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 구석자리에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거리엔 비가 많이 오고 있고 개에게서 비에 젖은 털 냄새가 난다. 쫓아낼 법도 한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개는 두 발을 모으고 엎드린 채 편안히 잠들어 있다. 자주 여기서 이런 시간을 보내는가보다. 그 옆에서 8명쯤 되는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정치적 의견을 말하고 있다. 흑인 청년 한 사람이 말하면, 나이 많은 여성과 백인 할아버지가 뒤이어 발언하고, 히스패닉 청년이 두 사람의 말에 반론하는 식이다. 이렇게 큰 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친구가 될 수도 있을까. 한국이었다면 곧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을지 모른다. 한쪽에선 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독자가 있고,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점원과 계산대의 점원이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 이곳이 서점이 맞는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여기는 100% 자원활동가들의 공헌으로 운영되는 미국 뉴욕 맨해튼 로어이스트사이드 구역의 서점 ‘블루스타킹스’(Bluestockings)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많이 찾아서 읽는 편이지만 책은 주로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한다. 특정 서점에 대한 멤버십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대형 서점의 멤버십 카드가 있지만,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회원일 뿐이다. 내게 없어져서는 안 될 서점이 있나 하고 생각해보면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친구와 약속을 잡는 장소였던 종로서적, 대학로의 몇몇 작은 서점을 포함해 서울의 많은 공간들이 사라져가는 과정에서 나는, 독자로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나의 기억과 내가 서울에서 갈 수 있는 장소를 하나씩 잃게 되었다.
작은 영화관, 카페, 빵집, 식당, 중소 서점이 사라지는 일을 두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가끔 서점에서 낭독회, 독서모임, 강의가 열렸지만 오직 거기서만 그 책과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은 드물었다. 한편, 몇 년 전부터 한국의 대형 출판사들은 ‘북카페’를 열어 자신들의 책을 할인 판매하고 낭독회나 대담 행사를 직접 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책 문화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그 카페의 아르바이트생과 친구일 수 없었고, 거기 오는 어떤 낯선 손님과도 책에 관한 대화를 선뜻 나눌 수 없었으며, 행사가 끝난 뒤 다시 혼자가 되는 느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뉴욕의 맨해튼과 브루클린에는 100개 이상의 독립서점들이 있고, 서점과 독자들은 대부분 고유한 멤버십을 갖는 관계에 있다. 물론 결속력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은 서점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많은 문화적 활동을 해나간다. 수전 손태그가 단골이던 세인트마크스서점(St.Marks Bookshop)의 경우 2008년 월세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많은 뉴욕 시민들과 살만 루슈디를 비롯한 작가들의 청원으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공간이 나의 커뮤니티가 된다는 건 이처럼, 이곳이 없어져서는 안 될 만큼 나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물가가 높기로 손꼽히는 뉴욕에 서울보다 커뮤니티가 많다면 그건 왜 그럴까. 그리고 커뮤니티는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독립서점은 대형 서점이 아닌 곳?독서문화를 중심으로 생각해본다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독립서점이 갖는 독자적 개성이다. 서점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아이들와일드서점(Idlewild Bookstore)은 여행서를 주로 다루며, 미스터리어스서점(Mysterious Bookshop)은 미스터리, 맥널리 잭슨(Mcnally Jackson)은 문학을 취급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반스앤드노블(Barns & Novel)이 온갖 책을 유통하는 메이저 체인 서점이라면 독립서점들은 다른 전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관심사를 가진 독자들이 서점에 모이고, 이는 그들이 꼭 같은 지역에 살지 않더라도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블루스타킹스는 페미니즘 전문 서점이며, LGBT나 진보적 정치 성향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가 서점의 기반이다. 매달 페미니스트, 진보적 교육자들을 위한 북클럽이 정기적으로 열리며, 레즈비언들이 모여 뜨개질을 하는 친목모임(Dyke Knitting Circle), 여성과 트랜스젠더를 위한 오픈 마이크(작품을 낭독하거나 의견을 말하는 자리)도 하고 있다. 지역·학교·회사가 아닌 아이덴티티를 기반으로 한 서점 커뮤니티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개인들에게도 분명 힘이 되어줄 것이며, 그 멤버십은 지속적으로 서점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이유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양한 독립서점과 커뮤니티가 가능한 또 다른 이유는, 그 고유성을 보장할 만큼 많은 독립출판물과 독립출판사들의 존재였다. 한마디로 한 서점에서 파는 책을 오직 거기서만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뉴욕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사람들과 뭔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의 독립서점 ‘더북소사이어티’와 부산의 대안공간 ‘생각다방산책극장’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선 많은 사람들이 독립출판물을 만들고 있지만 그것이 판매로는 잘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독립출판물을 소개하고 작업자들끼리 만날 수 있는 장인 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있지만 작업자 간의 교류가 어렵고, 판매 과정에서조차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3일간 책을 구입하는 소비자는 있으나 그들을 독자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왜 사람들은 북페어에서만 책을 사고 평소 서점엔 오지 않을까 등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편으로 서울에 독립출판물을 유통할 수 있는 독립서점이 10개 이상 생겨났지만 그 공간들에서 파는 독립출판물의 변별성이 별로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 이유는 독립출판물이 그만큼 없었기 때문이고, 당장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보니 질문이 맴도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나는 뉴욕과 서울의 ‘독립출판’에 대한 개념부터가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한국에서 독립출판은 ‘소규모 출판’(Small Publishing) 또는 ‘자가 출판’(Self Publishing)과 구분되지 않고 쓰이는 단어다. 한국의 독립출판은 혼자 원고를 쓰고 제작을 맡는 출판의 한 형태라는 인식이 있다. 그 때문에 책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점을 독립출판의 특성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자가 출판’의 특성은 ‘독립출판’과는 구분돼야 한다.
뉴욕의 스트랜드서점(Strand Bookstore)은 대략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육박하는 크기의 서점이고, 저명한 출판사 시티라이트(City Light) 역시 자신을 ‘독립’으로 규정하고 있다. 크기나 명성의 차원에서 판단한다면 이들은 ‘독립’일 수 없다. 나는 한국의 독립출판이 그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느낀다. 메이저 출판사와 대형 서점이라는 가치를 중심에 둔다면, 메이저 출판이 아닌 다른 한편에는 메이저가 되지 못한 출판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가치를 택한 것으로 보였던 독립출판에서조차 우리 내면의 비교 기제가 나타날 때, 우리는 영원히 경쟁할 수밖에 없다.
가장 흥미로운 발견은 뉴욕의 서점들이 비영리단체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경우가 많으며 출판사를 운영하고 교육 공간으로 자리하는 점이었다. 프린티드매터(Printed Matter Inc.)는 아티스트북의 판매, 연구, 출판 지원 등을 1차 목표로 1976년에 설립된 비영리단체로, 뉴욕 첼시 인근에서 독립서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북아트센터(The Center for Book Arts) 역시 비슷한 목표를 갖고 1974년에 설립된 단체다. 이들은 ‘아티스트 레지던시 및 장학제도’를 운영한다. 선별된 아티스트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역량(프린트, 바인딩 등)을 개발하며 전시 출판을 하고 다른 아티스트와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전문가들 또한 기술을 전수함으로써 이러한 책 문화가 보존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북아트센터는 시인들을 대상으로 ‘챕북 경연’(Chap-book Competition)도 한다. 시 원고(약 10편 내외)를 지원받은 뒤 선정된 원고로, 센터의 북아티스트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챕북’은 한국의 독립출판에서도 볼 수 있는 책등이 없는 형태의 얇은 책을 말한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책을 만드는 과정에 이렇게 다양한 아티스트가 협업할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거니와, 완성된 책을 내기 전에 작가가 진행 과정을 선보이는 도구로 챕북이 기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현실로 돌아와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청탁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한 권의 책을 내기도 전에 사장되는 작가들이 있다. 학벌 등의 이유로 좌절하는 번역자도 있다. 문학작가, 비평가, 에세이스트, 번역자, 이들을 발굴해 챕북 에디션으로 소개할 수 있다면 어떨까. 메이저 출판 과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디자이너와 편집자들이 이 과정에 함께해서 텍스트에 이상적인 형태의 책을 만들고 멤버십을 가진 독자에게 그 책을 판매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 책이 시리즈가 되어 명성이 쌓이면 신인의 투고를 받을 수 있고, 당연히 완성형의 책도 출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책에 관한 행사가 열리는 서점. 이들이 강사가 되고, 독자들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작은 학교. 그곳에서 나의 커뮤니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준 모임 ‘네시이십분’ 대표 jaineyre@naver.com, twitter @jaineyre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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