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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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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 ‘외로운 분자’들 마음에 점을 찍는 시간

시청역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이야기하고 잡지를 만드는 ‘시청역의 점심시간’
등록 2014-10-17 06:27 수정 2020-05-02 19:27

김근혜(25)씨는 지난해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부근에 있는 회사에 취업했다. 대학 졸업을 6개월 유예하면서 1년간의 취업 준비 끝에 들어간 회사였다. 취업하기 전 시청은 김씨에게 ‘꿈’이었다. “학생 때 시청에 오면 ‘이렇게 빌딩이 많은데 나를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어요. 시청 근처를 오가는 멋지게 차려입은 직장인들 모두 부러웠고요.” 부러움도 잠시, 비교적 짧은 준비 기간을 보낸 뒤 근혜씨도 멋진 직장인이 됐다. 우연인지 일터도 시청역 부근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처음 배치받은 곳은 원하는 부서도 아니었다. 같은 부서에는 40대 팀장과 50대 부장만 있었다. 점심시간이 힘겨웠다.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그에게 찾아온 ‘숨구멍’은 페이스북에서 본 ‘시청역의 점심시간’이었다. 시청역 인근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모여 글을 쓰는 모임이다.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지난 9월 초 5호 잡지가 나와 서울 청계천에서 돗자리 깔고 치맥 뒤풀이를 하던 중 천둥번개를 동반한 빗방울을 피하기 위해 급히 카페에 들어가서 함께 만든 이들이 사진을 찍었다. 5호 잡지는 14명이 ‘내 가방 속’을 주제로 글을 썼다. 시청역의 점심시간’ 제공

지난 9월 초 5호 잡지가 나와 서울 청계천에서 돗자리 깔고 치맥 뒤풀이를 하던 중 천둥번개를 동반한 빗방울을 피하기 위해 급히 카페에 들어가서 함께 만든 이들이 사진을 찍었다. 5호 잡지는 14명이 ‘내 가방 속’을 주제로 글을 썼다. 시청역의 점심시간’ 제공

‘시청역의 점심시간’을 처음 제안한 건 프리랜서 출판기획자 김현정(31)씨였다. 김씨는 시청역에 있는 ‘코워킹 사무실’ 스페이스 노아에서 일했다. 1인 기업, 신생기업, 프리랜서 등이 하루 커피 한 잔 값으로 사무실을 공유하며 일할 수 있는 곳이다. 김씨는 이곳으로 출퇴근하면서 궁금해졌다. “같은 지하철 역에서 내려 크고 작은 주변의 건물들로 빨려들어갔다가 다시 같은 지하철역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어떤 얼굴과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일터 동네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 일터 동네 잡지 의 시작점이다.

지난해 8월 페이스북이나 ‘집밥’ 등 소셜 모임 사이트 등에 ‘일터 동네 잡지’를 만드는 을 알리는 글을 올렸다. 처음에는 한 달짜리 강좌 형태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들어 출간 파티까지 하는 일정이었다. 9월에 사람들이 모였다. 시청역 부근에 있는 대기업에서 일한 지 만 6년에 접어들던 심정선(38)씨에게 그 ‘모집글’은 “적적한 회사 생활에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심씨는 회사에서 동료가 많지 않은 부서에서 일한다. 그래서 혼자 밥 먹는 일이 많다. “처음에 을 보고 반상회 한번 가볼까 하는 느낌이었어요. 실제로 그래요. 밥벌이와는 별 상관 없는 주제를 놓고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시답잖은 농담도 하다가 다시 일터로 돌아오면 적적했던 마음이 훈훈해져요.”

지난해 8월에 시작된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연인원 40명이 만나 올해 8월까지 다섯 권의 잡지를 만들었다. 잡지 한 권마다 10~20명이 참여한다. 지난해 10월에 나온 1호는 ‘점심’이 주제였고, 12월에는 ‘지혜’를 주제로 2호가 나왔다. 김현정씨는 ‘동네 잡지’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싶어 서울시 주민제안마을사업으로 신청했고 그 지원을 받게 됐다. 지난 6월에는 ‘연장’, 7월에는 ‘여름’, 8월에는 ‘내 가방 속’을 주제로 한 책이 만들어져 시청역 인근 카페와 식당 등에 배포됐다. 10월에는 ‘단골’을 주제로 한 잡지가 나올 예정이다. 매 잡지의 만듦새도 다르다. ‘연장’을 주제로 한 3호는 이면지와 폐지를 주운 뒤 실로 꿰서 만든 ‘핸드메이드 친환경 잡지’였고, ‘여름’을 주제로 한 4호는 그림그리기 강좌를 들으며 그린 그림과 글을 엮은 엽서책 형태였다.

다섯 권의 책을 만드는 동안 ‘점심밥을 먹는 시간’은 ‘마음에 점을 찍는 시간’(點心)으로 바뀌었다. 모임이 만들어진 이래 1년도 안 되는 사이 ‘동네 시청’ 주민들의 일터가 많이 바뀌었다. 김찬솔씨의 직장은 서울 양재동으로 이사를 갔고, 천예지씨 등은 서울 역삼동에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 출산휴가를 떠난 사람도 있고 회사를 그만둔 사람도 있다. 점심때 만나는 일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점심’의 의미를 마음에 쉼을 주는 시간으로 바꾸고 지난 6월부터는 저녁에 만나고 있다. 저녁에 만나서 좋은 점은 “좀더 내밀해졌다”는 것. 김찬솔씨는 “점심때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좀더 많이 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어딘가에 뿌리내리는 느낌이다”

을 만드는 ‘일터 주민’들은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마음이 깊어졌다. 스쳐지나가던 것들에 의미를 새겼다. 6호를 만들기 위해 ‘단골’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를 알아봐주는 일터 옆 커피집 사장님과의 사이에 친근함이 싹텄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안경찬), 시청의 버스 정류장을 애틋해하게 됐으며(김혜정), 시청역 8번 출구의 하늘을 기억하게 됐는가 하면(유하연), 시청역 부근 화장실들의 우선순위를 매기게 됐다(강상모). 성채은(31)씨는 “벌써 직장생활 6년차다. 그런데 매일 하는 일이 비슷하다보니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지금까지 왔다. 일상에 감사하며 살고 있긴 하지만, 흘려보내는 일과 시간이 많은데 ‘단골’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한 김밥가게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여름’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계절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현정씨는 ‘일터 동네 잡지’ 을 만들면서 “매주 한 번씩 만나는 일정한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에 심리적 안정감이 생겼다. 어딘가에 뿌리내리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도시에서 일하는 마음이 헛헛한 자들에게 ‘같이 글 쓰고 얘기하고 놀자’고 말한다. 아, 점심이지만 사실 저녁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itylunch.co.kr, www.facebook.com/citylunchbreak’ 참조.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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