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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 발언합시다”

스스로를 에세이스트라고 여기는 서경식 <내 서재 속 고전> 출간을 기해 모인 철학자·이미지연구가 좌담
등록 2015-09-12 08:48 수정 2020-05-02 19:28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왼쪽 세 번째)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고전에 관한 책을 내면서 젊은 인문학자들과 대화 를 나누고 싶어 했다. 그와 ‘고전과 교양’을 주제로 대담한 이종찬 문화사회연구원, 권영민 ‘철학본색’ 운영자, 이나라 이미지연구가(왼쪽부터). 류우종 기자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왼쪽 세 번째)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고전에 관한 책을 내면서 젊은 인문학자들과 대화 를 나누고 싶어 했다. 그와 ‘고전과 교양’을 주제로 대담한 이종찬 문화사회연구원, 권영민 ‘철학본색’ 운영자, 이나라 이미지연구가(왼쪽부터). 류우종 기자

재일조선인이자 도쿄경제대학 교수인 서경식씨의 (나무연필 펴냄)은 디아스포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유를 숨기지 않은 채 ‘고전’을 읽고 경험하고 소개한 책이다. 이 책에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으로 시작해 조지 오웰의 을 거쳐 빈센트 반 고흐의 으로 끝나는 고전 소개글 18편(19권)이 실려 있다. 이렇게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에는 조금 다른 고전 목록이 담겼다. 출간을 계기로 대구에서 철학연구회 ‘철학본색’을 운영하는 권영민씨, 프랑스에서 공부한 이나라 이미지문화연구가, 이종찬 문화사회연구원과 ‘고전과 교양’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에 바탕해 고전을 읽는 의미, ‘나’를 드러내는 에세이의 효용, 교양의 토대가 흔들리지만 여전히 고전을 되짚어야 하는 이유 등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대담의 ‘풀 버전’은 에 실렸다.

전통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다른 전통

서경식 이번 책을 준비하면서, 제 생각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세대 차이를 꽤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학생들이 긴 문장을 읽거나 쓰는 걸 힘들어합니다. 매체 환경의 변화로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는 등의 장점도 있겠지만, 지식의 파편화·단편화 현상이 대두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고요. 저 같은 구세대가 ‘고전과 교양’을 논할 때 젊은 세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이종찬 선생님은 이번 책에서 전형적인 고전 목록과는 다소 다른 목록을 선보이셨는데, 선생님의 작업은 고전을 해체하고 재구축하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전통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에 대한 다른 전통, 다른 인문학을 보여주려 한달까요.

이나라 일반적인 고전이 보편적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는 텍스트라면, 선생님의 고전은 본인이 처해 있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는 선생님의 목록보다는 선생님의 글쓰기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어떤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단 내용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요약한 뒤 개인의 비판적 해석을 덧붙이는 방식이 있을 텐데요. 선생님은 내용 요약의 욕망을 강하게 피력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책이 ‘어느 순간’ 내게 왔고, 다시 나는 ‘어떤 순간’ 그 글을 상기했다는 식의 서술에 비중을 두시는데요.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의 찰나들이 글에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요.

서경석 일단 긍정적 말로 해석해도 되나요? (모두 웃음)

이종찬 저는 이걸 ‘신원주의적(身元主義的) 자아’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야기의 출발점을 자신의 정체성에서 찾는 것이지요. 글에 ‘나’라는 단어를 쓸 것인가의 문제와도 결부될 테고요. 이런 틀로 세상이나 텍스트를 바라보는 것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가진 입장에선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일 텐데요. 디아스포라라는 특수한 정체성으로 역설적이게도 보편적 차원의 문제 설정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서경식 2009년 ‘타자의 문화정치학’이라는 주제로 한국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발표문을 영어로도 작성해야 해서 발표 전에 철자와 표현에 대한 첨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I’라는 단어가 전부 삭제됐어요. ‘I’가 없이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해 말하는 건 불가능한데 말이에요. 학계에서는 ‘나’를 소거하는 게 관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일본도 그렇고, 영어권 나라에서는 특히 심하고요. 주어가 없이 ‘A는 B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생략된 주어는 절대정신이든 신이든 어떤 소양적인 인격일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려면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떤 각도와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언급해야만 합니다. 명제에 생략된 주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존재와 위치를 되묻고 따지는 작업이 필요하지요.

‘느끼는 나’ 없는 유럽 vs 자기에게 갇힌 사람들

이나라 유럽의 학술서는 대개 ‘나’라는 말 대신 ‘우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개별적인 나에서 벗어나 객관적이라고 가정된 주체로 말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근대 서구 사상의 핵심은 ‘생각하는 나’, 즉 지성을 쌓아올린 내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인 내가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 ‘나’에서 소외된 이들, 예를 들면 여성이나 식민지배를 받았던 이들을 다시 불러오려 했고요. 근대 서구의 보편 주체 구성 과정에서 ‘느끼는 나’ 역시 소외되지 않았나 싶어요. 서구에도 서정시의 전통이 있지만, ‘생각하는 나’를 모색하는 전통에 비해 ‘느끼는 나’를 모색하고 표현하는 전통은 훨씬 적어 보입니다. 반면 동양에서는 ‘느끼는 나’를 표현하는 데 대한 억압이 적은 듯해요. 예를 들면 나뭇잎의 흔들림을 안타까워하면서 물아일체하는 나, 이런 건 서구에서 상당히 보기 힘들거든요. 선생님의 글은 이런 측면에서 아시아적이고, 애상적 감정 같은 데 예민한 듯합니다.

권영민 애상이라기보다는 억울함에 기초한 글쓰기 아닐까요? (모두 웃음)

서경식 서구적인 표현이지만, 로고스(Logos·이성)와 미토스(Mythos·감성)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해볼게요. 서양에서는 로고스만으로 삶의 구석구석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우슈비츠 이후 로고스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여백이 조명받기 시작했지요. 이렇게 용어를 차용하면 서양적인 것의 답습이 될까 우려되기도 하지만, 이런 여백을 미토스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가 미술이나 음악에 관심을 갖는 건 이런 여백이 예술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일 겁니다. 미토스에 대한 조명은 서구적 합리성에 대한 정면 대결이나 부정이라기보다는 로고스적인 이해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나라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자신을 벗어나는 일일 겁니다. 자신을 돌아봐야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 역시 살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살아보니까 그래”라는 말을 자주 듣잖아요. (모두 웃음) 자신이 보고 듣는 바를 성급히 일반화하려는 태도가 지배적인 것이 되어가는 시대에, 필요한 건 타인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들여다보며 그것들을 자신의 삶과 견줘보는 작업 아닐까요?

이종찬 그런 부분은 한국적 신자유주의의 서늘한 풍경이기도 할 텐데요. 나를 기어이 드러내고 전시함으로써 내 몫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틀에 아등바등 갇혀 있달까요. 구조적 혹은 근본적 변화를 꿈꾸지 못하는 소비자주의적 마인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서경식 제가 ‘나’라는 주체를 강조하며 설명했는데, 이러한 주체는 핵심이 먼저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타자와 끊임없이 만나면서 생기는 맥락을 통해 파악됩니다. 나에 대해 말하려면 타인을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스스로를 에세이스트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본격적인 논문을 쓸 힘이 없기도 하고요. (웃음) 에세이는 ‘나’라는 존재가 부각되는 장르인데요. 여러분이 에세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나라 교과서에는 에세이가 손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나와 있지요. (모두 웃음)

이종찬 한국적 맥락에서 에세이는 이른바 A급 작가들이 작품 활동 중간에 관행적으로 써낸 신변잡기적인 글을 일컫는 듯합니다. 사소한 잡문 정도의 뉘앙스로 곡해되고 있는 것이지요.

서경식 제 학교 동료들도 에세이를 논문보다 낮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로고스적인 논문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설명하고 입증하고 근거를 대는 로고스적 방식이 중심이 되면서 미토스적인 것은 주변화되고 저평가됩니다. 에세이 역시 마찬가지라고 봐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30만여 명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그렇구나 하면서도 그렇게 넘어가버려요. 죽은 이들의 억울함이나 아픔을 논문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세이에서는 로고스의 영역보다 미토스의 영역이 중요합니다. 논문으로 다루지 못했던 영역을 건드리고 제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디아스포라 지식인’인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위치와 경험이 담긴 에세이를 쓰고자 했다. <내 서재 속 고전>에 언급된 프리 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케네스 클라크의 <그림을 본다는 것>,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밑바닥 생활>. 류우종 기자

‘디아스포라 지식인’인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위치와 경험이 담긴 에세이를 쓰고자 했다. <내 서재 속 고전>에 언급된 프리 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케네스 클라크의 <그림을 본다는 것>,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밑바닥 생활>. 류우종 기자

개인이자 발언 못하는 사람의 대표

이나라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면서 예술영화를 본 뒤 글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줘요. 이때 저는 영화를 보러 가면서 했던 소소한 경험들을 하나하나 관찰해서 적어보라고 합니다. 우연적인 경험이 자신을 만드는 거고 그걸 다시 기록하면서 의미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학생들의 일상적인 수다를 듣다보면 바깥을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달까요. 바깥을 좀더 많이 바라보되, 그 방식 역시 우연의 기회를 차단하지 않으면서 덜 프로그램화되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비해 학생들이 예기치 않은 것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권영민 사회적으로 그런 글을 쓰기 어렵게 만드는 지점도 있습니다. 내 존재와 위치를 공개했을 때 내게 돌아올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지요. 에세이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 고통이 담긴 이야기를 밝히는 것이라면, 이걸 어디까지 어떻게 밝혀야 할지에 대한 내면적인 투쟁을 치러야 합니다. 글 쓰는 입장에선 곤혹스러운 일이에요.

서경식 제가 에세이스트로 글을 쓰고 책을 펴내며 대학에서 일하는 것은 모두 노력보다는 행운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주위의 재일조선인들만 보더라도 알코올중독이라든가 가족 간의 불화, 자살 등을 겪는 사람이 많아요. 식민지배를 겪었고 나라가 분단돼 있고 신자유주의가 횡행하는 가운데 불행이 닥쳐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불행을 겪고 있고요. 다만 우연히 다가온 행운 덕분에 여러분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제 이야기는 단지 서경식이라는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타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대표해 제가 책임지면서 발언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관계의 산물입니다. 나와 사회, 나와 인류의 관계를 연결해 사고해야 한달까요.

‘공정중립’이라는 이상한 말

이종찬 현재 한국에서의 인문학 담론들을 살펴보면, 한편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간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인문학이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앞다투어 설파하고 있지요. 정부가 주도하는 창조경제의 바탕으로도 인문학의 가치가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고요.

서경식 일본에서는 1990년대 말에 교양교육 강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지시한 대로만 따라하고 대화조차 되지 않는 학생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외국어를 비롯한 문학·철학 등의 교양교육을 축소하고 실용적인 기술교육을 늘려가는 경향이 강합니다.

권영민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는 흐름만 본다면, 오늘날 인문학은 지식이나 교양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나’를 복원하거나 ‘저항’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너희는 이거 잘 모르지? 내가 가르쳐줄게’라는 식으로 강의를 하거나 최신 담론을 소개하는, 부정적 의미의 ‘계몽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전문가의 권위를 강화하거나 자기계발서에 활용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지요.

이종찬 저는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마지노선마저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충격을 받곤 합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향해, 주류 언론의 영향을 받아 ‘죽은 자식의 주검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며 거침없이 손가락질하던 이들을 볼 때 그러했습니다. 어떤 사안을 기회주의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런 자각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뻔뻔함의 시대인 것이지요.

이들 덕에 아직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네

서경식 일본의 히로시마대학에서는 재일조선인 교수가 수업 시간에 위안부 관련 영화를 보여줬다는 이유로 반일감정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대학생은 수업 시간에 조선학교 지원을 소개하는 전단을 나눠준 뒤 이에 대해 논한 것이 반일운동이라며 인터넷에 글을 올렸어요. 이 글을 본 자민당 의원이 학교에 압력을 가하자 학교가 사과를 했고 이건 1930년대 나치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요. 일본에서는 ‘상대화’라는 말과 유사한 ‘공정중립’이란 표현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어요. 공정중립이라는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중간에 서라는 거지요. 예를 들면 아베 정권이 주요 방송사에 공정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정권에 반대하는 것은 공정중립이 아니니 그런 걸 보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학생들 역시 제 강의가 너무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 일본 비판만 하니 공정중립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일본의 한 마을회관에서 하이쿠를 짓는 할머니들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쓴 시들이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평화헌법을 지키자는 내용의 하이쿠가 공정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신문에 실리지 못했지요. 이건 눈에 안 보이는 권력에 전복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위험한 관념이 사회 곳곳에 깊숙이 침투되고 있어요.

이종찬 한국에서는 공개적인 발언을 하면서 자기 발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꽤 있지요. 그거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발언인데 말이에요.

서경식 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을 버려야만 했는지라 일본 사회에서도 성찰의 계기가 마련되리라고 봤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나도 일찍 사실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베 신조 총리가 2020년 도쿄 올림픽 유치 연설을 하면서 후쿠시마 원전이 완전히 제어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일반인들은 이게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엄청난 지지를 표했지요. 국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성과 교양의 패배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난제에 즉효를 내는 해답은 없습니다. 성급하게 해답을 구하는 태도야말로 사고의 단편화 탓이지요. 답이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에서 거론한 선인(先人)들이 그렇게 해왔듯이 말이지요. 이들이 존재한 덕에 우리는 아직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리 신윤동욱 기자·임윤희 나무연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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