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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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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거나 워킹푸어거나

등록 2012-10-31 08:30 수정 2020-05-02 19:27
서울 동작구 사당동 총각수산은 술값이 싸서 더 좋다. 한겨레21 x

서울 동작구 사당동 총각수산은 술값이 싸서 더 좋다. 한겨레21 x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지난 10월25일 오전 충북 청주에 사는 33살의 젊은이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했다. 아들의 주검을 발견한 어머니는 경찰에게 “아들이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담배를 피운다며 베란다로 가더니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고 말했다. 평소 “취업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아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화이트칼라 구직활동 직접 벌여 쓴 르포

사회안전망이 성긴 한국 사회에서 해고가 살인이듯, 긴 실업 또한 죽음을 부른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업 스트레스 탓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구직자가 10명 가운데 6명에 달했다. 청년 실업만의 문제도 아니다. 중·장년층의 정리해고와 재취업난도 이미 일상이 돼버렸다. 얻기도 어렵고 지키기는 더 어려운 일자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포박된 나라들의 공통점이 되었다. 빈곤층에겐 내일이 없고, 중산층은 내일이 불안하다. 희망은 없다.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부키 펴냄)은 이런 출구 없는 시대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한 르포다. 저자는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에 매달리며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화이트칼라 구직자들의 세계를 통해, 빈곤층은 물론 이제는 중산층에서도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살얼음 꺼지듯 무너져가는 현실을 고발한다. 3년에 걸쳐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 등 블루 칼라 노동자의 일자리를 체험하며 쓴 전작 처럼, 이 책에서도 저자는 직접 화이트칼라 노동자로 구직활동을 벌여 자신이 몸으로 느낀 세계를 적어낸다.

잠입 취재를 위해 저자는 우선 연봉 5만달러 이상에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곳으로 ‘좋은’ 일자리의 기준을 세우고 결혼 전 성이던 ‘알렉산더’로 이름을 바꿔 합법적인 신분을 마련한다. 그 뒤 이력서를 꾸미고, 인맥을 만들고, 화장을 바꾸고, 인성까지 개조하는 대대적인 구직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이 책은 2003년 11월부터 약 10개월간 이루어진 이런 구직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

먼저 저자는 구직 세계의 법칙에 따라 자신을 취업의 길로 인도해줄 커리어코치를 구하고 연줄을 찾아 네트워킹 행사를 쫓아다닌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마주친 것은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였다. 커리어코치는 나이 때문에 걱정하는 저자에게 ‘본인이 37살이라고 생각하면 37살이 된다’는 황당한 생각에 장단을 맞추어 ‘함께 춤추자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저자는 구직자가 갖춰야 할 가장 ‘올바른’ 태도가 ‘순응’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외모에서도 기업에 순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올바른 옷차림과 적절한 액세서리’를 갖춰야 한다. 인성검사도 여기에 한몫한다. 결국 내가 해고되거나 취직을 못하는 것은 기업에 맞추지 못한 ‘내 탓’이 된다. 실직과 정리해고는 사회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고, 불평등은 정당화된다.

충성을 바쳐도 피할 수 없는 ‘배신’

저자는 구직 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이력서를 늘리고, 화장을 바꾸고, 태도까지 고분고분하게 고친다. 면접관의 말을 ‘잘 들은’ 덕분에 ‘취직’도 한다. 그런데 그 일자리라는 게 월마트 판매직만도 못하다. 기본급도 의료보험도 없고, 사무실도 없으며, 일에 꼭 필요한 노트북 컴퓨터조차 주지 않는다.

저자가 보기에 화이트칼라는 두 부류로 구성돼 있다. 일자리가 없는 구직자와 일자리를 갖고는 있으나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해야 하는 ‘생존자’. 저자가 직접 체험한 구직자는 ‘살아 있는 시체’이자 ‘투명인간’이다. 끊임없이 이력서를 보내고 전화를 해도 기업은 응답하지 않는다. 절대 오지 않을 연인의 전화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는 처지와 다름 없다. 살아남은 ‘생존자’ 역시 실업자 못잖게 ‘시름시름 죽어간다. 이제 직원은 사람이 아니라 기업의 ‘물건’이다. 수익이 나지 않으면 언제든 내다버릴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하는 최고경영자(CEO)는 주주에게 이익을 안겼다며 오히려 더 높은 보수를 받는다. 대부분의 서비스직을 아웃소싱한 50개 미국 기업 CEO의 보수 인상폭은 다른 회사 CEO에 비해 5배나 높았다. 한마디로 기업은 ‘포식자의 세상’이 되었다.

기업 밀림에서 살아남으려고 생존자들은 모든 걸 바친다.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완전한 ‘충성’을 서약한다. 자기 자신까지 ‘파는’ 것이다. 화이트칼라들은 오늘도 ‘열정’과 ‘에너지’와 ‘헌신’을 강요당하며 기꺼이 24시간을 회사에 바친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충성을 바쳐도 ‘배신’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가장 성격이 좋고, 충성심이 제일 강하고, 가장 복종적인 직원이 감원 1순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서 밀려난 화이트칼라는 아래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일자리를 잃었다가 다시 취직한 사람들의 수입은 전 직장에 다닐 때보다 평균 17% 줄어든다. 구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실직과 구직이 반복될수록 수입은 물론 자신감까지 급격히 줄어든다. ‘유능하고 주도적’이던 사람조차 ‘쓰레기’가 될 만큼.

‘기업의 노예’로 시들어가거나, 빈곤의 공포에 떠는 워킹푸어로 전락하거나. 이것이 바로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 ‘만사를 올바로’ 해온 세계의 중산층이 처한 오늘의 현실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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