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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전쟁, 문혁 전초전되다

마오·장제스·류사오치·린뱌오 등 현대 중국을 만든 인물들에 대한 파란만장한 스토리,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1>
등록 2012-06-21 10:34 수정 2020-05-03 04:26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왼쪽 첫 번째)의 옆자리를 린뱌오(왼쪽 두 번째)가 차지했다. 1966년 9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추기 직전의 류사오치(왼쪽 세 번째).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한길사 제공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왼쪽 첫 번째)의 옆자리를 린뱌오(왼쪽 두 번째)가 차지했다. 1966년 9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추기 직전의 류사오치(왼쪽 세 번째).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한길사 제공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기승을 부리던 1967년 봄, 중국의 국가주석이자 공산당 서열 2위인 류사오치가 숙청을 예감하고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엥겔스처럼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라. 5대양을 떠돌며 전세계를 보고 싶다. 나는 평생을 무산계급으로 살았다. 너희에게 남겨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혁명의 배반, ‘다톈샤’와 ‘쭤톈샤’

같은 해 9월13일 새벽 3시40분,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가 미국 중앙정보국의 특수요원이라는 혐의로 체포됐다. 연금된 류사오치는 위장병과 당뇨병에 시달렸다. 감시원은 끼니 때마다 밥그릇을 바닥에 놓고 나가버렸다. 류사오치는 밥그릇에 얼굴을 대고 허우적거렸다. 악취가 풍기고 온몸이 붉은 반점투성이로 변해갔다. 얼핏 보면 ‘나병환자’ 같았지만 여전히 국가주석이었다. 1968년 10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류에게 출당 조처를 내렸다. ‘반혁명 수정주의자, 반동적 주자파(走資派)의 두목’이 이유였다. 마오쩌둥은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모든 회의를 진행시켜 퇴로를 막았다. 성공회대 김명호 교수(중국학)는 (한길사 펴냄)에서, 류사오치의 몰락이 마오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권력의 뒷전으로 물러앉았으나, 문혁을 통해 1인 체제를 수립하려 했던 마오의 권력의지를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옌안 시절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도, ‘마오쩌둥 만세’를 처음 부른 사람도 류사오치였지만, 마오는 그를 버렸다.

결국 1969년 11월12일, 허난성의 한 은행 대형 금고 안에서 류는 감금된 채로 숨을 거둔다. 192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지 48년 만이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교조적이고 집산주의적인 사회주의 건설이 아니라, 공업 발전을 통한 단계적인 체제 이행을 고민했던 류사오치. 당내 최고의 마르크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였던 그를, 당이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다톈샤(打天下), 천하를 놓고 싸울 때는 가깝기가 한 몸 같았지만, 쭤톈샤(坐天下), 천하에 군림하자 남은 건 결별이었다.” 그렇게 혁명은 배반됐다.

류사오치와 린뱌오 등 혁명 주역의 오욕의 인생에서 시작한 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20세기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다. 2016년까지 4년에 걸쳐 총 10권 완간을 목표로 한 장정의 첫발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시오노 나나미의 처럼 이 책은 ‘중국판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가 될 것 같다. 책 곳곳에 혁명가·지식인들의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이 생생한 까닭이다. 다음은 그 예다.

1955년 한 농부가 참새를 탓하는 탄원을 하자, 마오는 전국적인 참새 섬멸 작전을 명했다. 1958년에만 참새 2억1천만 마리가 살해됐는데, 그 이듬해 해충이 창궐했다. 마오는 다시 참새를 ‘복권’시킨다. 참새 박멸에 열 올린 아이들은 10년 뒤 홍위병 완장을 찼다. 참새와의 전쟁은 문혁의 전초전이었다. 한편, 홍위병 완장을 차고 ‘마오 만세’를 외친 저우언라이는 평생 마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천수를 누렸다. 저자는 문혁이 더 오래갔던 이유가 저우언라이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적었다.

공산주의자였던 장제스의 아들

건국 이후 환자 행세를 하고 다닌 부총리 겸 국방부장 린뱌오. 몸이 아프건 안 아프건 건강을 이유로 요양만 다녔다. 차가운 성질의 물이 모공으로 진입해서 내장의 더운 기운과의 모순으로 감기가 걸린다며 1958년부터 목욕을, 1963년 이후로는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오에게 ‘책임지겠다고 큰소리 안 치고, 쓸데없는 건의 안 하고, 심기 상할 짓 안 한다’는 삼불주의(三不主義)와 ‘주석이 한마디 하면 맞장구치며, 칭찬만 하고, 좋은 소식만 전한다’는 삼요주의(三要主義)가 처신의 기본 전략이었다.” 린뱌오의 아내 예췬은 틈만 나면 남편에게 일렀다. “류사오치의 전철을 밟지 마라. 매사에 무조건 복종하라.”

모든 독재자가 그러하지만 마오는 옆에서 장단 맞추기가 힘든 지도자였다. 말과 생각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를 때가 많았다. 그런 마오였지만 딸들에게는 특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오 사후에도 물려받을 만한 유산이 없었다. 마오는 두 딸이 보통 노동자가 되어 자력갱생하기를 바랐다. 한편, 마오와 장제스의 차이만큼, 그들의 가족 내력도 달랐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는 1차 국공합작 이후 커져가는 공산당을 제거하고자 반공·반소 정책으로 급선회한 아버지 장제스를 적이라 규정한 소련 유학파 공산주의자였다. 훗날 장징궈는 장제스에 이어 대만의 두 번째 총통에 오른다.

흥미진진한 사람 얘기를 위해 저자는 1980년대부터 중국·대만·홍콩 등 현지의 골동품 가게를 돌며 일기·서한·회고록·사진 등을 수집했다. 저자는 진짜 중국사는 사건보다 사람에 담겨 있다는 쪽인듯 싶다. 중국인들의 ‘뒷담화’까지 알뜰하게 긁어모아 중국 근현대의 주요 인물들을 자기 방식으로 재현·평가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좋아한 독자라면 저자의 평가가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책에 담긴 저자의 이야기가 각주없이 너무 내밀한 탓이다. 풍부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건져올릴지는 결국 독자의 몫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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