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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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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이 일상 인정은 덤

대화와 협상의 기술을 시험하며 세상과 섞이는 공간… 한국과 프랑스의 재래시장에서 겪은 문화 작동 방식
등록 2015-10-29 12:22 수정 2020-05-02 19:28
재래시장의 어수선함과 소란스러움은 그곳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한국의 시장(윗쪽)도, 프랑스의 시장도 제각각의 작동 원리로 움직이며 사람과 세상을 엮는다. 이나라

재래시장의 어수선함과 소란스러움은 그곳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한국의 시장(윗쪽)도, 프랑스의 시장도 제각각의 작동 원리로 움직이며 사람과 세상을 엮는다. 이나라

사는 곳 지척 거리에 활기를 잃지 않은 재래시장이 있다. 천장이 있는, 골목에 가까운 전통시장이 있고 그 옆 골목에도 채소가게, 정육점, 김밥과 국수가게, 생선가게, 노점상 거리가 연달아 생겨 구역 전체가 시장거리라 할 만하다. 동네에 몇십 년씩 거주하던 이들만이 아니라 새로 이사 온 젊은 커플이나 학생도 적지 않게 시장 거리를 지난다. 이곳에는 거대한 마켓에서 반복적으로 울려퍼지는 스피커 안내방송, “고객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지금 이 시간부터 정육 코너에서 전단지에 예고된 할인 행사를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이 없다. 안내방송이 없더라도 이곳은 소란스럽다. 바쁘게 장을 보는 아주머니, 조그만 장바구니를 들고 이곳저곳 탐색에 열을 올리는 젊은 처자, 상인들의 ‘특가’와 ‘떨이’ 외침, 농담하는 상인, 떼쓰는 손님, 그 사이로 지나가겠다고 조금씩 전진하는 사륜자동차가 뒤섞여 있다.

재래시장에서 최신의 물건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재래시장에는 낡은 물건이나 값싼 물건, 구수한 정감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사람이 더 흔하다. 그러나 따듯하고 순수한 정감을 기대하고 시장에 왔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경험할 수 있다. 단감이 한창인 요즘 재미난 구경거리를 찾아 재래시장에 들른 순진한 관광객은 시장 입구에서 이를 간파한 장사치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떫기만 한 단감 한 바구니를 사들고 올지도 모른다. 빨간 소쿠리에 담긴 브로콜리를 꼼꼼하게 만지는 젊은 손님에게 성질 급한 점원은 신경질을 내기도 한다. 줄지어선 손님들 앞에서 빠른 손길로 삼치 네 마리의 배를 가르는 가게 주인은 “조림용? 구이용?”이라고 묻는다. 우물쭈물하다 두 마리는 조림용, 두 마리는 구이용으로 해주시면 안 되느냐 상냥하게 되묻지만 가게 주인은 그런 법 없다고 퇴짜를 놓는다. 저 앞의 아주머니는 둘 둘 나눠서 해달라고 퉁명하게 말하니 군말 않고 해주더니, 공손한 요청보다 박력 있는 요구가 더 잘 통한다. 봄나물 요리하는 법을 물으면 맛깔나게 설명해주는 상인도 있지만 카드 결제를 비롯해 매사에 퉁명스러운 상인도 있다.

공손함보다 박력이 통하는 곳

그래서 재래시장 사용법은 그리 명료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시장에선 요청이든 요구이든, 협상이든 사정이든 서로 말을 ‘섞어야’ 한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외 웹사이트에서 직접 구매를 하는 시대에 잘 적응한 사람일수록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재래시장의 사용법에 불편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효율적인 ‘품질관리’와 운영체계를 갖춘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대형매장에서 우리는 판매자의 성격과 기분, 심성을 눈치와 경험으로 파악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판매자의 평점, 물건의 가격을 비교하고, 배송 기간을 체크하며 AS센터 직원의 환불 서비스 품질을 평가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앞서 말했듯 시장에선 소란이 일상이다. 대형마트에서도 싸움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입점한 조미료 경쟁회사 판촉사원들이 신경전을 벌인 일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마트 ‘고객’과 노동자는 싸우지 않는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한 고객이 화가 나면 매장 매니저가 뛰어와 불만을 표하는 고객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태를 해결하려 들 것이다. ‘진상’ 고객이라면 매니저가 나타나지 않는 사이 계속 분풀이를 할 것이다.

대형매장의 소란을 우리는 ‘갑의 횡포’라 부른다. 반면 싸움 소리를 포함해 시장의 소란스러움은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상대방의 가격이나 선전 방식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는 상인과 상인 사이의 싸움, 돈을 치르는 손님과 주인장 사이에 시비가 이는 일은 시장에서 좀더 일상적이다.

생선가게 총각은 말과 덤의 기술자

어느 날 과일가게 앞에 1만원짜리 지폐를 준 것이 틀림없고, 거스름돈을 올바로 받지 못했다고 고함을 지르는 할머니가 있었다. 가게 주인의 고함 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이 할머니는 아까 저쪽 생선가게에서도 처음 이야기한 가격과 다른 가격이라고 가게 총각에게 화를 냈다. 오늘 몸도 기분도 영 좋지 않았던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할머니의 성깔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사거리 생선가게 총각은 달랐다. 노련하고 넉살 좋은 생선가게 총각은 할머니에게 반말인지 아닌지 애매한 말투로 사과를 하며 조개 한 뭉치까지 덤으로 준다. “어머님, 뭐가 잘못됐어? 응, 그래? 내가 미안하고, 내가 이것도 줄게.” 지나는 사람이 다 들으라고 큰 소리를 내며 검정 봉지에 조개를 쫙 들이붓는다.

총각이 들이부은 ‘덤’은 지폐가 매개하는 교환가치 이상의 ‘인정’(人情)일 수도 있다. 왁자지껄한 전통시장을 인간미 넘치는 공간으로 상상하는 이들은 시장의 인정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덤을 주었던 총각은 재빠르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도 했다. 곧 시장이 파할 때면 어차피 떨이로 팔 물건이니, 처음이 아닌 할머니의 소란을 말로 어르고 덤으로 가게 인심도 잠깐 자랑하는 편이 낫다. 생선가게 총각은 인정을 전시하지 않았다. 총각은 말과 덤의 기술자다. 총각의 기술은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을 상대하는 노련한 장사의 기술이자 일상의 사교술이다.

사교술의 핵심은 우회화법이다. 퉁명스럽게 말로 충돌하기보다 말을 슬쩍 돌리되, 말 속에 힌트를 담는다. 사교술의 목표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관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재래시장에서 우리는 거래의 셈법을 무시하는 순수한 인정의 서사 이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재래시장은 아직 나와 타자가 갑과 을이 되어 대결하는 대신 교묘하게 대화하고 협상하는 기술을 시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설탕은 어디 있는 거지?

파리에서 공부하던 시절, 특히 말이 서툴던 유학 초기에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슈퍼마켓이 제일 편리했다. 창고형 대형매장이 거의 없는 파리 시내에는 한국보다 훨씬 이른 저녁 8시 무렵, 가장 늦어야 밤 10시에 문을 닫는 슈퍼마켓 체인이 몇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전 지구적 표준 라이프스타일이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깨닫는다. 어느 누구의 참견 없이 물건을 한참 들여다보고, 골라 카트에 담고, 계산대 벨트 위에 올리면 된다.

그러나 표준화된 마켓에서도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일들은 일어난다. 한번은 설탕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전분, 소금, 식초와 식용유 옆 선반에 있어야 할 설탕은 프랑스 슈퍼마켓에선 한참 떨어진 제빵용품 코너 밀가루와 아몬드가루, 베이킹파우더 옆에 있었다. 단맛과 짠맛을 하나의 요리 안에 잘 섞지 않는 프랑스에서 설탕은 기본 양념이 아니니 소금이나 식초 등등과 한곳에 배치되지 않는다.

가지가지의 토마토나 감자를 볼 때도 난감했다. 프랑스 요리에서 토마토는 한국 요리에서 간장의 역할에 비유할 만하다. 여러 요리에 기본 베이스로 토마토소스를 사용하는 프랑스 슈퍼 선반에는 국간장, 양조간장, 진간장 여러 상표와 이름의 간장처럼 다양한 토마토와 토마토소스가 있다. 살이 단단해서 척척 썰어 샐러드에 넣을 수 있는 길쭉한 모양의 토마토, 소스 만들기에 좋은 무르고 달큰한 토마토, 꼭 주렁주렁 덩굴 채 파는 토마토가 있다. 노란색·초록색 등 색을 달리하는 소수 품종 토마토도 슈퍼마켓 채소 코너 양배추, 당근, 감자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채소의 정체성을 지닌 토마토는 프랑스에서 설탕 뿌린 간식이 될 리 만무하다. 프랑스 슈퍼마켓 선반에서 원하는 물건을 발견하고 물건의 배치도를 기억하는 일은 프랑스 문화의 작동 방식을 학습하는 일이기도 했다.

외국어가 조금 덜 불편해졌을 때 시장에 갔다. 상설시장이 드문 파리에는 대신 이곳저곳에 매주 두 번 정도 오전 나절 장이 선다. 제3세계의 공장이 찍어낸 값싼 가정용품 스탠드의 물건 목록은 우리 동네 시장골목 잡화상의 물건 목록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제철 과일을 가득 쌓아둔 가판대 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비닐봉지 안에 과일을 골라 담는 풍경 역시 한국 시장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반면 적어도 수십 가지의 치즈를 파는 상인과 소박한 제철 꽃을 파는 상인이 어지간한 시장이면 꼭 있다.

이를 제외하고도 프랑스 시장에는 한국 시장과 다른 점이 있다. 주로 북아프리카 출신 상인들이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운송해온 저렴한 과일과 채소를 파는 스탠드에서 물건을 살 때는 스탠드 주위에 바싹 붙어야 한다. 물건을 비닐봉지에 손수 골라 담은 뒤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는 상인의 이목을 재빨리 잡아끌어야 값을 치르고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최소한 20% 정도 더 고가의 유기농 농산물을 파는 스탠드나, 유기농이 아니어도 좀더 손질된 과일이나 채소를 파는 스탠드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한쪽 옆으로 줄을 서야 한다.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구매자는 상인에게 자기가 구매하려는 채소나 과일의 이름과 원하는 양을 말한다. 상인은 용도와 소비 시기를 묻고 알맞은 상품을 골라준다. 줄을 서라거나 물건을 만지지 말라는 푯말은 어디에도 없지만 응당 그래왔던 대로, 시장의 암묵적인 규칙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다. 같은 시장 안에서 옆 사람을 조금씩 밀치고 스탠드 위의 사과를 이리저리 밀치기도 하는 상점과 구매자 하나하나가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상인의 ‘지도’를 받는 상점은 제각각의 상징성과 작동 원리를 갖춘 채 공존한다.

마술 같은 재료 사용법을 들어보라

프랑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던 시절 나는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호박이나 오이 같은 채소만 구매하면서 그 옆에 있던 생전 처음 보는 채소들의 맛과 쓰임, 정체를 알지 못해 답답했었다. 일요일 아침 한참 줄을 서야 하는 장터 채소 스탠드에서 장을 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가끔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채소를 가리키며 무슨 맛인지,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매일 채소를 다루는 상인은 공중파에 출연하는 일류 요리사만큼 명료하고 드라마틱하게 설명을 해주곤 했다. 그는 초록색 라임이 내는 맛의 마술을 설명하며 자부심에 넘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우리 동네 시장 상인 역시 봄나물을 요리하는 긴 과정을 설명하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인정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기술과 자부심, 생기 역시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시장에서 예외적인 상황을 겪으며 당황하거나 불신을 배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시장에서 우리는 뒤섞여 만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거의 예외 없이 세상을 배우고 성장하지 않는가?

이나라 이미지문화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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