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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이들을 위한 얕은 지식의 전당

‘얕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신종 베스트셀러는 인문학의 새 출발점이 될까
등록 2015-03-11 15:40 수정 2020-05-03 04:27
‘얕음’이 흠이 아닌 시대가 됐다. ‘얕은 지식’이라고 당당히 내세운 인문교양서가 선택받고 ‘우주에서 가장 얕다’는 콘셉트를 내세운 모바일 콘텐츠 서비스가 팔린다. 지금 ‘얕음’은 부담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접근성 측면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도드라진다. 반면 한없이 얕아도 될 것 같은 TV 예능프로그램들은 저마다 지식과 교양을 껴안느라 야단이다. 무거운 지식은 가벼워야 소구되고 재미로 보는 예능은 너무 어렵지 않은 교양 수준의 적정지식을 구비해야 시청률이 오른다. 바야흐로 거의 모든 일상의 영역에서 쉼없이 ‘팁’과 ‘처세’와 ‘지식’을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지식 피로 사회’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지식과 인문학이 외연을 넓혀가며 대중이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얕은 지식을 설파하는 사람들과 프로그램들을 살펴봤다. _편집자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궁금해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주제들을 선정해서 얕게 한번 파보겠습니다.”

‘얕게’ 판단다. 어떤 주제들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보수와 진보, 장자·데카르트·칸트·키르케고르·크리슈나무르티, 사후세계, 명상 등 신비 체험, 외계인, 우주의 탄생, 일반·특수상대성이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일간베스트…. 하나로 꿰기 힘든 종잡을 수 없는 주제들이지만 결코 진입장벽이 낮은 주제는 아니다.

뻔뻔한가, 당당한가

‘무명의 30대 젊은이’ 4명은 지난해 4월부터 이런 주제들을 선정해 팟캐스트 방송을 해왔다. 이름하여 . 줄여서 이라고 부른다. 마니아 팬층을 형성하며 조금씩 이름을 알려오던 이 팟캐스트는 방송을 진행·주재하던 채사장이 지난해 12월 동명의 책 을 출판하고 이 책이 ‘업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4월 팟캐스트 초창기 다운로드 횟수가 한 달에 1천 회 정도였다면, 지난 2월 한 달간 다운로드 횟수는 80만 건으로 800배 증가했다. “스트리밍으로 듣는 건 집계가 안 돼요.” 채사장이 수줍게 말했다. 1·2권으로 나눠서 출판된 책 은 1권은 10만 부, 2권은 5만 부가 팔렸다. 온라인서점 예스24와 교보문고에서는 현재 베스트셀러 2위,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는 두 달 동안 5위권을 지키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동시에 마구 터져나오는 ‘얕음’의 봇물이다. 모바일에서 여러 콘텐츠를 모아서 제공하는 콘텐츠 큐레이팅 앱 ‘피키캐스트’는 최근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우주의 얕은 지식’과 ‘우주의 얕은 꿀팁’을 알려준다며 시선을 끌어모았다. 서류 전형의 장벽에 가로막힌 취업준비생에게 자기소개서 작성 비법, 사회생활 비법 같은 얕은 꿀팁을, 시험 전날 이래도 저래도 시험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고딩에게 “올킬학습법부터 공부명당자리까지” 깨알 같은 얕은 지식을 알려준다는 내용이다. 피키캐스트 마케팅 담당자 김유현씨는 “광고 전후를 비교하면 1일 앱 다운로드 횟수가 광고 뒤 2~2.5배까지 늘었다”며 “얕다는 게 흠으로 인식되지만 요즘 시대에는 오히려 접근성이 높다는 장점으로 부각되는 시대라는 점에서 ‘우주에서 가장 얕다’는 키워드를 내세웠고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바보 같아 보이는 질문이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람들은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 콘텐츠에 응답하고 반응하는 걸까. 다독가로 유명한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에 쓴 칼럼에서 “모두가 ‘고고한 척’하는 세상에 대놓고 이 책 한 권 읽고 ‘지적인 체하자’는 뻔뻔한 당당함에 후련함을 느낀 것이다. 이것은 청문회에서 드러나는 수십 년 준비된 후보의 진면목과 철밥통 학자의 오만,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정치인과 관료의 위선에 넌덜머리를 내던 대중이 피차 솔직해지자는 조롱을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해석을 달았다. “어차피 교양이란 적당히 아는 척하는 것”인데 “솔직하게 툭 터놓고 얕은 지식이라고 말하는 채사장의 책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지금 시대는 얕은 지식이 매력적인 시대”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채용 과정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면서 변형된 개념의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이때 기업이나 대중 출판 시장에서 말하는 인문학은 사실 깊은 지식이 아니라 실용적 요구가 있는 얕은 지식이다. 예전에 취업준비생들이 보던 필독서 ‘스파 상식’이 시대가 바뀌면서 ‘인문학’으로 이름을 바꾼 셈이다. ‘얕은 지식’이 매력과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이건 ‘얕은 지식’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평가이지 책을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에 책 자체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내신 5등급을 위한 인문학

을 쓴 채사장은 이런 분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채사장은 “의 방점은 ‘얕은 지식’이 아니라 ‘지적 대화’”라고 말했다. 그가 ‘지적 대화’에 방점을 찍은 것은 “제대로 된 진짜 대화가 부족한 시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적인 대화나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삶이 각박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대화를 위해 필요한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대화를 할 때는 깊고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교양과 인문학으로서의 넓고 얕은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분모를 책을 통해 만들어서 어른들이 대화놀이를 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데카르트·키르케고 르·세종대왕,신비체험, 외계인, 우주의 탄생 등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궁금해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주제들”을 갖고 쉽고 편하게 대화하는 팟캐스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꾸려가는 4명의 패널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도인·채사장·독실이·깡선생(위). “우주에서 가장얕다”는 점을 내세워 광고하는 모바일 콘텐츠 큐레이팅 앱 ‘피키캐스트’의 텔레비전 광고 장면(아래). 지대넓얕 제공, 피키캐스트 제공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데카르트·키르케고 르·세종대왕,신비체험, 외계인, 우주의 탄생 등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궁금해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주제들”을 갖고 쉽고 편하게 대화하는 팟캐스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꾸려가는 4명의 패널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도인·채사장·독실이·깡선생(위). “우주에서 가장얕다”는 점을 내세워 광고하는 모바일 콘텐츠 큐레이팅 앱 ‘피키캐스트’의 텔레비전 광고 장면(아래). 지대넓얕 제공, 피키캐스트 제공

은 사람들이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쓴 책인 셈이다. 기존 인문학 서적이 너무 ‘상향 평준화돼 있다’는 생각에 채사장은 책에서 개념어나 어려운 말을 최대한 배제하고 구어체로 이야기하듯 책을 썼다. “제 주변만 봐도 고등학교 때 친구들 상당수가 대학을 가지 않았어요. 어머니도 대학을 가지 않았고요. 이른바 ‘스카이’로 대표되는 상위권 대학을 가는 학생의 비율은 전국의 3%에 불과한데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사람들, TV에서 보는 사람들, 책에서 저자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카이 출신이에요. 그러나 사실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는 내신 5등급으로 지방대를 나오고 월100만~200만원을 버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인문학을 향유하고 말하는 주체가 돼야죠.” ‘얕은 지식’에 평등의 정신이 녹아 있다.

그의 바람의 진정성은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면서 느껴진다. 책보다 먼저 세상에 이름을 알린 팟캐스트 방송 은 책의 저자 채사장 외에 김도인, 독실이, 깡선생 네 사람이 함께 진행한다. 이들의 별칭은 팟캐스트에서 맡고 있는 캐릭터를 반영한다. 김도인은 20대의 상당 부분을 도 닦는 데 투자해 명상과 깨달음에 일가견이 있지만 지금은 “돈 버느라 정신없는” 여성 멤버다. 독특한 관심사와 취미를 가진 데 비해 평범한 말투, 그러나 사생활의 공개가 가장 적은 신비주의 전략으로 팬들의 호기심 대상이다. 독실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이공계 출신으로 과학 신봉자이기도 하다. 그는 “과학을 신봉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합리적으로 존재 가능하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방송에서 종종 이야기한다.

“아, 정말?” “나 진짜 몰랐어”

깡선생은 불의에 저항하는 깡을 가진 캐릭터를 추구하며 방송 초창기에는 “국가는 우리의 하인입니다. 빡칠 땐 빡치자” 같은 센 발언도 종종 했지만, 최근 결혼 전후로 부드러운 느낌으로의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다. 채사장은 자신을 “신자유주의와 미스터리에 관심이 많다”라고 소개한다. 다른 패널들은 그가 “자본가를 꿈꾼다”고 말한다. 채사장은 자기 이름의 기원에 대해 “막 짓긴 했는데 나중에 부여한 의미는 ‘지식 가게의 사장’이라는 의미와, 체 게바라의 ‘체’와 자본주의의 꽃인 부르주아(사장)를 결합해 아이러니를 꾀했다”고 말했다. 2000년 대학에 입학한 채사장은 대학 졸업 뒤 “오로지 돈을 많이 버는 것에만 관심이 많아 부동산 임대업, 주식투자, 학원강사 등을 전전하던 중 2011년 제주도 여행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동료 2명의 죽음 등을 맞닥뜨리면서 신비, 영혼, 미스터리 같은 영역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관심사와 삶의 이력을 가진 4명이지만 사실 특별한 지식의 소유자라거나 ‘전공자’는 아니다. 이들은 마치 1990년대까지 대학교에서 흔히 펼쳐지던 세미나 풍경처럼 주제를 정하면 한 명이 그 주제를 담당해 공부해온 뒤 발제를 하고 나머지가 그 주제에 대해 자신의 지평 안에서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한다. 그러나 종종 ‘일부러 진행을 위해 모르는 체하는 건가’ 같은 의문이 들 정도로 “아, 정말?” “오, 진짜야?” “나 진짜 몰랐어” 같은 리액션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얕지만 겸손한 ‘노력하는’ 지식이다.

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는 30대 남성 독자를 출판시장에 끌어들여 독자의 외연을 확장한 점이 기여한 바가 크다. 을 펴낸 출판사 한빛비즈는 주로 경제·경영 분야나 자기계발서를 출판하던 곳이다. 권미경 한빛비즈 편집자는 “한빛비즈는 ‘지금 당장 ~하라’라는 유의 경제·경영 쪽 자기계발서 시리즈가 구축돼 있고, 이 시리즈에 충성도가 있는 30대 중·후반 남성 독자를 갖고 있다. 책을 펴내면서 이 30대 남성 독자들이 인문학에 관심 갖고 있음을 알게 됐고, 이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문교양서를 고민하던 중에 을 펴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독자들 가운데 30대 남성의 비중이 높고 40대 남성들로 구매층이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은 인정과 우려를 동시에 받고 있다. 박태근 알라딘 인문·교양 MD는 “이 무거운 학술 인문서와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실용 인문서 사이에 비어 있는 중간지대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긍적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독자들이 이 책을 선택한 목적이 인문학적 성찰이라기보다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 그친다면 아마 이 한 권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길 수 있고, 그래서 다음 독서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채사장은 “내용이 얕아서 인문학 본연의 역할인 성찰과 사색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는 질문에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넓고 얕은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과 교양은 교수나 철학자만 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지식에 서열을 매기는 것에 반대하고, 인문학을 생산하는 주체가 달라지고 다양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종착점이 된다면 서글플 것”

‘얕은 지식’은 인문학을 말하고 적극적으로 누리는 주체의 다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노명우 교수는 “이 ‘지적 대화’를 위한 지식 탐구의 입구이자 출발점이 될지 종착점이 될지 궁금하다”며 “입구 역할을 충실히 한다면 환영할 일이지만 여기가 종착점이 된다면 서글플 것 같다”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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