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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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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곳간 열어 그들을 먹이자

등록 2012-07-17 17:15 수정 2020-05-03 04:26

5초에 1명.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아니다. 기아로 숨지는 사람 수다. 2005년 유엔보고서는 전세계에서 5초에 1명씩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적었다. 7년이 흘렀다. 인류는 부자들의 곳간을 열어 굶주린 세계를 얼마나 먹였을까? 답은 어렵지 않다. 메마른 이들은 더 배고파졌다. 세계의 비참은 계속된다.

현 농업, 지구 인구 두 배 먹일 수 있어

지구 한편에선 먹을 것이 남아돌아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데, 반대편에선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부조리한 현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오늘, 두 권의 책이 안온한 의식을 불편하게 한다. 장 지글러의 (갈라파고스 펴냄)와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발렌틴 투른의 (에코리브르 펴냄)가 그것. 등으로 잘 알려진 장 지글러는 에서 유엔 최초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8년 동안 활동하며 겪은 절망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아는 남반구만의 수난이 아니었다. 유럽도 한때 기아로 배를 곯았다. 유대인을 말려 죽이려던 히틀러의 기아 계획과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평균수명과 평균체중을 갉아먹었다. 전후인 1945년에 창설된 유엔이 세계질서의 재건과 더불어 기아와의 투쟁을 목표로 이듬해 식량농업기구(FAO)를 발족시킨 이유다. “식량 생산 농업을 발전시키고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식량을 배분”하기 위해 인권선언 제25조에 식량권, 즉 굶주리지 않을 권리를 명시하기도 했다. 1963년에는 긴급 원조를 담당하는 세계식량계획(WFP)을 만들어 늘어만 가는 재앙에 신속하게 대처하려 했다.

하지만 기아로 고통받는 당사자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현재 유엔의 목표는 2015년까지 기아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지만, 기아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수는 점점 증가한다. 농업생산력이 낮은 남반구 국가들의 기아는 항구적이다. 기아는 대물림되고 해충과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재앙은 가속화되고 있다. 기아가 ‘장기 지속’되는 데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 자유무역과 시장의 원칙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수호자들과 기아의 새로운 원흉으로 부상한 바이오연료 및 식량투기꾼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장 지글러는 말한다. “현 시점에서 전세계의 농업은 120억 명 정도는 문제없이 먹일 수 있다. 120억 명이면 현재 지구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한다. 그러니 기아는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절대 아니다. 기아로 죽는 아이는 살해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남아도는 식량은 어디로 가는가? 독일의 프리랜서 기자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와 영화감독 발렌틴 투른은 에서 환경·식량단체의 추산에 기대 전세계에서 생산한 식량의 3분의 1이 사라지거나 낭비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더욱이 들판이나 바다에서 우리의 식탁까지 이어지는 전반적인 식량사슬을 고려하면, 산업국가 식량 에너지의 손실은 50%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FAO는 2011년 5월 중순 전세계를 대상으로 실시한 식량 손실과 식품 낭비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매년 총 13억t의 식량이 헛되이 버려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총량에 맞먹는다. “유럽에서 버려지는 음식만으로도 전세계의 굶주리는 사람 모두에게 두 끼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저자들의 말이 뼈아프다.

이제 ‘살인 방조’를 끊을 때

우리는 왜 음식을 존중하는 태도를 상실했을까. 저자들은 식품이 점점 싸지고 다양해졌다는 점과 관련 있다고 강조한다. 식량이 흔하니 귀한 줄 모른다는 뜻이다. 대형마트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소비를 낳고, 이는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쓰레기 더미로 던져지는 식품도 아주 많다. 구매자에게 늘 동일하고 완벽해 보이는 제품을 선호하는 상인들은 양상추 잎 하나가 뭉개지면 양상추 한 통을 그냥 버리고, 복숭아 하나에 곰팡이가 피면 그 상자 전체를 내버리기도 한다. 상하지 않은 과일과 채소를 골라내는 일을 할 직원을 고용하면 오히려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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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무엇일까. 지글러가 사회운동적 관점이라면, 크로이츠베르거와 투른의 관점은 정책적이다. 먼저 지글러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 부단히 싸움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헌신적인 국제기구 활동가, 브라질의 땅 없는 농민들을 주축으로 한 세계 농민들의 연대체 비아캄페시나, 기아대책행동 등 여러 비정부기구(NGO)들의 활동에서 희망을 찾는다. 기아와 맞선 날들만이 기아 해방의 역사라는 것이다. 반면 크로이츠베르거와 투른은 정치적 조처의 일환으로 줄이고(Reduce), 재분배하고(Redistribute), 재생하기(Recycle)를 의미하는 ‘RRR 원칙’을 제안한다. 그리고 개인이 해야 할 일로 정치적·비판적 소비를 꼽는다. “세계의 나머지 인구가 나의 소비로 괴로워하지 않고 심지어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살고 구매하고 계속 움직이자”는 것이다. 결국 지구적으로 분노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호소다. 이제 ‘살인 방조’를 끊을 때다. 부자들의 곳간을 여는 일이 요원하다면, 과잉소비로 그득한 우리의 곳간을 열어 그들을 먼저 먹일 일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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