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콜록.”
오명으로 호명당한 사람이 아팠다. 누군가의 모진 소리를 들어서는 아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보니 몸이 신호를 보낸다. 매주 월화수목은 인권재단 사람에서 일하고, 금요일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 나가고, 시시때때로 ‘한국 HIV/AIDS 감염인 연합회 KNP+’ 일을 한다. 살다가 살다가 너무 열심히 살다가 찍혔다. 공영방송 KBS 이사인 조우석 주필이 지난 10월8일 바른사회시민회의 등이 주최한 ‘동성애·동성혼 문제, 어떻게 봐야 하나’ 토론회에서 정욜(37)씨를 동성애와 좌파의 연결고리로 지목했다. “더러운 좌파” 운운한 발제는 옮기기도 민망해 원문을 인용하진 않는다. 다만 “바빠서 분노도 밀어내야 할 판”이라는 정욜씨의 감상을 전한다.
점차 개인을 향하는 혐오“얼마나 자극적이에요. 통진당(통합진보당)에 동성애에 심지어 에이즈 환자와 살았어. 열심히 해서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그들의 의도에 적합해서 간택받은 거죠.” 그렇게 그는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다. 통합진보당·동성애·에이즈. 독재정권 시절이라면 빨간 줄이 세 개고, 나치 수용소라면 분홍별 세 개는 달았을 운명이다. 지난 10월8일 토론회에 잠입 취재한 게이 후배가 사실을 알렸을 때, 그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혐오가 점점 개인을 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해서 ‘괜찮다’고 했지만 속으로 많이 끓었어요.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거나 영화로 찍은 건, 사회와 소통하는 각색의 주체가 저였기 때문에 전혀 다르죠.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되는 게 놀라워요.” 침묵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을 침묵으로 남겨둘 자유가 점점 위협받고 있다. “기사가 났던 날, 밤 10시에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주무실 시간인데, ‘혹시 안 거 아냐?’ 싶었죠. 한참 망설이다 신호음이 끝날 때쯤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 밝은 목소리로 ‘고구마를 캐왔는데 맛있으니 가져가’란 거예요. 가슴을 쓸어내렸죠.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데, 그 기사만 보면 행복한 게 아니잖아요.”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런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빵을 배워서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대학에선 일어일문과를 다녔고, 4학년 때 학원을 다니며 제빵 기술을 배웠다. 2003년의 일이다. 그가 “현석이”라고 부르는 청소년 동성애자 육우당이 유서를 남기고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사무실 안 문고리에 목을 매어 숨졌다. “아, 나는 안 되나보다.” 당시 동인련 대표였던 정욜씨는 맡겨진 소임에서 달아나지 못했다. “저는 빚을 청산하고 있는 거예요.” 육우당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지난 10여 년 동안 청소년 성소수자 이슈를 열심히 챙겼다. 운명처럼 지난해 한국 최초로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띵동’을 활동가들과 같이 만들었다.
가브리엘은 ‘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로 이름을 바꾼 동인련에서 가장 친했던 형이다. 이태원에 클럽이 오픈하면 좋아하는 보세옷을 입고 함께 갔다. 물론 인권모임도 함께했다. 그랬던 형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우리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일 때문에 바쁜가” 궁금했다. 그러다 병원에서 가브리엘을 다시 만났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가브리엘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2002년 무렵이었다.
“그때는 빨리 수업을 마치고 병원에 형이 먹고 싶은 음식을 사가서 함께 먹고 오는 게 일과였죠.” 그렇게 HIV 감염인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2004년 만들어진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에 참여했다. 나누리+ 초기 모임은 육우당 사망을 계기로 마련한 동인련 사무실에서 자주 열렸다. 에이즈 인권운동을 하면서 한때 감염인 애인을 만나기도 했다.
내 동생, 육우당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성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인 청소년과 감염인, 그의 마음이 향하는 이들이다. 그에게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라고 하자 “가장 인권적인 분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성소수자 인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청소년과 감염인 인권이고, 그것이 풀려야 다른 문제도 풀린다”고 말했다. 급진적이든 인권적이든 실은 소소하고, 답답한 과정의 연속이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암담한 상황에 한없이 귀기울여야 하고, 감염인들과 이것이 왜 인권의 문제인지 끝없이 대화해야 한다. 거리에서 거창한 캠페인을 하기보다는 병원을 끝없이 들락거리며 싸워야 하는 일이다. 힘없는 자들이 힘을 갖게 되는 자력화, 그가 하고 싶었고 해온 일이다. “답답한 과정을 어떻게 버티냐”는 질문에 그는 KNP+가 하는 ‘감염인 사랑방’ 모금 캠페인을 예로 들었다.
“모금에 대해서 토론하면 별로 말씀하시는 (감염인) 분이 없어요. 잘 모르는 분야니까요. 그런데 후원의 밤에 어떤 음식을 할까를 놓고는 30분 넘게 토론해요. 갈비냐 탕수육이냐를 놓고. 저는 그게 좋아요.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이분들이 아는 정보를 가지고 열심히 토론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가장 완벽한 7가지 종류의 뷔페를 만들기로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지금은 음식이지만 나중엔 인권 문제로 이렇게 토론할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가장 소외된 곳으로 간 덕분에 가장 진실한 얘기를 들었다. 귀하디귀한 ‘사람책’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성소수자운동을 통해 성장했다. 지난 10여 년 성소수자운동은 한국에서 예외적으로 성장하는 운동이었다. 성소수자운동에서 시작한 그가 동성애와 좌파의 연결고리가 된 과정은 이렇다. 1997년 우연히 대학에서 대자보를 보았다. 동인련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대동인)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인권운동은 신세계였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을 만나고 인권단체연석회의에 참여하며 시야를 넓혔다. 2002~2012년 동인련 대표를 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집회에 나갔다.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가 우리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느껴 함께하면서 정보인권 활동가들을 알게 되고,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을 하면 평화운동가들과 만나고, 동인련 회원 중에 병역거부자가 나오면 ‘전쟁 없는 세상’ 활동가들을 소개했죠. 이렇게 계기가 계속 있었죠.”
없던 것을 만드는 “창업가 기질”양복 입은 정욜을 기억하는 이가 적잖다. 그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회사에 다니며 동인련 대표를 했다. 회사가 끝나면 자주 집회에 왔고, 때로 휴가를 내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집회와 회의에 자주 나타나 그를 직업적 활동가로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랬던 그가 2011년 3월 인권재단 사람에서 상근을 시작했다.
“인권활동가들에게 오는 메일링 리스트에서 채용공고를 봤어요. 인권센터를 짓는데 모금을 담당할 활동가를 채용한단 거예요. 박래군씨한테 장문의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요. 전화를 했더니 ‘미안하다’고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인권센터라는 도전해볼 만한 공간에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 좋았어요. 영리기업에서 익힌 업무도 활용하고 싶었고요.” 그렇게 ‘좌파와 동성애의 연결고리’가 완성됐다. 따지고 보면 청소년 쉼터도, 감염인 모임도, 인권센터도,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다. 그에게 “은근히 창업가 기질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렇네요” 하며 웃었다.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운동을 했으나 자신은 정작 환대받지 못하는 세상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생존자”라고 불렀다. “생존자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나를 설명하기 위해 쓰게 되죠.” 1998년 입대한 그는 성정체성이 드러나 군 정신병원에 입원당했다. “정신병자임을 인정하면 제대시켜준다”는 말도 들었다. 한 달 넘게 독방에서 뭔지도 모를 약을 먹어야 했다. 그의 상식으로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었다. 힘든 시기를 거쳤지만, 다행히 부대에 복귀해 군 생활을 마쳤다.
올해도 하필이면 ‘띵동’이 있는 서울 성북구에서 일이 터졌다.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선정된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예산이 성북구 보수 개신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쓰지도 못하고 ‘불용 처리’돼버렸다. 하필이면 서울시민인권헌장 무산 사태와 겹쳤고, 그는 성북에서 고군분투했다. 조우석씨는 발제문에서 성소수자 서울시청 점거농성에 대해 “3일 동안 이뤄졌던 이 점거농성 끝에 정욜과 박원순 둘이 직접 면담을 진행했으며, 직후 농성을 철회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밀약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고 썼다. 그러나 정작 정욜씨는 “바빠서 서울시청 농성장에 자주 가보지도 못했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10월에도 심란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 그와 ‘희망을 만드는 법’ 류민희 변호사가 참고인으로 출석하게 돼 있었다. 여야 합의로 의원들이 신청한 참고인을 모두 부르기로 했지만, 막판에 그와 류 변호사 등만 출석을 못하게 됐다. 성소수자 단체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인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해명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보수 개신교의 압력에 야당 정치인도 굴복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하필이면 유승희 의원은 띵동이 있는 동네의 지역구 의원이다.
정욜씨는 “다음 총선에서 보수 개신교 세력은 후보들에게 동성애에 대해 질의하는 것을 넘어 직접 찾아가 묻고 따지는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운동이 새로운 법을 만들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있는 것을 지켜내는 더욱 힘든 싸움이 될 것”이란 얘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은 참 반듯한 사람, 정욜에게 자꾸만 싸움을 건다.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을 환대하는 운동가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과 그에게 연결고리가 있긴 있다. ‘잊지 못하는 동생’이다. 박래군 소장의 동생 고 박래전씨는 1988년 독재정권에 저항해 분신했고, 정욜씨의 동생 같은 육우당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상을 비관해 2003년 자살했다. 서너 해 전 망원시장에서 정욜씨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는 “인권중심 사람에서 하는 박래전 열사 추모제 음식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세월호 진상 규명 활동을 하다 구속된 박래군 상임이사와 바깥세상을 잇는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연결돼야 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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