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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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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의 데스매치

사랑은 힘의 논리가 온전히 지배하는 관계, <무뢰한>이 보여주는 사랑의 파워게임
등록 2015-06-12 22:01 수정 2020-05-03 04:28
*영화 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돼 있습니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CGV아트하우스 제공

언제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다. 발가락에 키스하도록 허락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 아니 방금 너의 발로 디딘 그 땅에 키스해도 되겠느냐고 사정하는 것이 사랑이다. 혹시라도 보자고 할까봐 다음주 하루도 다른 약속을 차마 못 잡고 있는 것, 갑자기 웬일로 보자고 한 날이 하필이면 내 중요한 면접날인 게 내 잘못 같아 너무 미안해지는 것이 사랑이다. 서로가 동시에 똑같이 좋아하는 연인도 있을까? 더 좋아하는 쪽이 마음을 잘 가리고 약자의 역할을 기꺼이 자임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실은 거개의 연인관계다.

사랑만큼 힘의 역학이 온전히 지배하는 인간관계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개차반인 상사도 일터에서 남의 눈이나 제삼자의 평판은 의식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 위장은 할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으슥한 밤, 부하 직원에게 칼이라도 맞을까봐 최소한의 정말 최소한의 조심은 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은 다르다. 그건 양쪽 중 하나가 자신을 바닥 뿌리까지 스스로 다 갖다 바친 관계이기 때문이다. 밀당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전세가 팽팽할 때 벌이는 게임. 만약 권투같이 비슷한 무게의 같은 체급끼리만 붙는 경기였다면 백중한 티격태격이 언제나 가능하겠지만, 사랑이란 플라이급과 헤비급이 맞붙는 것도 말리지 않는 철저히 불공평하고 잔혹한 데스매치 아닌가? 아무리 불리해져도 대신 수건을 던져줄 코치도 야유를 보내줄 관중도 없으며 파국 전에 강제로 경기를 끊어줄 심판은 더군다나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둘만의 아레나다.

그리고 사랑은 약점을 만든다. 쿠크다스 같고 순두부 같은 부위가 몸 어딘가에 생겨난다. 맞기만 하면, 아니 닿기만 해도 부스러지는 그런 치명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출현하는 것이다. 옷으로든 뭘로든 가려는 놨지만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는 연약한 대목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둘의 승부는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고 그 약점의 존재는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감지된다. 그리고 그 약점 위에 하대와 착취와 군림이라는 상대방과의 파워 구조가 자리잡는다.

은 사랑이라는 전쟁을 놓고 흥미로운 스케치를 보여주는 영화다. 취조를 위해서라면 돼지발정제 사용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 형사와 남자라면 심장부터 껍질까지 훤히 알고 있는 ‘텐프로’ 출신 마담이 한 살인범의 행적을 두고 벌이는 대결. 그 범인(준길)은, 그의 안전한 피신을 위해서라면 수사진을 속이는 참으로 위험한 연극을 해줄 수도 있을 만큼 그녀가 깊이 사랑하는 남자다. 그리고 이 형사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랑에 넌덜머리를 내며 초탈해진 인물이다. 남자에게 목적은 그녀의 비밀을 파내는 것이고, 여자에게 목적은 이 의심스러운 남자를 따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팽팽한 전선에 균열이 간다. 누구의 약한 고리가 누구의 약점이 된 것일까. 하지만 이 약점은 상호적이고 순서를 달리하며 서로에게 옮아간다.

여전히 그녀에게 준길은 거짓말도 다 믿어줄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남자지만 그 위에 다른 사랑이 돋아나며 약점을 만든다. 형사에게 그녀는 준길을 잡기 위한 도구였을 따름이지만 어느새 무방비 상태로 자기를 내바칠 수밖에 없는 여신이 된다. 사랑이라는 약점이 두 인물을 오가며 시차를 두고 교차해 나타나다가 찰나의 누전처럼 엉겨붙어 불을 댕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완전한 연소. 영화 이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맹목적이어서 숨이 턱 막히는, 말 그대로 데스매치 같은 사랑이다. 누구의 약점이었는지는 이제 구분이 불가하다.

오은하 직장인·영화진흥위원회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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