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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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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사라지지 않을 동독

통일 뒤 동독 문화 폐기 움직임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 외려 동독
정체성 강화 가져와… 내적 변화 없는 전환은 ‘횡포’일 뿐
등록 2014-11-21 07:15 수정 2020-05-02 19:27

평양을 방문하는 외부인들의 눈에 여성 교통보안원은 신기한 명물이다. 하얀 모자와 푸른 제복을 착용한 채, 평양의 주요 교통 교차로에서 날랜 손짓으로 안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런데 4년 전부터 교통보안원 대신에 발광다이오드(LED) 신호등이 전면적으로 보급되고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앞으로 여성 교통보안원들이 완전히 사라질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찌됐든 평양 주민들에게 그들은 이미 오랜 삶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북한 사회의 내적 필요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외부인들이 교통보안원 체제를 ‘촌스럽다’며 강제로 없애고 ‘현대’식 신호등 체제를 마음대로 ‘이식’한다면 평양 시민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통일 뒤 없어질 뻔했던 동독 신호등. 사람 형상의 ‘신호등맨’이 담겨 있다. 이정연 기자,

통일 뒤 없어질 뻔했던 동독 신호등. 사람 형상의 ‘신호등맨’이 담겨 있다. 이정연 기자,

1990년 통일 전, 동독과 서독의 보행자 신호등은 서로 달랐다. 서독의 신호등은 우리와도 비슷한 모양으로 밋밋하게 서 있는 사람 형상을 담은 것인 데 반해, 동독의 ‘신호등맨’은 모자를 눌러쓴 모습이며 친근감을 주는 캐릭터였다. 머리통이 크고 다리가 짧은 아저씨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녹색등의 ‘신호등 아저씨’는 앞으로 걸어가는 형상이라 식별하기 아주 수월했다. 1961년 카를 페클라우라는 교통심리학자가 빈발하는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보행자를 염두에 둔 교통체계를 고안했던 것이다. 그 뒤 30여 년 동안 ‘신호등 아저씨’는 동독 주민들의 삶에 깊숙이 박힌 인장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교통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동독의 ‘신호등 아저씨’는 서독의 신호등에 비해 더 인간친화적이고 주의력이 높아 실제 교통사고 방지에도 효과가 더 컸고 미적으로도 훨씬 나았다.

신호등 아저씨를 구출하자!

통일 뒤 사정이 달라졌다. 서독 출신 정치 엘리트들은 동독 지역의 ‘신호등 아저씨’를 제거하고 서독 신호등으로 교체하려고 했다. 동독 주민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1996년 동독 전역에서 ‘신호등 아저씨를 구출하자’라는 이름의 시민운동이 등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호등 아저씨’가 동독 지역에서 부활한 데 이어, 오히려 베를린 전역으로 확대 도입되었다. 심지어 일부 서독 지역 도시에서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신호등 아저씨’ 구출 운동은 통일 뒤 서독 중심의 체제 이식에 질린 동독인들이 벌인 본격적인 문화적 저항의 신호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랜 삶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통일 독일의 쓰레기장으로 폐기되는 것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동독인들은 서독 출신 정치 엘리트들의 일방적인 체제 이식과 패권 횡포에 대항해 독특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오스탈기’라는 이름의 문화적 저항이 그것이다.

오스탈기(Ostalgie)란 오스텐(Osten·동쪽, 동독)과 노스탈기(Nostalgie·노스탤지어, 향수)의 합성 조어로 ‘동독에 대한 향수’를 뜻한다. 1992년 처음 등장한 이 용어는 독일 통일 뒤 정체성 상실과 자괴감을 겪던 동독 주민들이 지난 삶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문화적 자의식과 자기 긍정을 뜻하는 말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오스탈기는 통일과 동독에 대한 담론을 지배했던 서독 엘리트 중심의 주류 언론과 정치에 맞서 동독 주민들이 ‘우리 삶도 나쁘지는 않았어!’라고 버티며 새롭게 긍정적인 대항 담론을 창출하는 과정 그 자체다.

동독이나 동독 주민을 주제로 다룬 영화나 소설, 동독 시절의 팝음악이나 유행가, 동독 관련 인터넷 사이트의 인기에서 오스탈기는 주로 확인할 수 있다. 오스탈기 파티, 오스탈기 쇼, 청소년들의 록음악 축제, 동독 시절 텔레비전 프로그램, 동독 시절의 의복, ‘신호등 아저씨’ 관련 상품들의 유행도 마찬가지다. 옛 동독 시절 상표의 물품들, 이를테면 담배 에프젝스(f6)와 카비넷, 론도(Rondo) 커피, 클럽 콜라, 로트캐프헨 샴페인같이 동독 시절에 자신들이 소비했던 식료품과 기호품 애용 등 동독 지역 주민들의 일상문화와 생활세계에서 오스탈기 현상은 쉽게 드러난다.

‘소비’ 넘어 ‘이야기’가 된 오스탈기

특히 식료품과 기호품류의 ‘동독 제품‘은 ‘잃어버린 고향(조국)’을 대신해 삶의 연속성과 자존심을 보장해주며 새로운 기억과 경험 공동체의 생성에 톡톡히 한몫했다. 동독 지역 주민들은 동독 제품들의 ‘순도’와 ‘진실성’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우리 것’에 대한 신토불이식 집착을 보였다. 알량한 서독 제품들보다 ‘더 질이 좋은’ 동독 상표의 기호품을 소비함으로써 이미 사라진 국가에 대한 심적 보상을 스스로 마련한 셈이다.

게다가 동독 제품은 단순히 소비 차원을 넘어 그것에 대한 ‘이야기’의 집단적 공유로 증폭됐다. 심지어 젊은 세대도 동독 제품 애호에 동참했다. 동독의 청년 세대도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나 가족 내 일체감과 지역적 결속의 강화를 위해 동독 제품의 구매와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동독 출신 청년들은 ‘제3세대 동독’ 문화 운동의 기치를 내걸며 각종 행사와 저술 활동을 통해 동독 정체성을 새롭게 확장하고 있다. 기이하게도 동독 시절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청소년들에게도 오스탈기 현상과 동독 정체성은 확인된다. 그것이 가정과 지역 공동체에서 세대를 이어 전승되기 때문이다.

동독 지역 시민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독 식료품·기호품 꾸러미. amazon.de 갈무리

동독 지역 시민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독 식료품·기호품 꾸러미. amazon.de 갈무리

동독인들의 고유한 경험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의 전달과 관련해서라면 언론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동독 지역 주민들은 정보 취득을 위한 매체로 서독인들이 만드는 전국 일간지나 주간지가 아니라 주로 ‘동독 신문’을 구독한다. 그에 반해 서독 지역에서 발간되는 신문의 구독률은 매우 낮다. 이를테면 동독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간지는 이 아니라 단연 (SUPERillu)다. 가족용 주간지를 표방하는 이 매체는 1990년 여름 통일 직전 동베를린에서 창간된 잡지인데 무엇보다 동독인들의 관심과 정서를 대변한다. 이 주간지는 동독인들의 일상생활과 동독 역사와 문화에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면서 동독인들 사이의 경험과 기억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당연히 서독에서 이 잡지의 독자는 드물고 심지어 그것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섣불리 동독 지역의 한 카페에서 코카콜라를 마시고 서독 담배를 피우며 서독 신문을 읽는다면 험한 봉변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센 눈총은 충분히 받게 된다.

사실 오스탈기 현상과 동독 정체성의 배경은 1989~90년 독일 통일 과정 및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90년 동독이 서독(독일연방공화국)으로 편입함으로써 동독 지역 주민들은 이전과 아주 다른 정치제도와 경제체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서독의 법·제도와 삶의 방식은 너무도 급작스럽게 동독 지역으로 도입됐다. 적응과 재교육의 시간은 모든 동독 주민들에게 힘겨운 노력을 요구했다. 고통과 마찰은 불가피했다. 물론 애초 동독 주민들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의 전환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동독 주민들에 의해 개시됐고, 또 순식간에 이루어진 흡수통일도 최종적으로는 동독 주민들 다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연합의 틀 내에서 동독 지역이 자율적인 민주화와 완만한 경제적 구조 변화를 서서히 이루어내는 식의 대안은 1990년 초 동독 주민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서독 체제 모델이 동독 지역에 이식되면, 동독인들이 아무런 비판과 저항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할 거라는 서독인들의 기대는 나름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통일 뒤에야 비로소 형성된 정체성

그러나 삶은 기계가 아니고 문화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몸은 과거를 기억하고 머리는 경험을 현재로 잇는다. 정치와 경제 제도는 몸과 머리가 기억하는 경험의 생활문화를 뽑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람들의 고유한 경험과 기억, 독자적 가치와 지향을 담지 못하는 체제 전환은 아슬아슬하거나 흉측할 뿐이다. 갈등과 긴장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동독의 서독으로의 통합 과정에서 동·서독인들 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는 통일 전 동독에 대한 서독인들의 인식이 너무도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장애는 통일 뒤에도 서독인들이 동독인들의 오랜 경험과 고유한 삶의 방식을 전혀 알려 하지 않았고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에 비해 동독인들은 오히려 통일 뒤에 비로소 자신들의 삶에 대해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동독 지역 주민들은 통일 뒤부터 제대로 공산주의 지배의 오랜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의 경험과 기억에 대해 말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 동독인들은 그 낯선 자유가 아주 소중했고 그것을 마음껏 사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동독인들이 어렵게 확보한, 그 자유롭고 독자적인 경험과 기억과 이야기의 공동체는 서독인들의 무관심과 냉대에 부닥쳤고, 그것에 대한 반발로 더 강렬한 집단 정체성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통일 뒤 동독 지역에서 생겨난 동독 주민들의 집단적 정체성은 경험과 기억에 근거한 이야기 공동체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정치 현실이나 경제 상황에 대한 해석이나 미래 전망과 연관되기보다는 이미 사라진 동독 사회에 대한 집단적 경험과 기억에 의거하고 있다. 그렇기에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아래로부터의 동독 정체성은, 한편으로 공산주의 동독 시절에는 상상도 못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뒤 동·서독인들이 분단국가 정체성을 넘어 통일 독일의 정체성으로 결속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동독이라는 국가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탄생했고, 통일 뒤 단일한 독일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하고자 했던 위로부터의 시도를 가볍게 비켜가며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동독 고유의 업적과 성과’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곧장 특정 방향의 정치적 지향이나 선택으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서독인들의 오만과 이기주의, 표피적이고 형식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소외된 물질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했으나, 자유주의적 합의민주주의,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시민문화, 사회적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거부는 주변적 현상에 불과했다. 아울러 그것은 특정한 방향의 정치적 지지나 단일한 형식의 사회적 저항으로 동원되지도 않았다.

물론 얼핏 오스탈기와 동독 정체성은 ‘내적 통일’의 장애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통일 뒤 동독 지역의 사회적 위기와 생애사적 곡절 속에서 자기 위로와 확인을 통한 동독인들의 사회 통합 과정이다. 통일 독일 내에서 사회의 이질성을 촉진하거나 분열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옛 동독 공산주의 정권을 변호하거나 사회주의 체제 시절의 폐쇄적인 정치문화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며, 현존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하거나 서독인들에 대해 배타적 적대성을 조장하는 것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의 긍정적 경험과 기억을 끌어내 현재의 집단적 자의식을 강화하며, 고유한 자기 인지와 해석을 통해 정치공동체에서 정당한 자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다.

아우성·웅성거림이 전하는 이야기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통일을 법·제도나 사회·경제 체제의 통합 내지 이식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는 관점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구체적 삶의 공간에서 대중이 고유하게 발전시키고 해석하며 확산한 기억과 경험을 하찮은 것으로 보지 않는 태도 말이다. 결국 통일은 화려한 공식 정치 무대에서 양복 입은 중년의 신사들이 모여 서명하는 행위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는 일이다. 통일은 다양한 통합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기억, 가치와 지향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고 서로 삶의 자락들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일을 포함한다. 아울러 그것은, 어떤 정치 결정이나 과정의 경우든, 자유선거나 의회 연단이 빚어내는 민주적 공정성을 제대로 높이 평가하되, 거리와 시장에서 일어나는 아우성과 카페와 술집에서 퍼져가는 웅성거림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함을 웅변한다.

결국 삶의 현장과 몸의 요구에 뿌리박고 기억과 경험이 녹아 있는 내적 변화가 아니라면, 어떤 ‘개혁’과 ‘전환’도 그저 폭력적 횡포일 뿐이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삶을 항상 비켜가며 끝내 되치기 당한다. 그렇게 역사는 지속된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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