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충격적”이라고 하지 못해 “새롭다”고 에둘러 말했고, 그들은 “새롭게 보일 수는 있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들의 일상이란 것이다.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대리인)은 지난 4월부터 ‘나는 처녀가 아니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발칙한 페이스 선언’ 운동을 벌였다. 5월8일까지 27개 선언이 카페(cafe.naver.com/youthsexualright)에 올라왔다. 대리인은 ‘부끄러울 것도, 죄지은 것도 없는 청소년들의 당당한 페이스 선언’이라고 부제를 붙였다. 여기엔 성폭행 같았던 첫 경험, 연애 못하는 자신을 루저로 느끼는 순간, 성소수자 청소년의 고군분투, 심지어 사도마조히즘(SM) 취향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대리인 활동가 쥬리는 “관심은 있지만, 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며 “모르는 이들이 보내온 선언을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충격적 고백은 자주 간절한 목소리에 실린다.
‘제니, 주노‘는 임신한 10대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선언에는 사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청소년의 성경험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겨 있다. 쇼이스트 제공,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인터넷 카페 화면 갈무리
‘나는 처녀가 아니다’ 선언에 참여한 대리인 활동가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에 기고한 글이다. 페이스 선언에서 그는 “애인과 손을 잡고 걸을 때 누군가 게이라고 우리 쪽을 보며 웃으면, 남자로 잘 보였단 기쁨과 호모포비아에 대한 짜증을 동시에 느낍니다”라고 썼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젠더를 정체화한 트랜스젠더(FTM)이면서 남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인 자신을 보는 시선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드러난 표현이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연애를 하는 이야기만 아니라 연애를 못하는 사연도 있다. 18번째 선언은 “분홍분홍한 연애를 즐기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괜히 루저 같고 못나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짝사랑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한다. 14번째 선언도 “난 처녀는 아니지만 동정이고 이러한 내 상태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마무리된다. 여기엔 짐작과는 다른 반전이 있다. “나는 에스에머(SMer·사도마조히즘을 즐기는 사람)다. 비록 성관계를 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내가 에스에머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이성애자들이 이성애를 해보고 성정체성을 깨닫지 않는 것처럼, 나의 취향도 그러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취향에 대해 ‘정신이상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친구들의 말을 견뎌야 하는 고통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편견보다 내게 가장 힘든 건 현재 애인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혼자만의 비밀을 넘어 고민을 친구와 나눈 이야기도 있다. 자신을 아직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에 가두고 싶지 않지만, 첫 연애를 동성인 여성 청소년과 했던 17살 청소년의 선언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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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들 속에는 이렇게 삭제당한 ‘나들’이 아우성친다. 글들은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외친다. 이 기사에서도 ‘삭제당한’ 더 급진적인 경험들이 대리인 카페(cafe.naver.com/youthsexualright)에 올라온 글들에 담겨 있다. 물론 선언에 담긴 경험이 보편적 경험이 아닐지 모른다. 이은심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대표는 “10대가 동일하지 않다”며 “일반고 10대, 탈학교 청소년, 대안학교 10대, 특목고 학생들의 성경험은 매우 다르다”고 지적한다. 페이스 선언을 일부 읽어보았다는 그는 “10대를 성적 존재로 보지만 성행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대해 모호하고 유보적인 자세를 취해온 사회에 이들이 질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리인이 성소수자운동에서 시작된 이유도 있지만, 선언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도드라진다. 엄기호 문화학자는 “이성애자 남성청소년이 성적 주체라는 것은 암묵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며 “이들에게는 선언 같은 것을 통해 존재확인, 인정투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여성과 성소수자에게는 이런 선언이 인정투쟁의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10여 년간 성소수자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부각되면서, 성소수자 청소년에게 ‘서사의 매뉴얼’이 생겼다. 성정체성을 깨닫는 과정, 커밍아웃의 순간, 동성애자커뮤니티 경험 등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 말이다. 엄기호 문화학자는 “사실 청소년이 성적 주체라는 대리인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라며 “모임이 청소년의 성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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