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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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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목욕탕은 어디로 갔을까?

종로 중앙탕·용산 원삼탕 등 동네 사랑방 같은 옛날 목욕탕 르포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소박하고 거리낌 없는 사교의 마당
등록 2014-01-17 05:49 수정 2020-05-02 19:27

그 많던 목욕탕은 어디로 갔을까. 추위가 매서운 계절, 김이 오르는 화려한 온천시설을 검색하는 오늘과 달리 목욕 바구니를 들고 동네 목욕탕으로 총총 뛰어가던 어제가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통계청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대중목욕탕·온천탕·찜질방 등을 포함하는 욕탕업체 개수는 2000년 전체 9808개에서 2012년 6779개로 줄었다. 추이를 살피면 소규모 목욕탕의 감소는 급격한 반면 대규모 목욕탕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종업원 수 1~4명인 목욕탕은 2000년 7848개에서 2012년에 4989개로 줄었다. 종업원 5~9명을 보유한 목욕탕 또한 1705개에서 1311개로 줄었다. 반면 종업원 10~19명 규모의 목욕탕은 221개에서 372개로, 20~49명의 종업원이 있는 비교적 대규모의 목욕탕은 30개에서 97개로 늘었다.

대기업 회장, 전직 대통령도 찾던

서울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중앙탕은 동네의 오랜 터줏대감이다. 북촌의 한적했던 골목이 관광객으로 북적이며 변모해가는 사이, 목욕탕은 여전히 찬바람 새어들까 창문 틈을 비닐로 꼼꼼히 덮고 낡은 모양 그대로 서 있다. 중앙탕은 1969년 문을 열었다. “내 생각엔 1969년도 전에 열었을 거야. 저기 중앙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분이 계신데 그 선생님이 지금은 여든이 넘었지, 아마. 그분 총각 때부터 여기 목욕탕이 있었대요. 그때는 이 목욕탕이 저기 위에 중앙고 것이었다는데, 그때는 대중탕이 아니라 그 학교 야구부·축구부 선수들 샤워장이었어요. 그러다가 학교에 샤워장이 생기면서 대중목욕탕이 되었지.” 현재 목욕탕을 운영하는 박희원(68)씨의 말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중앙탕은 1969년 개업했다고 등록돼 있지만 허가 없이 운영하던 시기가 있어 1950년대에 개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는 1979년부터 중앙탕을 맡아 관리하기 시작했다. 박씨의 개인사는 한국 대중목욕탕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1973년에 제대하면서 목욕탕 생활을 시작했어요, 이발사로. 효제탕이라고 거기서 용역 맡아 들어가 집을 세 채나 샀지. 그런데 집 담보로 돈을 빌려줬다가 사정이 나빠져서 (재산을) 잃어버렸어요. 여기(중앙탕) 주인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랑 친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딸이 맡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우리한테 한 달만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 이렇게 30년이 넘었네.”

대기업 1세대 회장, 전직 대통령 등 알 만한 사람들도 자주 찾았다. 손님이 드물 때는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놓고 단골 손님들과 허물없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주로 손님이 별로 없는 이른 아침에 오시곤 했지. (잠시 뜸을 들이다) 그런데 이건 자세히 쓰지 마요.” “왜요?” “음식점 같은 데는 유명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하면 더 잘되는데, 이상하게 목욕탕은 그러면 더 안 찾아오더라고요.”

1월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인터뷰는 사람 한 명 앉을 수 있는 좁은 카운터와 여탕 출입구 앞 계단에서 이뤄졌다.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2시간 동안 딱 세 번 몸을 일으켜야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할머니 두 분과 모녀에게 길을 터주느라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할머니를 찾아 목욕탕에 쫓아온 손녀에게 들어갈 길을 내주느라 한 번. 그리고 손님은 남탕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두 분 말고 더 없었다. “평일에는 남녀 손님 합쳐서 20~30명 정도 돼요. 어제는 20명이랬나?” 하루 손님 200~300명이 들던 시절도 있었다. “한 사람 나가면 겨우 자리가 생겨 한 사람 앉고 그랬어요. 내가 처음 왔을 때는 종업원도 10명이었어.”

탕에 앉은 이들과 나눠먹는 냉커피

정옥이, 수진이… 오래 다니던 손님들의 이름도 다 기억한다. “여기 목욕탕에 와서 응애응애 하던 아이가 애 둘을 낳아서 왔더만. 동물을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그리고 유학 갔다 와서 때 밀고 이발하러 온 녀석도 있고. 5학년 때까지 아빠를 따라다녔던 이 앞집 사는 친구는 지금 대학생이에요. ‘아저씨가 때 밀어준 것 기억나?’ 하면 지금은 창피해하는데 그때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어요. 인천에서도 오고, 강남에서도 오고, 옛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요. 일본 손님도 많았어. 지금은 엔화가 떨어져서 줄었는데….”

서울 한가운데서 변화무쌍한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왔지만 돌이켜보니 인연을 나눈 이들과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박씨의 마음에 더 오래 남아 있는 듯했다. 박씨는 이 목욕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라고 했다. 중앙탕이 긴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주변의 동네 목욕탕 여섯이 문을 닫았다. 현재의 목표는 “하는 데까지 계속 운영하는 것”뿐이다. 박씨는 목욕탕 운영이 쉽지는 않지만 “손님이 단 한 명 오더라도 물은 매일같이 바꾼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에 위치한 원삼탕에서 입장료를 치르며 샴푸와 린스를 샀다. “보디샴푸는 안 파나요?” 물으니 처음부터 ‘이런 걸 다 사네’ 하는 표정이던 카운터에 앉은 할머니가 “그런 건 없어요”라고 말했다. 탈의실에 들어서니 옷장 위로 목욕용품이 담긴 바구니가 촘촘하다. 매일같이 목욕탕을 드나드는 손님들의 것이다.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 는 목욕탕인 ‘중앙탕’ 의 탈의실은 현재 사 람보다 오래된 물건이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 고 있지만, 이 공간도 200~300명의 손님 으로 발 디딜 틈이 없 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시 제공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 는 목욕탕인 ‘중앙탕’ 의 탈의실은 현재 사 람보다 오래된 물건이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 고 있지만, 이 공간도 200~300명의 손님 으로 발 디딜 틈이 없 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시 제공

원삼탕은 1966년 문을 열었다. 온탕 2개, 냉탕 1개, 한증막 1개, 샤워기는 10개 남짓. 한 차례 리모델링을 거친 시설이지만 그럼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온탕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사람 서넛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작고 나머지 하나는 그 두 배 정도 크기다. 온탕 하나에 아줌마 예닐곱이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아줌마 한 사람이 플라스틱통에 냉커피를 한가득 담아오더니, 컵에 따라 탕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도 한잔 들어요.” 목욕탕에서 처음 보는 아낙과 인사를 나누는 법이다. 얼렁뚱땅 그렇게 커피를 얻어마셨다.

TV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하는

탈의실과 목욕탕 사이에는 커다란 유리로 벽이 세워져 있었는데, 탕에 앉은 이들은 그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을 보며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창밖이 큰 무대 같고 목욕탕은 관객석 같다. 노모를 모시고 온 아주머니가 목욕을 마치고 나가서는 어머니의 몸 구석구석을 닦고 옷까지 입혀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딸이 할머니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는데,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던 아줌마들도 “할머니 웃는다”며 따라 웃는다. 창밖의 손님이 사라지자 아줌마들은 다시 둥글게 앉아 요즘 보는 연속극 이야기, 오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연예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줌마 한 사람이 친척이 믿을 만한 곶감을 판다는 얘기를 꺼내니 어느새 곶감 공동구매로 주제가 바뀐다. 욕조 속 물이 경계를 넘어 넘실대듯 주제가 다른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오갔다. 오래된 동네 목욕탕은 그날의 뉴스를 전해듣는 곳, 물건을 사고파는 곳, 처음 보는 사람과 커피를 나눠 마시며 얼굴을 트는 사교의 마당이었다. 곁에 앉은 손님에게 “여기 아주 오래된 목욕탕이죠?”라고 물었다. “그렇지.”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됐나요?” “잘은 모르는데, 이 동네에서뿐만 아니라 꽤 오래된 걸로 들었어. 아줌마들 시끄럽지? 완전 시골 목욕탕 같지?”

서울 용산구 원효로3 가에 위치한 ‘원삼탕’ 에서 20~30년 단골 이 기본인 동네 손님 들은 행여나 누가 물 을 많이 쓰기라도 하 면 “아껴쓰라”며 잔소 리를 하기도 한단다. 서울시 제공

서울 용산구 원효로3 가에 위치한 ‘원삼탕’ 에서 20~30년 단골 이 기본인 동네 손님 들은 행여나 누가 물 을 많이 쓰기라도 하 면 “아껴쓰라”며 잔소 리를 하기도 한단다. 서울시 제공

원삼탕은 TV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등에 단골로 등장하는 서울의 오래된 목욕탕이다. , 최근에는 에도 ‘원잠탕’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1월9일 만난 진중길(73)씨는 1987년 원삼탕을 인수했다. “여기서 30년 넘게 일하고 있는 (보일러 등을 관리하는) 기관장·이발사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는 대단했지. 하도 손님이 많아서 서로 몸이 부딪쳐서 때를 못 밀 정도였대요. 박통 시절에 위생시설이 부족하다고, 새마을목욕탕이라고 지정해서 문을 열었어요. 그래서 목욕탕 개업식에 지역 국회의원들도 오고 했다고… 소문이 그래요.” 목욕탕은 현재 용산 전자상가 자리에 있었던 농산물 도매시장인 중앙시장이 가까이 있어 한때 손님이 차고 넘쳤다. 명절과 주말에는 온 동네 사람들의 집합소 같았다.

그러나 살 냄새, 물 냄새 뜨뜻하게 뒤섞이던 시절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오랜 단골들만 찾는 작은 목욕탕이 되었다. “(손님이) 고마 살살 없어지더만, 언제부터 결정적으로 없어졌냐면 은평뉴타운 들어서고 사람들이 이사 나가면서…. 사람이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야 할 텐데, 그리 되지 않았어요. (창문을 열며) 저 앞의 지금 고물상 자리에 원래는 집이 여러 채 있어서 다섯 가구 정도 살았고, 여기 정육점 자리도 집이었고. 작은 집이 다닥다닥 모여 있을수록 목욕시설이 잘돼 있지 않으니까 목욕탕 손님이 많았죠.” 현재 손님은 하루 평균 60~70명 정도. 목욕탕은 공식적으로 새벽 5시에 열어 저녁 7시에 문을 닫는데, 동네 목욕탕 운영이라는 게 그렇게 공식대로 되는 법은 없다. “목욕탕 뒤에 기관장이 사는데, 동네 사람들이 새벽 4시만 돼도 목욕탕 문 열어달라고 벨을 눌러서 못 견뎌요.” “할머니·할아버지들이요?” “다들 그런다니까.”

마포구 신석탕, 성동구 성수목욕탕 등

“이것 좀 함 봐보이소.” 진씨가 종이봉투에서 꺼내 보여준 서류에는 원삼탕이 최근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올 2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될 예정인 서울 미래유산은 ‘근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서울시청 문화정책과 김달종 주무관은 “박물관 문화재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우리 생활과 밀접해 있어 시민들에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 물건 등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방문한 원삼탕과 중앙탕 모두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었다. 이외에도 2대째 가업으로 운영 중인 마포구 신석탕(1962년 개업), 성동구 성수목욕탕(1967년 〃), 용산구 영수탕(1968년 〃), 동대문구 미도탕(1969년 〃) 등이 각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고 김 주무관이 설명했다. 그렇게,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가장 소박하고 거리낌 없는 공간인 오래된 목욕탕들이 동네와 사람들의 역사를 품고 서 있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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