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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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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애인은 남성 비청소년, 나의 X는 여성청소년”

“우리가 여기에 있다” 삭제당한 ‘나들’이 아우성치는 29개의 선언
등록 2013-05-20 01:16 수정 2020-05-02 19:27

기자는 “충격적”이라고 하지 못해 “새롭다”고 에둘러 말했고, 그들은 “새롭게 보일 수는 있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들의 일상이란 것이다.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대리인)은 지난 4월부터 ‘나는 처녀가 아니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발칙한 페이스 선언’ 운동을 벌였다. 5월8일까지 27개 선언이 카페(cafe.naver.com/youthsexualright)에 올라왔다. 대리인은 ‘부끄러울 것도, 죄지은 것도 없는 청소년들의 당당한 페이스 선언’이라고 부제를 붙였다. 여기엔 성폭행 같았던 첫 경험, 연애 못하는 자신을 루저로 느끼는 순간, 성소수자 청소년의 고군분투, 심지어 사도마조히즘(SM) 취향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대리인 활동가 쥬리는 “관심은 있지만, 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며 “모르는 이들이 보내온 선언을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충격적 고백은 자주 간절한 목소리에 실린다.

‘제니, 주노‘는 임신한 10대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선언에는 사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청소년의 성경험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겨 있다. 쇼이스트 제공,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인터넷 카페 화면 갈무리

‘제니, 주노‘는 임신한 10대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선언에는 사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청소년의 성경험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겨 있다. 쇼이스트 제공,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인터넷 카페 화면 갈무리

‘여학생’과 ‘남성으로 보이고 싶은 청소년’ 사이“나는 한 달 전 졸업까지 11개월을 남겨둔 채로 여고를 자퇴했다. 11개월만 더 버티면 졸업장을 따낼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단 11개월이라도 여고에서 여학생으로 있고 싶지 않았기에 자퇴를 결정했다. 여고에서 나는 내가 아니라 ‘여학생’일 뿐이었다. 나는 ‘여학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남성에 가까운’ ‘사회적으로 남성으로 보이고 싶은’ 청소년이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모두 성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대다수 트랜스젠더들은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처음 생각한 것이 청소년기 때이거나 그 이전이라고 말한다. …청소년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권리는 성인이 된 후의 나중의 권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갈 권리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선언에 참여한 대리인 활동가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에 기고한 글이다. 페이스 선언에서 그는 “애인과 손을 잡고 걸을 때 누군가 게이라고 우리 쪽을 보며 웃으면, 남자로 잘 보였단 기쁨과 호모포비아에 대한 짜증을 동시에 느낍니다”라고 썼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젠더를 정체화한 트랜스젠더(FTM)이면서 남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인 자신을 보는 시선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드러난 표현이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내가 처녀인 게 맘에 안 든다”“우리 동네에는 단관극장이 하나 있었다. …상영관은 2층이었는데, 위층에는 영사실을 사이에 두고 양쪽 끝에 작은 방처럼 생긴 공간이 있었다. 우리는 종종 그곳에서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보며 데이트를 했다. 어둡고 작고 낡은, 금지된 것의 틈새에 몰래 자리잡은 것 같은 작은 승리감, 그러나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찜찜한 굴욕감. 우리의 장소였던 그곳은, 또한 우리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연애를 하는 이야기만 아니라 연애를 못하는 사연도 있다. 18번째 선언은 “분홍분홍한 연애를 즐기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괜히 루저 같고 못나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짝사랑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한다. 14번째 선언도 “난 처녀는 아니지만 동정이고 이러한 내 상태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마무리된다. 여기엔 짐작과는 다른 반전이 있다. “나는 에스에머(SMer·사도마조히즘을 즐기는 사람)다. 비록 성관계를 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내가 에스에머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이성애자들이 이성애를 해보고 성정체성을 깨닫지 않는 것처럼, 나의 취향도 그러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취향에 대해 ‘정신이상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친구들의 말을 견뎌야 하는 고통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편견보다 내게 가장 힘든 건 현재 애인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혼자만의 비밀을 넘어 고민을 친구와 나눈 이야기도 있다. 자신을 아직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에 가두고 싶지 않지만, 첫 연애를 동성인 여성 청소년과 했던 17살 청소년의 선언을 들어보자.

“에이의 애인은 남성 비청소년이다. 피임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난 듯했다. …우리는 혹시나 누가 들을까 계속해서 주변을 경계했다. 만약 누군가 여성청소년 셋이 ‘섹스’라든가 ‘피임’ ‘콘돔’ 등의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것을 목격한다면 우리를 ‘이상하고 문제가 있는 발칙한 년들’이라고 멸시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전 애인은 여성청소년이다. 나는 ‘죄책감’이 참 싫다. X(편의상 앞으로 전 여친은 X로 표기)가 친구들에게 당당히 애인이 나라고 소개하지 못하는 것에 난 죄책감을 느겼다. …X를 남자친구로 지칭하며 주변인에게 자랑하고는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을 느끼는 나에게 분노했다. 나와 에이가 지은 죄는 무엇인가? …에이와 나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있지만 같은 맥락 속에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각하고 다듬는다. 작은 구멍을 통과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나’를 삭제해버린다.”

선언들 속에는 이렇게 삭제당한 ‘나들’이 아우성친다. 글들은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외친다. 이 기사에서도 ‘삭제당한’ 더 급진적인 경험들이 대리인 카페(cafe.naver.com/youthsexualright)에 올라온 글들에 담겨 있다. 물론 선언에 담긴 경험이 보편적 경험이 아닐지 모른다. 이은심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대표는 “10대가 동일하지 않다”며 “일반고 10대, 탈학교 청소년, 대안학교 10대, 특목고 학생들의 성경험은 매우 다르다”고 지적한다. 페이스 선언을 일부 읽어보았다는 그는 “10대를 성적 존재로 보지만 성행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대해 모호하고 유보적인 자세를 취해온 사회에 이들이 질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느냐가 관건

대리인이 성소수자운동에서 시작된 이유도 있지만, 선언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도드라진다. 엄기호 문화학자는 “이성애자 남성청소년이 성적 주체라는 것은 암묵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며 “이들에게는 선언 같은 것을 통해 존재확인, 인정투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여성과 성소수자에게는 이런 선언이 인정투쟁의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10여 년간 성소수자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부각되면서, 성소수자 청소년에게 ‘서사의 매뉴얼’이 생겼다. 성정체성을 깨닫는 과정, 커밍아웃의 순간, 동성애자커뮤니티 경험 등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 말이다. 엄기호 문화학자는 “사실 청소년이 성적 주체라는 대리인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라며 “모임이 청소년의 성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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