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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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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짝짓고, 키우고… 예능은 동물원?

예능의 원초적 본능화… 쿡방·먹방 보다 채널 돌리면 판타지 가득한 출산·정상가족 장려 캠페인이 화면을 채우고
등록 2015-08-07 07:39 수정 2020-05-02 19:28

‘이건 너무 동물원 같잖아.’
불금(불타는 금요일)의 호프집에 앉아, 주변에서 오가는 얘기는 귓등으로 흘리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방송을 보다가 문득 ‘예능의 원초적 본능화’를 떠올렸다. 온통 방송이 시골에 가서 먹든, 정글에 가서 먹든, 집에서 만들어 먹든, 결국은 먹는 이야기다. 삼둥이를 보든, 쌍둥이를 보든, 사랑이를 보든, 결국은 아이 키우는 얘기다. 미혼이 가상 연애를 하든, 돌싱 남녀가 ‘썸’을 타든, 부인이 드림맨(꿈꾸던 남자)을 만나서 살든, 결국은 짝짓기 놀이다. 나 혼자 살던 이들이 모여 놀든, 상처가 있는 이들이 셰어하우스에서 우정을 나누든, 결국은 가족을 만드는 이야기다. 먹고, 짝짓고, 아이 키우고. 예능이 너무 본능스러워졌다. 게임의 룰 안에서 찧고 까불던 예능이 아닌가?
음식과 아이와 가족. 예능이 착해진 시대에 아이가 없고 요리도 못하는 비혼 싱글은 소외에 더한 소외를 느낀다. ‘국민예능’에 공감하지 못하는 소외는 투표권을 박탈당한 설움 못지않게 심각하다. 심각한 ‘비국민’ 정체성 자각을 유발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도대체 왜 남의 아이 일거수일투족에 그토록 격하게 반응하고, 이서진이 시골에서 밥해먹는 이야기에 그렇게 몰입할까? 갈수록 아이가 없고, 요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한국식 예능은 저 멀리 브라운관 밖으로 내던져버리고 있다. 안 그래도 비국민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의 심리를 더욱 불안케 한다.

'엄마의 탄생'(KBS)은 출산, '슈퍼맨이 돌아왔다'(KBS)는 육아, '마이 리틀 텔레비전'(MBC)은 요리를 다룬다(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한국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 소재가 점점 원초적 본능에 가까워지고 있다. KBS 제공, KBS 제공, MBC 제공

'엄마의 탄생'(KBS)은 출산, '슈퍼맨이 돌아왔다'(KBS)는 육아, '마이 리틀 텔레비전'(MBC)은 요리를 다룬다(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한국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 소재가 점점 원초적 본능에 가까워지고 있다. KBS 제공, KBS 제공, MBC 제공

보면 볼수록 쓸쓸해지는 TV

언젠가 중학생 조카가 물었다. “삼촌은 삼둥이 중에 누가 제일 귀여워?” 삼둥이 얼굴도 잘 모르는 삼촌이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서 (KBS)를 보던 초등학생 조카가 “민국이 귀여워, 히히히~” 하며 웃었다. 대한·민국·만세, 이름조차 애국적인 삼둥이를 보면서 비국민 삼촌의 조카는 자란다. ‘과연 얘들과 공감할 무엇이 남을까?’ 슬픈 예감이 밀려든다. 삼둥이의 귀여움을 모르고, 사랑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니.

그리하여 여기서 생존은 목표가 되었고, 아이는 유일한 안식처이며, 가족은 신앙이 되었다. ‘태초에 음식이 있었다.’ 원초적 본능으로 돌아간 텔레비전(TV)은 말한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누구와 먹을 것인가, 어디서 먹을 것인가.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틀어도 끝없이 먹는 얘기다. (MBC)은 몰라도 백주부 열풍은 안다. 백종원 레시피는 몰라도 백주부 논쟁은 풍월로 안다. 대부분 그렇다. 하여튼 쿡방(요리방송)의 시대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로 셰프가 음식을 만들든, 직접 구한 재료로 시골밥상 삼시세끼를 때우든, 먹는 얘기가 나오고 우리는 멍하게 그것을 본다. 수요일에는 미식회를 보면서 자장면 명가를 판별해야 하고, 테이스티 로드를 따라가 ‘핫 플레이스’를 알아야 한다. 도대체 먹는 얘기에 왜 이렇게 집착할까.

그런데 무언가 구슬프다. 누구는 쿡방 열풍에서 ‘각자도생’의 풍경을 읽는다. 이승한 대중문화평론가는 “잘 살아서 쿡방·먹방에 몰입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백종원 레시피도 전통적인 가정이 해체된 이후 혼자 밥해먹는 사람들을 위한 요리 같다”고 말했다. 괜찮은 밥을 먹거나, 귀여운 아이를 보거나, 적당한 가족을 이루거나, 원래는 일상이었던 것들이 일상이기 어려워진 시대의 반영이란 것이다.

안인용 TV평론가는 백주부 레시피에 대해 “남자들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PC방에서 만두를 데워 먹는 연장선에 있는 요리”라고 평가했다. 이제는 고급스러운 요리가 아니라 당장 일용할 양식의 조리법이 인기를 끄는 시대다. 이승한 평론가는 쿡방의 인기에 대해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기를 쓰고 일상 안에 있다는 기분을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존은 미션이 됐다. 청년의 미션이 한 끼 식사라면, 중년의 과제는 오직 건강이다. ‘무엇을 먹고 오래 살 것인가.’ 이 평론가는 “종합편성채널은 건강 프로그램을 통해 중·장년의 공포를 자극한다”고 분석했다.

극단의 리얼리티? 그것은 판타지

각박한 세상에 귀여움은 최고의 위로다. (MBC)가 시작하고 로 절정을 찍은 육아예능 열풍은 베이비(Baby·아기)가 왜 뷰티(Beuty·미인), 비스트(Beast·동물)와 함께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끄는 전통의 ‘3B’인지를 확인시키는 차원을 넘었다. 도처에 삼둥이와 사랑이가 나오는 광고가 나온다. 에는 쌍둥이, 삼둥이도 모자라 이제는 오둥이(다섯 딸) 아빠 이동국이 등장한다. 아빠와 아이를 카메라는 그저 지켜본다는 ‘관찰예능’은 리얼을 가장한다.

김선영 방송평론가는 “저출산 시대에 사실은 출산 자체가 판타지”라며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다둥이라는 판타지를 소비한다”고 말했다. 는 아빠가 육아하는 형식으로 양성평등을 지향할 것 같지만, 가족 안에서 성역할이 고정된 부분도 나온다. 육아의 진짜 고충보다는 아이가 귀여운 순간이 강조된다. 그래서 김선영 평론가는 “진짜 같은 가짜”라며 이렇게 말했다. “체험도 비용이 드니까 대리만족을 추구한다.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인 ‘번아웃(Burn-out) 증후군’을 앓는 한국인은 체험할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관찰예능은 리얼리티의 극단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일상에서 먼 판타지다.”

차라리 거리의 선동은 노골적이어서 안전하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정을 찬양하고, 동성애는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외치는 개신교 일부만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것은 아니다. 김선영 평론가는 “육아예능에서 외둥이는 끝내 쓸쓸하고 외롭다고 묘사된다”며 “이것을 보는 부모는 ‘저렇게 완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내가 잘못인가’ 하고 느끼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토록 효과적인 출산 장려 프로그램, 정상가족 캠페인도 흔치 않다.

이제는 아기만 나오지 않는다. 황금시간대 방송에 얼굴 낯선 이가 등장해 누군가 싶어서 보면, 연예인 아빠의 딸이다. 가족에서 금맥을 찾은 방송은 (SBS)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인 아빠와 자녀의 관계도 ‘예능화’했다. 평범한 자녀와 부모의 갈등 토로가 핵심인 (SBS)까지 가세해 마치 세상에는 가족 관계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출산을 소재로 한 (KBS)에 이르면 “박근혜 정부 통합가족 정책의 현현”(김선영 평론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부성애·모성애로 모자라 형제애·자매애까지 등장할 기세다. 비록 제작이 좌절되긴 했지만,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KBS)는 연예인과 그의 형제자매가 출연하는 내용으로 기획됐다.

그렇게 가족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핍된 존재가 된다. 예능의 노파심은 짝을 지어주지 못해 안달하고, 가족을 만들어주지 못해 애탄다. 지난 4월 시즌2를 마친 (SBS) 같은 가상가족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MBC)같이 1인 가구를 다룬 예능도 결국은 ‘또 하나의 가족’의 탄생을 향해 달린다. 1인 가구의 고충은 출발점일 뿐, 결국은 가족이 좋다는 결론에 이른다.

남남북녀가 가상의 가족을 이뤄 북한식 생활방식을 체험하는 (채널A) 같은 프로그램도 생겼다. 가족이 아닌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한편 예능은 사회의 평균적 감수성을 반영한다. 여기는 무상복지도 아이와 결합해야 설득력을 얻는 가족공화국인 것이다. 무상급식, 무상보육같이 그나마 실현된 무상 복지정책 모두가 오직 아이와 관련된 것이란 사실은 공론화도 되지 않는다. 자녀 유무를 넘어선 보편적 무상복지는 실현되기 어렵다. 진보세력조차 오직 부모와 자녀라는 가족의 틀 안에서 복지정책을 입안하기 때문이다.

“귀여움은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실제로는 가족이 해체되고, 생존이 위기인 현실이 있다. 이승한 평론가는 “쿡방과 육아는 원초적 만족감, 즉각적 위로를 준다”고 지적했다. 갈급한 욕구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안인용 평론가는 “귀여움은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짧은 동영상인 ‘움짤’로 만들기 쉬운 ‘귀여움’이 지금의 대중문화 소비 행태와 잘 맞는다. 안 평론가는 “버스 안에서,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짧게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하기에 귀여운 이미지가 걸맞다”고 말했다.

결국 육아와 쿡방의 주인공은 남자다. 남자의 육아라야 예능이 되고, 집밥을 말하지만 셰프는 남자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 교수는 “요리도 육아도 결국은 여성을 향한 남성의 구애 전략”이라며 “관심받고 싶어 하는 수컷들의 몸부림”이라고 분석했다. 그렇게 요즘의 예능은 남성성, 가족주의, 생존으로 귀결된다. 예능의 원초적 본능화는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지속될 대세로 보인다. ‘그저 살아라.’ 빅브러더의 명령은 전파를 타고 흐른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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