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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두 편

영화의 젠더 편향성 측정하는 ‘벡델 테스트’ 올해 한국 영화 흥행 상위 10편 분석해보니… <암살>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만 통과
등록 2015-10-29 22:02 수정 2020-05-03 04:28
영화 <암살>의 안옥윤(전지현)과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의 화연(이연희). 각 제작사 제공

영화 <암살>의 안옥윤(전지현)과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의 화연(이연희). 각 제작사 제공

‘벡델 테스트를 아시나요?’ 2013년 기자가 쓴 영화 기사의 첫 문장이다. 2년 전만 해도 국내에 생소했던 벡델 테스트지만 지금은 꽤 알려졌다. 영화 속 ‘성평등 지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하는 데 활용된다.
미국의 유명 만화작가 앨리슨 벡델(그는 남성이다)은 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이 어느 정도 구실을 하는지 계량화할 방법을 궁리했다. 방법은 벡델이 1985년 그린 만화 (Dykes to Watch Out For·경계해야 할 동성애자들)에 잘 설명돼 있다. 만화에 등장하는 두 친구는 다음 조건을 통과하는 영화만 보기로 한다. 첫째,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둘 이상 등장하는가. 둘째,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셋째, 이들의 대화에 남성 등장인물과 관련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가. 이 세 가지가 그대로 ‘벡델 테스트’의 기준이 됐다. 벡델 테스트가 엄밀한 통계나 과학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 남성 편향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벡델이 고민했던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 통계는 여성에 대한 ‘젠더’ 개념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영화는 어떨까? 올해 관객이 가장 많이 든 영화 10편을 벡델 테스트 해봤다. _편집자

벡델 테스트가 등장한 게 꼭 30년 전이다. 당시 앨리슨 벡델은 세 가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예로 외계 괴수 소재의 영화 (1979년·리들리 스콧 감독)을 든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램버트(베로니카 캣라이트)가 리플리(시거니 위버)를 향해 “에이리언이 우주선으로 들어오도록 해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한 것이냐”는 말을 주고받아 간단히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 벡델은 “두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대화 내용은 (남성이 아닌) 괴물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요즘 여성 캐릭터의 처지는 36년 전 외계 괴수 영화보다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21년 만에 영화 속 여성 존재감 ‘최저’

지난 3월 데이터 분석업체인 ‘실크’(Silk)가 2010~2014년 개봉한 외국 영화 1500여 편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난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는 44.6%였다. 1994년(47.6%) 이후 2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이 가운데 이름이 있는 여성 인물이 한 명 이하인 영화가 4.6%였다. 2010년엔 그 비중이 11.1%에 이르기도 했다. 또 여성 인물들 사이에 대화가 없는 영화의 비중은 25.1%에 달했다. 영화 10편 가운데 두어 편꼴로 여성 인물들끼리 대화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비중은 2002년(29.1%) 이후 가장 높았다. 여성 인물들끼리 대사가 있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남성과 관련되지 않았던 영화의 비중은 14.9%에 불과했다.

올해 개봉작의 경우, ‘벡델테스트닷컴’(bechdeltest.com)이 분석한 외화 121편 가운데 47편(38.9%)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벡델테스트닷컴은 주요 개봉 영화의 벡델 테스트 통과 여부를 평가하고, 누리꾼들이 댓글로 원인을 자유롭게 분석하는 영화 관련 누리집이다. 불합격 영화의 면면은 다양하다. 스타 배우 톰 크루즈 주연의 액션물 이나, 인공지능 여성 로봇을 주인공으로 ‘인간보다 섹시하다’는 카피로 홍보에 나섰던 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나 같은 어린이 애니메이션도 불합격 명단에 포함됐다. 반면 성인 액션물의 전형인 (Furious 7)이나 인간 내면의 네 가지 감성을 의인화한 애니메이션 은 합격 판정을 받았다.

우리 영화의 ‘벡델 테스트’ 성적표는 어떨까?

올해 한국 영화 흥행 상위 10편(2015년 10월23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관객 수 기준)에 벡델 테스트를 적용해봤다. 한국영상자료원과 영화 제작사를 통해 확보한 시나리오를 분석했다. 2013년 관객 수 1~5위 영화인 (1281만 명), (716만 명), (695만 명), (468만 명), (389만 명) 가운데 벡델 테스트의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킨 영화는 없었다.

흥행 1위 벡델 테스트 통과 못해

올해 개봉한 영화 가운데는 1340만(관객 수 2위) 관객을 동원한 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영화에는 미스 봉(장윤주), 다혜(유인영), 주연(진경)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구실은 극히 제한적이다. 110여 쪽에 이르는 시나리오에서 여성 인물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두 문장뿐이다. “언니, 손님 찾아오셨어요”(주연 동료), “손님?”(주연). 강인한 남성성이 강조되는 누아르 장르 영화들이 벡델 테스트에 불리한 면도 있다.

비슷한 장르인 (219만 명·10위)의 상황은 더 나쁘다. 강선혜(설현), 주소정(이연두), 점순(김유연) 등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여성 인물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아예 없다. 남성 인물 없이는 이야기 전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여성들은 독자적 성격을 갖지 못한 채 남자 주인공의 여자친구이거나 ‘강남 복부인’ 같은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벡델이 (219만 명·9위)나 (604만 명·5위)을 봤다면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지 모르겠다.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경찰 이야기를 다룬 에는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한 명도 없다. 인물은 ‘최 반장 아내’ ‘여경 1·2’ ‘동네 주민 여’ ‘교통상황실 여직원’ 등으로 설정된다. 60쪽짜리 시나리오에서 여성 등장인물의 대사는 10문장에 불과하다. 내용도 “어머 어떡해”(여성 2), “네, 아직 확인 중입니다”(여경), “아니, 평생 안 그러던 사람이 왜 그래요?”(최 반장 아내) 같은 것들이다.

2002년 남북 간 해상 교전을 영화화한 에도 이름을 가진 여성은 ‘김지선’(천민희) 한 명만 등장한다. 아동 유괴를 소재로 한 (286만 명·8위)는 주요 배역과의 관계로 여성 인물의 이름을 설정한 경우다. 유괴 피해 어린이 ‘은주’를 중심으로 여성들은 은주 엄마(이정은), 은주 고모(장영남), 김중산 아내(진선미), 애기무당(신유경)으로만 불렸다. 세 영화는 모두 벡델 테스트를 1단계도 넘지 못했다.

(621만 명·4위)는 역사를 다룬 영화답게 혜경궁 홍씨(문근영), 영빈(전혜진), 인원왕후(김해숙), 화완옹주(진지희), 내인 문소원(박소담) 등 실존 여성 인물들로서의 지위가 분명했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아들 사도세자(유아인) 사이의 비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탓에 여성들끼리 이야기하는 경우를 찾기 어려웠다. 화완옹주가 어머니 영빈과의 대화에서 “어머니는 속도 좋소. 그것이 무슨 조화를 부리길래 아버지가 홀딱 빠져 계실꼬? 손만 잡고 잔다던데, 손에 금테를 둘렀나”라고 말하는 식이다. 개발시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1425만 명·1위)이나 청춘 남녀의 성장기를 다룬 (304만 명·7위)은 벡델 테스트 2단계에서 멈췄지만, 여성 인물들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이끌었다.

속 왕비·왕후도 들러리일 뿐
올해 국내에 개봉된 <연평해전>(가운데)과 <악의 연대기>에는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두 명을 넘지 않았다. 각 제작사 제공

올해 국내에 개봉된 <연평해전>(가운데)과 <악의 연대기>에는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두 명을 넘지 않았다. 각 제작사 제공

반면 과 은 벡델 테스트의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켰다. 은 전작 ‘각시투구꽃의 비밀’ 편에서 여주인공 한객주(한지민)에 이어 다시 여성 인물 화연(이연희)과 소녀 다해(이채연)의 관계를 이야기의 뼈대로 활용했다. 특히 “노비의 자식들은 손톱을 깎아본 적이 없습니다. 손톱은 길기도 전에 흙바닥에 닳아버리고, 발톱은 채 자라기도 전에 멍들어 빠져버리기 일쑤니까요”라는 화연의 대사에 약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도 아네모네 마담(김해숙)과 친일파 암살 계획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벡델 테스트의 조건을 채운다. 여성 인물들을 이야기의 중심축에 둔 이들 영화는 각각 관객 387만 명(6위), 1270만 명(3위)을 동원해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

벡델 테스트의 기준이 내키지 않는다면 조금 다른 기준을 적용해볼 수 있다. ‘마코 모리 테스트’(Mako Mori Test)란 게 있다. 마코 모리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2013년)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일본 배우 기쿠치 린코가 연기했다. 일본 다케시마현에서 태어난 마코는 어릴 적 우주에서 온 카이주(괴수)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는다. 마코는 범태평양방위군 소속 군인이 된다. 이후 초대형 로봇 ‘예거’의 조종사로 성장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카이주를 무찌른다.

테스트 방법은 영화 속 마코의 상황을 적용하면 된다. 영화에 ①적어도 한 명의 여성 캐릭터가 있을 것 ②그에게 ‘자기 이야기’가 있을 것 ③그 이야기가 남성 캐릭터를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 것. 앞선 국내 영화 10편을 ‘마코 모리 테스트’에 적용하면 정도가 통과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섹시한 램프 테스트나 타우리엘 테스트, 엘런 윌리스 테스트라는 것으로도 영화 속 여성의 비중을 평가해볼 수 있다. 섹시한 램프 테스트는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자리에 ‘예쁜 전등’을 둔다고 가정한다. 여성 인물이 들러리 구실만 하면서, 영화의 본질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않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타우리엘 테스트는 영화 에 등장하는 여성 엘프 전사 ‘타우리엘’(에반젤린 릴리)에서 가져왔다. 여성 인물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는지를 본다. 엘런 윌리스 테스트는 캐릭터들의 성별을 바꿔도 영화 전개가 어색하지 않은지를 테스트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성별에 따라 각각 어떤 역할이 주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남성중심적 성역할이 흥행코드 되고 있다”
1979년 제작된 영화 <에이리언>에서 우주 화물선 ‘노스트로모’호의 승무원 엘렌 리플리(시거니 위버·위)는 또 다른 여승무원 램버트와 우주 괴수 에이리언에 맞선다. 앨리슨 벡델은 <에이리언>을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의 예로 들었다. imdb.com 누리집

1979년 제작된 영화 <에이리언>에서 우주 화물선 ‘노스트로모’호의 승무원 엘렌 리플리(시거니 위버·위)는 또 다른 여승무원 램버트와 우주 괴수 에이리언에 맞선다. 앨리슨 벡델은 <에이리언>을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의 예로 들었다. imdb.com 누리집

이들 테스트는 여성이 영화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이런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가 꼭 여성성을 해친다는 뜻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 세상에는 남성과 여성이 대략 절반쯤 공존하고 있다. 영화 속 현실은 왜 그렇지 않을까?

2013년 미국의 비영리 시민학교 운영자 콜린 스토크스는 벡델 테스트를 소재로 한 강연에서 “영화 에서 여주인공은 우주를 구한 영웅을 기다렸다가 메달과 윙크로 보답한다. 레이아 공주(의 여성 캐릭터)한테서 실제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현실 세상에서 필요한 정보를 배울 순 없다”고 설명한 바 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명지대 교수)은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 중심적 성역할이 영화의 흥행 코드가 되는 경향은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관객들의 무의식이 남성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영화 제작사는 이런 점을 활용해 남성 중심 영화로 다시 흥행 코드를 쓰는 방식을 반복하는 것이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인데, 영화 세계에서 ‘남성 편향성’이 대중의 무의식에 성역할을 고착화하는 게 아닌지 환기할 필요가 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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