정현아는 벌써 세 번째 강기훈과 호흡을 맞춘다고 했다. “바빠서 부담이 되긴 했지만 꼭 함께하고 싶었어요. 음악 얘기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즐겁게 준비했는데, 오늘 이 순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오보에 실력이 프로급인 이한솔은 카이스트에서 생명과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누군가의 인생 드라마 한 장면에 조연처럼 출연하는 기분이 드는데 그 느낌이 싫지 않고 오히려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강(기훈) 선생님의 나무처럼 따뜻한 기타 소리가 참 좋았어요.”

앙상블의 막내인 서하진은 취미로 익힌 첼로로 서울대 오케스트라에 참여하고 있다. “91년은 제가 태어나기 전이라 강기훈 선생님에 대해 몰랐고, 연습하면서 조금 긴장이 된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편안했어요.”

드뷔시의 , 엔니오 모리코네의 , 피아졸라의 과 , 영화 주제곡…. 50살을 넘긴 강기훈, 그리고 순박했던 24년 전 강기훈을 닮은 젊은이들이 눈빛과 미소와 마음을 주고받았다.

앙코르로 를 다시 연주한 뒤 진실의힘 사무실에서 뒤풀이가 이어졌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긴장된 공식 연주회가 끝나고 뒤풀이에서 막걸리가 한 순배 돌면 진짜 볼 만한 음악회가 열리는 법이다. 강기훈은 와 을 거침없이 연주했고, 이한솔은 와 마르첼로 협주곡을 멋지게 불어젖혔다. 다음 연주회에서 마르첼로를 제대로 해보자는 다짐도 빠지지 않았다.

어두운 시절이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박동운 진실의힘 이사장은 “유신이나 5·6공으로 돌아간 것처럼 어수선한 시절이고, 나도 재판에서 소멸시효 관계로 보상이 기각돼서 여러모로 착잡하다”고 심경을 밝힌 뒤, “강기훈씨가 옷에 묻은 먼지 털듯 오랜 병고를 툭툭 털고 완치돼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덜 날라리처럼 살아봐야겠네”

속마음 털어놓기를 꺼리는 강기훈도 입을 열었다. “앞으로 좀더 잘 살아야겠네, 날라리지만 약간 덜 날라리처럼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호른을 전공하는 딸 해원도 밝은 웃음으로 함께했다. 아버지 강기훈을 닮아서 입이 무거운 해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오래오래 즐겁게 살자!”

우리 모두를 위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거짓이 진실을 질식시킬 듯한 오늘, 우리는 모두 강기훈이다. 음악이 있고, 마음이 있고, 진실이 폭력보다 강하다는 신념이 살아 있기에 강기훈은 웃을 수 있다.

이채훈 음악 칼럼니스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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