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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 사람 혹은 미들맨 지식인

15년간 ‘미국 유학파 한국 지식인’ 분석한 김종영의 <지배받는 지배자>
등록 2015-05-22 11:03 수정 2020-05-02 19:28

‘낀 사람’. 김종영 경희대 교수(사회학)가 1999년부터 2014년까지 15년간 110명에 대한 심층 면접을 통해 살펴본 ‘미국 유학파 한국 지식인’을 압축해 설명하면 이렇다. 미국 유학파 지식인들은 한국에서는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거나 명문대가 아니더라도 소속 학교의 최상위 그룹에 속하는 엘리트 학생으로 미국 유수 대학에 진입했다. 그러나 영어라는 아킬레스건이 발목을 잡아 정작 미국에서는 수업 중에 버벅대고 교수와 동료 학생들로부터 모멸, 배제, 차별을 겪는다. 내가 구르는 현실이 ‘똥밭’이지만 미래에 ‘거름’이 될 것이라는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긴장한다. 한국과 미국, 희망과 고통, 열등과 우등 사이에 ‘낀 사람’.

김 교수가 쓴 대로 옮기자면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다. 미국 사회학자 에드나 보나시치의 ‘미들맨 소수자’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조합한 단어다. 미들맨 소수자들은 “지배 집단이 생산하는 상품에 대한 무역과 유통을 담당해 피지배자들에게 판매”한다. 이들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를 연결하는 거간꾼이면서 피지배자들로부터 적대시된다. 1992년 LA 폭동 때의 한인들처럼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 중세 유럽의 유대인 등이 미들맨 소수자다.

한국에 돌아온 ‘미국 유학파 지식인’들은 미국에서는 ‘소수자’였지만 한국에서는 소수만 가진 ‘미국 학위’를 통해 헤게모니를 획득한다. 미국에서는 약점이었던 영어 실력이 한국에서는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한다. 미국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졸업한 뒤 한국의 한 은행에 취직한 박 차장은 VIP 고객 상담 업무를 하면서 MBA 학위로 기업 오너 등과 쉽게 ‘라포’(상호신뢰 관계)를 형성한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딴 뒤 국내 대학 교수직에 지원하는 이들은 ‘영어 논문’과 ‘미국 박사 학위 선호’로 인해 임용에서 비교우위를 점한다. 미국 유학 시절에 만든 네트워크는 곧장 엘리트 멤버십이 된다. 글로벌 지식인들로부터 연구 과정에서 도움을 받고, 국내에서 여는 배타적 동문회를 통해 또 다른 ‘이너서클’을 형성한다.

이들은 헤게모니를 획득하되 헤게모니에 도전하지는 않는다. 교수 사회를 예로 들면, 실력보다 미국 박사 학위 소지 자체가 임용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제도에 반발하지 않는다. 미국의 교수 채용 과정이 1년 전 공고, 교수·학생 등과 교수 지원자 간의 논문 및 전공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 등 질적으로 풍부하다는 점을 알고 그 합리성을 높이 사면서도, 한국 대학에 임용된 뒤 파벌로 얼룩진 교수 채용 과정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이 획득한 배타적 네트워크, 엘리트 멤버십을 빠른 승진, 나은 처우를 얻는 데만 사용한다.

김종영 교수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다시 다른 말로 옮긴다. ‘지배받는 지배자’.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빌려왔다. 부르디외는 현대사회 지배층이 자본가와 지식인으로 양분되며, 자본이 지식을 지배한다고 설명한다. 지식인은 ‘(자본으로부터) 지배받는 지배자’다. 김 교수가 보기에 미국 유학파 한국 지식인들도 똑같다.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지배받는 동시에, 한국에서 그 헤게모니를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선다.

그는 왜 15년간 이 연구를 했을까. 저자는 간단히 말했다.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돌베개 펴냄, 1만6천원.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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