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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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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서 다시, 큐레이터의 도전

‘묻지마 투자’ 뒤 세계 금융위기와 함께 사라진 미술계의 황금기,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겠노라 작심한 함영준·현시원·안인용
등록 2013-11-16 13:21 수정 2020-05-03 04:27
세대교체가 느렸던 현대미술계에 새 전시장을 열고 도전에 나선 다음 세대 기획자들. ‘커먼센터’의 함영준(왼쪽), ‘시청각’의 현시원 큐레이터.정용일

세대교체가 느렸던 현대미술계에 새 전시장을 열고 도전에 나선 다음 세대 기획자들. ‘커먼센터’의 함영준(왼쪽), ‘시청각’의 현시원 큐레이터.정용일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새로운 혁신을 보기 어려워졌다. 작가 수는 넘쳐나고 전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열리고 있으니, 겉으론 별 문제가 없어 뵈기도 한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소모적 공회전이 이뤄질 뿐, 이렇다 할 문제작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언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대관전 없는 기획전의 시대를 지나

문제는 다각적이지만, 일단 현대미술계의 조로가 심각하다. 한국의 컨템퍼러리 미술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형성됐다. (추상미술 세대나 민중미술 세대와 달리) 개발독재 시대의 이미지와 조형을 직관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줄 아는, 새로운 386세대의 예술가들이 대두했던 때가 1990년대 초반. 삼성의 호암갤러리가 동시대 미술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도 1988년이었고, 1991년 아트선재미술관 등이 뒤를 이었다.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설립됐고, 광주 비엔날레도 출범했다. 1990년대의 미술계엔 힘이 넘쳤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엔 유학파 작가들이 대거 귀국해 세대 변환이 완성됐고, 그를 대안공간의 시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1999년 등장한 루프, 풀, 쌈지스페이스, 사루비아 등이 대관전 없이 기획전으로 일관하며 양질의 실험을 선뵀고, 1998년 개관한 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현 플라토)와 대우재단의 아트선재센터가 그 성과를 갈무리해 번듯한 전시를 만드는 형세를 이뤘다. 이렇게 형성된 2000년대의 지형에서 한국 당대 미술의 황금기가 꽃피었다.

하지만 2006년 5월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 미술시장의 거품은 거의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이른바 ‘묻지마 투자’가 이뤄지는 가운데 주요 화상들은 앞다퉈 중국에 진출했고, 서울 강남에 대형 분점을 차렸다. 대중의 싸구려 취향에 야합하는 회화를 팔아치우는 풍조가 등장하더니, 전속작가 제도를 악용해 팔리는 그림을 찍어내도록 강요하는 화랑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시장 과열의 드라마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함께 희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아트펀드에 손댄 갤러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망했고, 그 많던 사기꾼들도 돈줄이 마르자 종적을 감췄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1970년대 말 이후에 태어난, 이른바 ‘88만원 세대’ 미술가들. 2013년 현재 그들은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가난에 허덕이며, 국공립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돌며 간신히 창작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치적 세대화의 기회를 잡지 못한 그들은, 구세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무한 반복하며 양질의 전시 기회가 오길 갈망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현대미술계가 이리 허무하게 망하라는 법은 없는지 새로이 도전장을 내민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겠노라 작심한 주인공은, 함영준(1978년생), 현시원(1980년생), 안인용(1980년생)이다.

함영준은 상업갤러리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한 적도 있고, 영화평을 쓴 적도 있고, 공연장 로라이즈를 공동 운영하며 콘서트 기획을 한 적도 있고, 유명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일한 적도 있는, 재주가 많은데 정체는 다소 불분명했던 인물. 라는 동인지를 공동 창간하면서 비로소 세대의 구심점으로 떠올랐고, 드디어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커먼센터’라는 이름의 “새로운 미술 공간”을 개관한다. 함영준이 홀로 디렉터 직함을 달고 있지만, 커먼센터는 사실상 디자이너 김형재(1979년생), 미술가 이은우(1982년생), 디자이너 김영나(1979년생)가 의기투합하는 아티스트-러닝-스페이스다.

청년들의 문제작은 내년을 어떻게 맞을까

아티스트-러닝-스페이스는, 큐레이터나 평론가들이 주축이 된 대안공간과 달리 작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전시관으로, 작품 거래를 도외시하는 논-프로핏(none profit) 기관이 아니라 낫-포-프로핏(not for profit) 기관, 즉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으나 작가 지원과 공간 운영을 위해 공격적으로 작품 판매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커먼센터는 오는 11월29일 금요일 오후 6시에 개관 준비전으로 이은우와 김영나의 협업 프로젝트 ‘적합한 종류’(Suitable Forms)를 개막한다(전시 문의: commoncenter.kr@gmail.com https://twitter.com/CommonCenter_kr).

반면 기자 출신의 큐레이터 현시원과 역시 기자 출신으로 독립문화잡지 (Walking Magazine)을 공동 창간한 안인용은,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프로젝트 스페이스’를 표방하는 ‘시청각’을 개관한다. 오는 11월28일 목요일 오후 6시에 개관전 ‘노 마운틴 하이 이너프’(No Mountain High Enough)를 개막하는데, 참여 작가는 Sasa[44], 남화연, 박길종, 슬기와 민, 옥인콜렉티브, 이영준, 잭슨홍, 서영란, 김형재+홍은주로, 연령이나 작업 종류 모두 다양하다. 2014년 총 5회의 기획전과 개인전을 치를 예정이라고(전시 문의: fourseasonsqq@gmail.com https://twitter.com/AVPavilion).

이들 신생 전시 공간의 등장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과 맞물려, 어떤 모습의 새 시대를 조각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내년은 광주와 부산에서 비엔날레가 열리는 해고, 또 삼성미술관 리움의 10주년이기도 하니, 미술계에 오랜만에 활력이 돌 예정. 청년 작가들의 문제적 작업과 전시를 고대한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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