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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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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이용철·황진미·허지웅 좌담회 전문

등록 2013-03-28 00:07 수정 2020-05-03 04:27
이용철·황진미·허지웅 3명의 영화평론가가 함께 한 좌담회 전문입니다. 지면에서는 미처 다 담지 못했던 9시간을 넘긴 평론가들의 긴 이야기를 전합니다._편집자
영화 은 특히나 평단의 평가와 관객의 반응 사이의 간극이 크게 느껴졌다. 최근 평단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다.

이용철(이하 이) 평단의 점수와 관객 수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어요. 평단과 대중이 어긋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저는 그보다 관객을 보는 시선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어요. 며칠 전 를 보니 어느 평론가가 “짜장면에 길들여진 관객에게 이젠 고급 음식을 먹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중이 선택한 영화를 저급 음식에 빗대는 생각은 문제가 있어요. 울고 싶어서 1200만 명이 봤다는 멍청한 분석은 안 해야지요.

허지웅(이하 허) 저는 모두가 울고 싶어서 본 건 아니겠지만 중요한 요소인 건 분명하다고 봐요. 그런 말이딱히 비하 같지도 않고요.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는 잘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죠. 그런데 1200만이 됐다면 영화의 힘만이 아니라 외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뜻인데 그중 하나가 눈물의 힘이라는 거죠. 사람들이 워낙 지쳐 있었는데 가장 값싸게 마음을 풀 수 있는 수단이 영화였죠. 그렇다고 누군가의 말처럼 “야권 패배 뒤 울고 싶은 사람들 마음을 건드린 덕분”이라는 건 정말 아니고요.

황진미(이하 황) 지난해 사법 비리를 고발하는 영화가 쏟아져나왔죠. 도 있고 도 있고. 공분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서 굳이 불편한 진실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요. 만 해도 그런 영화를 견딜 수 있을까 결심을 하고 가야 했죠. 그런데 이 영화는 캐릭터 코미디인 것처럼 홍보했지만 가서 보니까 눈물, 사회비판적 코드가 있고 게다가 해법으로 상생을 내놓았죠.

그 영화에서 기분 나빴던 것은, 예를 들면 경찰청장이 몹시 비현실적 캐릭터잖아요. 특정한 정서를 대변하고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해 그런 캐릭터를 이용하는게 그 영화 전반의 정서예요. 게다가 기존 신파 영화들의 나쁜 관습들에 기대고 있는 편이죠. 언제까지 지적장애인은 무조건 레인맨이거나 착한 사람이어야 하나요. 그러나 류승룡씨 덕분에 덜 불편하게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또 기획력이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어요. 그게 제작사의 힘인 것 같아요. 만약 이 감독의 전작에 비해 잘 짜여져 있다면 제작사 NEW와의 시너지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에서 감독 이름이 지워지는 현상이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최근 들어 화제는 한국 영화 대표 감독들의 귀환이다. 허지웅·황진미 평론가는 952호에서 박찬욱 감독의 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말 싫으셨어요? 저는 비평가는 절대 윤리적 근거에 비추어 영화를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옆집에 그 여자가 이사 오면 싫겠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윤리적으로 나쁘겠죠. 그러나 어차피 이게 영화고 상상력의 산물인 건데 윤리적 잣대를 동원하고 싶지는 않아요. 전 잣대질이 제일 싫어요.

비평하는 사람은 쇼호스트가 아니잖아요. 잘 만든 영화인지를 평가하는 것보다 영화로부터 발생하는 담론이 더 중요하죠. 다 좋은데 보안관은 왜 죽이냐고요.

박찬욱 정도의 감독이라면 윤리가 아니라 태도가 중요하죠. 와 에 똑같은 장면이 있는 거 아시죠? 하얀 꽃에 피가 튀는 장면요. 쿠엔틴 타란티노와 박찬욱은 동년배에다 서로를 존경하지만 두 장면을 비교해봤을 때 타란티노는 원숙한데 박찬욱은 청년이에요. 는 분노의 이유가 확실하고 그 분노를 피로 표현하죠. 박찬욱에게 피는 그냥 스타일이에요. 히치콕 감독의 와 똑같은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히치콕은 관객의 마음과 합의를 해요. 칼이 파고들지 않아도 공포를 심어주죠. 그런데 이 영화는 그대로 베끼면서도 감정적으로 몰입이 안 돼요. 삼촌이 조카한테 살인을 과시하고, 조카가 사람을 죽이는데도 모조리 의미 없는 살인이에요.

출정식이니까요. 앞으로 세상과 만나는 접점에서 모든 방해가 되는 자들은 없애겠다는 선언 같은 거죠.

혼자만의 문제라면 그러려니 했겠는데 아빠 허리띠에 엄마 블라우스, 삼촌이 선물한 신발을 신고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은 미국 부르주아 집안의 일탈로밖에 안 보여요. 그 태도가 절박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문제예요. 는 어떤 절박함도 없이 그냥 살인을 저질러요. 박찬욱은 그전 영화에서도 계속 그런 스타일의 인물에 대해 낄낄거리며 즐기고 있었어요. 하지만 보는 나는 전혀 즐겁지 않아요.

그럼에도 는 미국 영화산업을 통해 절충된 부분이 있어요. 와는 다르죠. 유희적인 즐거움을 줄인 것은 끊임없이 의견이 조율됐다는 증거라고 봐요.

박찬욱의 공허함이 문제죠. 박찬욱이 오래전 쓴 책를 가끔 보는데, 책 뒤편에 걸작들을 까놓은 글이 있어요. 그런데 그 문구들이 모두 제가 박찬욱 영화에 하고 싶은 말이에요. “과대평가…” “공허하다”. 박찬욱이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정확해서 무서웠어요. 이 영화 정말 매혹적이죠. 잘 만든 것 인정해요. 그러나 성장담이라면 부정적이에요.

박찬욱·홍상수 감독 영화가 시사회를 갖던 날, 현장에서는 여러 의견이 나뉘었는데 정작 지면에서는 한 가지 소리만 있었다. 비평, 말하지 못하는 것인가, 말하지 않는 것인가.

전 이해할 수 없었던 게 홍상수 감독 영화는 나오자마자 영화잡지에서 대대적으로 다뤄요. 솔직히 저는 그 글들을 안 읽어봐요. 일단 잘 안 읽혀요. 인터뷰도 그렇죠. 감독은 굉장히 짧게 우연이다, 이야기하는데 평론가가 더 많은 살을 붙여요.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기이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용철 평론가가 말했듯 누구의 영화는 좋은 영화고 누구는 저급하다는 식으로 영화에 급수를 매기는 태도는 이상해요. 평소 잘 만드는 감독, 못 만드는 감독이라 해도 영화는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작가론에 기반한 태도죠. 그 사람이 양산하는 영화는 훌륭하다는 이상한 믿음요.

영화를 지우고 아예 감독론으로 채우는 영화 기사들이 있잖아요.

홍상수의 영화는 다양성 측면에서도 중요하고 자기 세계도 확실하고 윤리적 측면도 있어요.

평단의 과한 반응이 싫다는 거죠.

영화만 나오면 간증이 시작돼요.

홍상수도 싫을 것 같아. 오컬트주의지.

전 워낙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지만 개별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지 말고 단계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터 그런 조짐이 있는데 시리즈가 완성되면 그건 다른 분석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토씨까지 따지는 깨알 같은 비평은 대체 영화 분석인가요, 수사학인가요.

금석문학이죠.

어떤 리뷰는 한 단락 안에 내가 태어나 처음 보는 단어가 15개 나왔어요. 대체 이걸 누구를 위해 쓴 걸까요.

갇힌 단어들로 대중 영화를 말하지는 말아야 해요.

연말 기자와 평론가들이 뽑는 감독을 보면 한국에는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이창동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매년 재능의 발견이 있어야 하고, 신기한 감독들이 많이 나오지만 발견하려 들지를 않아요.

 

가 폐간되면서 영화잡지는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2억 명 관객을 넘어선 시대에 추락하는 평론의 위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람들은 평론가 집단에 가지는 인상이 있어요. 논쟁을 돌이켜보면 평론가들은 대중의 기호와 너무 다르다, 현학적이다, 이런 인상이죠. 요즘에는 아예 평론 잘 써주고 영화사 뒷돈 챙긴다고들 하는데 평론가에 대한 혐오가 만들어낸 소설이죠.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영화 관객은 평론을 안 봐요. 읽지 않는 평론을 두고, 허상에 돌팔매를 던지는 셈이에요.

허수아비 때리기죠.

앞선 한국 영화의 전성기로 과 가 나왔던 2006년을 이야기하는데 그 시기를 경계로 대중도 변했어요. 이전에는 영화에 대한 토론이 있었죠. 이후에는 사실 평론의 존재감은 제로예요. 지금 1천만이면 인구의 5분의 1인데 인터넷을 보면 을 둘러싼 담론이 아예 없어요.

비평이 관심을 못 받는 이유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2002년부터 영화 마케팅 비용이 크게 늘었지만 대부분 포털 사이트나 TV로 갔죠. 영화평론이라고는 별점과 20자평만 남는 거죠. 옥션 후기랑 똑같아요.

비평의 실종은 멀티플렉스 체제와 관련이 깊다고 봐요. 모든 영화가 일주일 안에 승부가 나야 하잖아요. 물량 공세를 퍼부어서 얼마나 눈에 띄냐 이런 것이 중요하지요. 작품성을 인정받아 두고두고 관객을 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동감입니다. 두고두고 영화를 볼 수 있다면 한 줄 평이 후기가 되고 담론이 될 텐데요.

평론가가 어떤 영화를 쓰고 싶다고 쓰는 것도 아니에요. 특히 어떤 영화가 싫거나 더럽게 못 만들었다면 아예 언급을 안 하니까 비판은 사라져버렸어요. 결국은 상찬만 남아요.

요즘은 좋다는 표현을 트위터로 하잖아요. 영화 기자들 트윗만 보면 매일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 탄생하는 것 같아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비율적으로 볼 때는 더 많이 남는 것은 비판적인 비평이라고 생각하는데 호평만 남기 쉬운 구조죠.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평론가도 힘들고 매체도 싫어하고….

좋아하던데요? 난 나쁜 놈 되지만 매체는 아주 좋아하던데요.

그것도 정해져 있어요. 이슈가 되는 중요한 영화를 비판하면 좋아하죠. 에 대해서만 찬반이 있지 작은 영화에 대해서는 찬반도 없어요.

 

쓰지 못한 비평이 많다는 말인데, 이 자리에서 말해볼 수 있을까.

지난해 배창호 감독이 오랜만에 영화를 만들고 그다음에 임권택 감독이 전주영화제에서 영화를 냈어요. 오랜만에 돌아온 두 감독의 영화를 보고 분노했어요. 이건 영화가 아니라 동영상이잖아요. 영화매체에 쓰겠다고 얘기했더니 안 싣겠다고 해서 더 화가 났어요. 이 영화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던 거죠. 레지던트 이후 사람이 그렇게 싫어지긴 처음이었어요.

아, 생각났어요. 2012년의 최악은 . 현실정치나 대중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영환데 대중의 순박한 감성이나 일차원적 분노를 동원해놓고 기술적으로 못 만들어버린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대해서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어버렸죠.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야권 패배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다른 영화는 다 이해가 되어도 이 100만 넘은 건 용서 못하겠어요. 그게 지난해 초였는데 이런 영화가 100만 넘었다는 사실이 한국 영화 상승세에 초를 치는 느낌이었죠. 이런 게 왜 물을 흐리나 했죠. 다행히 그 뒤로는 그런 영화가 많이는 안 나오는 것 같아요.

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면서 할리우드로 간 두 감독 박찬욱·김지운을 비교하는 기사가 많았다.

김지운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할리우드 B급 영화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잘 나온 거죠.

워낙 웨스턴 영화가 보수적 관점에서 태동했던 것이고 실제 웨스턴의 정수에는 우파적 정서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엔 김지운이 미국 상황에 대해서 오버한 것 같아요. 과대 충성이라고 해야 하나요. 비판의식을 죽이고 주문자의 마음을 맞추려고 과잉 충성하다보니 미국 사회에서도 반성하는 시선은 의식 못한 거죠

에 대해서도 처럼 감독을 지우고 영화 자체만 두고 생각해봤어요. 는 우선 영화가 재미가 없어요. 게다가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나오는 웨스턴 영화로 하려고 했다면 다른 전략을 취했어야 하는데 과장된 형식으로 점철된 영화가 됐죠.

전 영화를 보면서 김지운 감독이 뜻밖에 올드 웨스턴 장르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 장면을 예로 들면 주인공이 ‘혼자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 도움을 받으면 되는데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죠. 그러나 올드 웨스턴 정서로는 그게 맞아요. 김지운이 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을 두고 장난을 친 것처럼 올드 웨스턴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죠 . 

그래서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쉽게 만든 영화는 아니라는 거죠

김지운은 할리우드에 납품하는 영화를 잘 만들어주더라, 박찬욱은 자기 색깔을 냈다, 이게 왜 칭찬이 되나요?

칭찬이라기보다는 아시안 감독들이 서구로 가서 애먼 영화를 만든 전례를 밟지 않아서 다행이다는 생각이 더 맞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이 영화는 최소한 자신의 이름값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잖아요.

전 두 영화를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한국 영화 시장이 잘돼야겠다는 거였어요.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가 있고 관객이 있고 그 영화로부터 피드백을 받아서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 담론의 시스템이 있어야 그 안에서 도 나오고 도 나오는 거잖아요. 잘 만들면 할리우드로 가는 시스템이 정착됐을 때 불행한 난맥상을 보는 것 같았어요. 미국적 표준화나 글로벌이란 이름으로 물적 과잉이 될 때 잃어버리게 될 것이 무엇인지 너무 와닿았고요. 김지운은 기술자가 되었는데 박찬욱은 자기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도 칭찬해줄 만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나리오 한계는 너무 명확한데 그걸 가지고 한 작업이 우리랑 뭔 관계냐는 말이에요.

앞으론 연출자로서 자의식이나 실력이 있는 한국 감독들은 다 해외로 빠져나가고 한국에는 말 그대로 주문생산(OEM) 영화를 찍는 사람만 남지 않을까 상상해요. 전 그런 상황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아요. 감독들 위상이 사라지고 이름이 지워진다 하더라도 영화산업의 전체 파이는 점점 커지고 있으니까요.

전 공멸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영화를 세계를 읽는 창으로 여기잖아요. 그게 다 없어지는 거예요. 한국 배우들도 많이 할리우드로 가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찍었을 때 자기 색깔을 살렸을 때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죠. 이연걸 같은 배우도 미국에 갖다놓았을 땐 덩치 큰 서양 사람들 사이에 갇힌 꼬마가 되잖아요. 마지막 꼬마를 보는 비애감 같은 게 있어요.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서구로 간 동남아 감독들 많잖아요. 근데 몇몇을 빼곤 대부분 조로하고 곧 잊혀져요. 그런 면에서 외국 자본은 아무리 예술자본이라도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이 작가에 대해 평생 보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신정원 감독 같은 뛰어난 젊은 감독을 만들어야죠.

만든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어요. 꽉 짜인 기획으로서의 산업 영화 안에서는 절대 역량이 발휘가 안 되겠죠. 낙관이 가능하려면 흥행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필라멘트가 문을 닫는 일이 없었어야죠. 그런 측면에서 비관적입니다.

 

한국 영화가 지금의 호황을 거쳐 어디로 갈 것인가의 질문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저는 이런 의문이 생겨요. 이 2006년에 나온 에 비해 질적으로 향상된 것이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감독이 훨씬 힘이 셌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여지들이 있었어요. 감독의 비전으로 발생하는 흥미로운 영화들이 나왔죠. 신정원 감독의 영화 와 같은 최근 영화를 비교해보면 감독의 상상력이 드러나는 느낌과 갇혀버린 느낌이라는 차이가 드러나요. 그런 면에서 중소 제작사인 NEW를 주목할 만한데 먼저 을, 다음으로 를 내놨어요. 굉장히 영리하죠.

문제는 이 호황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예요. 대형 제작사발 기획 영화로 끝까지 밀고 간다면 그건 반댑니다. 제가 이 현상을 지지하는 유일한 이유는 산업적으로 굳건하게 형성될 규모나 내실을 취하자는 뜻이지요. 그러다보면 곁다리로 뭔가 더 형성될 수도 있다는 기대고요.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표준 근로계약서나 단체협약서를 관철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 주체도 지금까지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냐 어디냐 했는데 투자배급사와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영화 스태프들의 삶의 조건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죠.

정리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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